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으며/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풀뿌리로 약간의 목숨을 남겨 주었다…”(T. S. 엘리엇 ‘황무지’)
죽은 땅에서 고통스럽게 새싹을 틔우는 4월은 잔인한 달이다. 마른 풀뿌리를 눈으로 덮었던 겨울이 차라리 따뜻했다. 그 잔인한 4월이 산고(産苦)의 아픔 속에서 새 생명을 움트게 한다. 잠든 뿌리를 봄비로 일깨운다. 4월은 죽음과 생명을 한 품에 안고 있다.
4월은 예수에게도 잔인한 달이었다. 서기 30년 즈음의 4월 무렵 어느 금요일,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힌다. 십자가는 버림받은 자리… 제자들도 모두 떠나가고, 하나님도 예수의 고난을 외면했다.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소서.” 처절한 마지막 갈구에도 아무 응답을 얻지 못한 예수는 끝내 숨을 거둔다. 그리고 돌무덤에 묻혔다.
사흘 뒤 새벽, 그 돌무덤은 비어 있었다. 부활의 빈(空) 무덤… 죽은 땅에서 꽃봉오리가 피어오르고, 잠든 뿌리가 다시 깨어난다. 죽음의 잔인한 겨울이 생명의 숨결 가득한 봄으로 거듭난다. 죽음과 생명을 한 품에 안은 4월의 십자가와 빈 무덤, 그 자리는 예루살렘의 화려한 성전이 아니었다. 사형수의 붉은 피 흐르는 쓸쓸한 골고다 언덕이었다. 십자가 없이 부활 없고, 부활 없이 십자가 없다.
‘예수의 부활은 거짓’이라고 단언한 볼테르(Voltaire)는 ‘그리스도 신앙은 언젠가 역사의 무덤에 묻힐 것’이라고 자신 있게 예언했지만, 신앙은 수많은 실패와 숱한 과오에도 불구하고 저 역사의 돌무덤을 부활의 빈 무덤으로 만들고 다시 일어섰다. 어떤 허무맹랑한 거짓말이 2천년 넘도록 저 숱한 영혼을 사로잡아 삶과 인격을 변화시킬 수 있었던가?
어떤 정신 나간 사람들이 거짓말을 지키기 위해 혹독한 탄압을 무릅쓰고 순교의 피를 흘렸던가? 부활의 ‘증명’ 때문이 아니다. 부활의 ‘확신’ 때문이다.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증명되지 않는 수학공식은 적지 않지만, 그것들이 모두 틀린 것은 아니다. 우리 마음 속 증오와 분노는 증명해 보일 수 없지만, 저 뜰 앞의 잣나무처럼 시퍼렇게 살아있다. 아니, 활화산처럼 펄펄 끓어오르고 있다.
화학공식으로 증명되지 않는 어머니의 가없는 사랑, 밤을 지새며 번민하는 죄인의 양심이 모두 조작된 환상인가? 어머니의 사랑, 참회하는 양심은 엄연한 진실이다. 그 진실은 증명되지 않는다. 진실은 스스로 존재할 뿐이다. “믿는 이에게는 충분한 빛이, 믿지 않는 이에게는 충분한 어두움이 있다”. 파스칼(B. Pascal)의 깨달음이다.
“하나님은 죽은 사람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의 하나님이다.”(마가복음 12:26,27) 이 말씀의 시제(時制)는 현재다. 2천 년 전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다시 살린 하나님은 과거의 하나님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지금 여기, 우리 안에‘(hic et nunc, intra nos)에 계시다!
일곱 번 정신분열증을 앓은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부활을 의심 없이 믿었지만,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의 제자들은 빈 무덤을 보고도 스승의 부활을 선뜻 믿지 못했다. 사도 도마는 스승의 손과 발에 남아있는 선명한 못 자국을 확인할 때까지 끝내 의심을 버리지 못했다. 르낭(Ernest Renan)은 마리아의 의심 없는 믿음을 가리켜 ‘여덟 번째 귀신에 홀린 것’이라고 비아냥거렸다.
그런데 교황 그레고리우스는 “아무 의심 없는 마리아의 믿음보다 의심꾸러기 도마의 형편없는 믿음이 내 신앙에 더 큰 도움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깊은 의혹의 늪을 헤쳐 나온 ‘빈 무덤’의 탄탄한 믿음이다. 그 빈 무덤의 예수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최초의 크리스천은 바로 그 ‘의혹과 확신의 두 얼굴’을 지닌 사도 도마였다(요한복음 20:28). 그는 나중에 인도로 건너가 순교한다.
모차르트의 무덤 안에는 그의 유골이 없다. 모차르트의 시신이 어디에 묻혔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무덤 없는 모차르트… 죽어서도 230년이 지나도록 생생한 숨결을 내뿜는 예술혼(藝術魂)에게 무슨 무덤이 필요할까? 오스트리아 빈(Wien)의 모차르트 무덤은 빈 무덤, 가묘(假墓)다. 지금 우리 안에 살아 숨 쉬는 그리스도, 그의 빈 무덤처럼…
빈 무덤처럼 이 세상에 자기 자리가 없었던 예수는 지금 우리 삶 속에, 우리 마음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저 세상의 천국이 아니라 ‘지금 이 세상의 천국’을 보여준 예수는 ‘모든 율법의 본뜻이 사랑’이라고 가르쳤다. 무소불위의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다수의 민중이 아니라, 우리 곁의 가난하고 소외된 작은 이웃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한 예수… 스스로 묻는다. 우리 삶의 발걸음은 ‘빈 무덤의 예수’를 따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