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직필] 하라 세쓰코와 맥아더, 그리고 역사인식
하라 세쓰코. 일본이 미국 통치하에 있을 때 맥아더 원수의 시중을 들던 당시 일본 제일의 배우다. 세쓰코는 나라가 망했으니 몸을 바치는 것은 각오할 수밖에 없다고 받아들이고 맥아더가 사실상 천황으로 군림하던 동안 맥아더를 정성을 다해 섬겼다. 세쓰코도?맥아더 같은 영웅을 모셨으니 영광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일화는 당시 일본이 얼마나 미국에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내주고 생존에 급급하였던가를 보여주는 처참한 이야기다. 이 실화는 그 후 일본이 세계의 2, 3위 경제대국이 되어, 위안부 문제니 난징대학살은 없었다고 우기고,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억지부리며 한국을 도외시하는데, 미국은 ‘일본해’를 지지하는 행태를 이해하는 하나의 열쇠가 된다.
일본이 패망하였을 때 그들은 조선, 만주, 중국에서 저지른 50여년 동안의 죄과를 알기에 단단히 각오를 했다. 무엇보다도 여자들은 모두 능욕당할 것을 각오했다. “전쟁에서 졌으니 별 수 없다. 모두 나라를 위해 견디라”고 할머니들은 젊은 여성들에게 일렀다. 저희들이 저지른 천인공노할 죄과가 있으니 모두들 인과응보(因果應報)라고 생각하라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장개석이 이은보원(以恩報怨)이라는 생각지도 못한 도량을 보여 온전히 돌아가게 하고, 조선인들도 ‘선한 심성’을 발휘하여 무탈하게 돌아가게 했을 때에, “이게 웬 떡이냐” 정도의 요량으로 돌아갔다. 오늘날 역사왜곡의 뿌리에는 이 천한 근성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소련은 그냥 놓아두지 않았다. 부녀자는 노소가릴 것 없이 모조리 겁탈하고, 심지어 로스케 여군은 일본군 남정을 겁탈하였다. 관동군은 시베리아로 끌고 가서 노역을 시켰다. 일본을 연합국이 분할통치하자는 스탈린의 요구를 미국이 거부한 것이? 일본으로서는 천행이었다. 만약 미국과 소련이 북위 37도선을 경계로 일본을 분할하였으면 도쿄와 센다이는 오늘날의 서울과 개성처럼 되었을 것이다.
빌리 브란트 수상이 유태인 수용소에서 보인 참담한 반성과 회오로 상징되는 독일과는 달리, 일본의 역사반성이 철저하지 않은 것은 이처럼 미국 중국 한국의 전후처리가 불충분하였다는 것이 근저에 놓여 있다. 당시 미국의 대일인식은 대단히 미흡하였다. 한 여성 인류학자의 ‘국화와 칼’이 일본에 진주한 미 군정당국의 일본 이해의 교과서였다. 일본의 군국주의를 청산한다고 하면서도 대본영의 마지막 작전과장(服部卓四郞)을 복원국에 기용하였는데? 이 사람이 그후 수십년에 걸쳐 70권이 넘는 대동아전쟁사 편찬을 주도하게 된다.
일본 우익은 일본 국민과 역사를 단절하고 오히려 세계에 유일하게 ‘원폭피해를 받은 평화를 사랑하는 국민’으로 각색시켰다. 국가를 위해서라면 무조건 따르는 보통의 일본인들을 우민화하는 한줌의 극우 야쿠자들을 한일 양국의 뜻있는 사람들은 철저하게 가려내야 한다.
우리 사회의 역사인식도 되돌아보아야 한다. 한일합병 당시 일제에 후작을 받은 자(이해승)가 구체적 친일행적이 없다고 국가에서 회수한 재산을 돌려주라고 판결한 사람이 대법관이 되다니?이것이 어느 나라의 사법부인가? 이렇게 역사의식이 흐리멍덩한 자들이 아직도 영달하고 있으니 오늘날에도 일본이 독도문제로 한국을 농락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개반구제기(皆反求諸己)는 사람으로서 언제나? 추슬러야 할 기본 도리가? 아닌가?
반박할 가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