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다시쓰는 6·25](40) 蘇 휴전협상, 美 수락···’기나긴 전쟁의 서막’

중공군은 1951년 4월과 5월 두 차례에 걸쳐 일대공세를 감행하였으나 유례없는 대 손실을 입고 전선에서 대규모의 집단이탈 사태가 벌어지는 상황에 빠져들고 있었다. 반면 전체 전선에서 반격을 개시한 8군은 5월말 현재 고랑포-연천-화천-양구-원통-간성을 잇는 선까지 진출하여 차후 작전을 준비하게 되었다. 중공군의 공황상태는 1차대전시 니베유 공세가 파국으로 끝나자 프랑스 군내에 반란이 일어난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자 공산측은 휴전협상으로 전세를 만회하기 위한 시간을 벌어 보려는 흉계를 획책하게 되었다. 1951년 봄 유엔 소련대표 말리크는 휴전협상을 제의하였다. 미국을 위시한 서방각국은 이 휴전제의를 공산측이 한국을 무력으로 점령하겠다는 야욕을 포기한 것으로 간주하고, 전선현상(戰前現狀)을 회복하는 선에서 정전협상을 모색한다는 결정을 굳히게 되었다.

공산측은 한반도에서 군사적 승리를 추구할 능력이 없었으며, 미국을 위시한 서방측은 이를 추구할만한 의사가 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6월 30일 미국은 말리크의 휴전 제의를 수락하였다. 7월 10일 개성에서 첫 회담이 개최되었으나, 이 회담이 향후 2년을 넘어 1953년 7월 27일에야 종식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미 합참에서는 3주일이면 휴전이 성립될 것으로 알았다고 하니 이들은 담담타타(談談打打)라는 공산당의 기본전술을 몰랐던 것이다.

만일 미국이 그대로 군사작전을 강행하였다면 1951년 말까지는 보다 유리한 상태에서 휴전을 성립시키고 2년여 동안의 막대한 희생도 줄였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았다. 저명한 전략가 버나드 브로디는 “공산측이 휴전협상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자마자 우리가 공격을 중지한 것은 중대한 잘못이었다. 그 원인은 군사적 지도에서 보다는 정치적 지도에 있었던 것이다. 그 후 몇 차례 제한된 공세를 감행하여 압력을 가하였으나 그 때는 효력을 기대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지적하였다. 미국이 휴전을 받아들인 시기가 공산측의 공세종말점(攻勢終末點)이었다. 리지웨이, 밴 플리트 등은 이 시점까지 파탄낸 전죽(戰局)을 잘 수습해왔다. 1차대전 때 마르느전투에서 최후의 1개 대대가 승패를 결정지었던 때처럼, 미국은 ‘마지막 한 방울이 그릇을 넘치게 하는’ 결정적 시점을 기다리지 못하고 갈급한 공산측에게 물 한 모금을 삼킬 기회를 주고 말았다. 여론이 전쟁을 끌어가는 자유진영의 특성상 지구전은 실패할 우려가 크다. 경솔하게 휴전회담을 수락함으로써 미국은 공산측 득의(得意)의 정치심리전과 지구전에 걸려든 것이다.??

중공군의 강약점에 무지하여 ‘인디안의 태형(笞刑)’, ‘팔자진법(八字陳法)’에 당한 것이 전략 전술의 패배라고 한다면 공산측의 휴전 제의에 덜컥 응한 것은 정치적 리더십의 실패였다. 그리고 합참은 정치적 리더십과 군사적 리더십을 연결시키기에 역량이 부족하였다. 아이젠하워, 브래들리 등은 마샬이 키워낸 장군들이었다. 아이젠하워는 ‘사상 최대의 작전’인 노르만디 상륙작전을 성공시켰지만, 내륙으로의 진공에 있어서 아이젠하워는 몽고메리와, 브레들리는 패튼과 각각 갈등이 적지 않았다. 히틀러의 독일에 기진맥진, 만신창이가 되었던 스탈린의 소련을 막대한 원조로 살려 낸 것이 루즈벨트와 마샬의 전쟁지도였다. 장개석과 모택동의 국공합작(國共合作)을 한다고 나서 모택동에게 숨 쉴 기회를 주어 중국이 공산화되는데 일조를 한 것이 마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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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전, 심리전의 대가인 공산측을 상대로 대전략을 펴기에 미국은 아직 미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