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직필] ‘1987년 체제’와 호남소외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
1919년 9월11일 상해임시정부 개헌의 형식으로 한성정부의 조직을 계승하여 이승만을 대통령,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하는 통합임시정부가 성립되었다. 1948년 제헌헌법에서는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한다”고 하였다. 1987년 이루어진 현행 헌법에서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하였다.
3·1운동은 국민혁명(國民革命)이었다. 한일합방 후 10년 동안 민족의 자주독립의식은 깨어났다. 조선과 대한제국에서 백성과 신민(臣民)에 지나지 않던 민족은 비로소 국민이 되었다. 최남선이 기초한 ‘기미독립선언문’은 웅혼한 기백과 장려한 사상으로 영국의 마그나 카르타, 미국의 독립선언, 프랑스의 인권선언을 넘는 매니페스토였다. 이를 읽어본 일본 지식인들은 이런 사상과 문장이 있는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다는 것이 애초에 잘못된 것이라고 차탄(嗟歎)하였다. 1960~70년대 의식 있는 고등학생들은 기미독립선언문 전문을 암기하였다. 김동길이 이를 풀어내어 한글세대도 읽을 수 있도록 하였다지만 이는 궁색한 편법일 뿐이다. 어렵더라도 이를 익혀 어휘를 넓히고 사상을 정교하게 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 말과 글의 탯줄인 국어교육의 핵심이다.
“二千萬 各個가 人마다 方寸의 刃을 懷하고 人類通性과 時代良心이 正義의 軍과 人道의 干戈로서 護援하는 今日, 吾人은 進하여 取하매 何强을 挫치 못하며 退하여 作하매 何志를 展치 못하랴.”
6·10항쟁은 시민혁명···6·29는 6·10항쟁의?전취물일 뿐
6·10항쟁은 시민혁명(市民革命)이었다. 6·29는 6·10항쟁에 따른 전취물(戰取物)일 따름이다. 6·29는 군부정권의 승부수였고 동교동과 상도동의 도당들은 상쟁(相爭)하다가 정권을 군부에 고스란히 진상(進上)했다.? 4·13총선에 의한 여소야대는 여기에 격앙된 국민적 분노가 표출된 것이다. 3당 합당은 민의에 반하는 굴절이었고 ‘호남소외’였다.?호남에서는 황색바람이 불었다. 국민통합은 아득히, 저 멀리 멀어졌다. ‘1987년 체제 맨 낯’은 이것이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망국적 지역감정이 깊어진 것은 이를 조장하고 이용한 자들 때문이다. 건국 초기 지주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조선과 일본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호남의 인재는 이승만과 함께 건국의 주류를 이루었다.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 낭산(朗山) 김준연(金俊淵), 월파(月坡) 서민호(徐珉濠), 소석(素石) 이철승(李哲承)···. 지금 이들과 같은 무게를 갖는 호남의 인물이 어디에 있는가? 김대중컨벤션센터, 김대중도서관, 김대중 노벨평화상기념관···. 이처럼 모든 후광을?김대중이 누려도 되는 것인가? 호남인은 각성해야 한다. 오늘의 호남이 처해 있는 상황은 호남인이 자초한 바도 크다는 것을.
통일은 주변 4국이 시켜주는 것도 아니고,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에 대한 긍지와 신념이 북으로 넘쳐흐를 때 통일은 기적같이 온다. 정치는 국가 사회의 문제를 뜻을 모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다. 정치가 잘못 되었을 때 산적한 문제는 풀릴 수 없다. 오늘날 정치에 간여하는 자들의 행태와 맨 낯을 보라. 그런 수준과 차원에서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지켜내고 발양(發揚)할 수 있겠는가??이석기는 우연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