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25) 유엔군의 평양입성과 김일성의 도주

10월 9일 맥아더 장군의 북진명령이 떨어지자 개성지역에서 38선을 돌파한 미 1군단은 중앙의 1기병사단을 개성~금천~사리원~황주, 좌측의 24사단을 배천~해주~재령~사리원, 그리고 한국군 1사단을 구화리~시변리~수안으로 각각 진격케 하여 평양의 조기 점령을 기도하였다. 주공인 미 1군단이 서흥에 진출하였을 때 기동력에서 열세한 한국군 1사단이 평양선착의 영예를 건 경쟁에서 미1기병사단을 제치고 한발 앞서기 시작하였다. 1사단은 10월 19일 새벽 동 평양으로 돌진하여 오후 2시 평양시내에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백선엽 장군은 1기병사단장 게이 소장에 전차 1개 소대를 빌려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청년장군의 충정에 감격한 게이 소장이 이를 받아들여 1사단이 선두경쟁에 앞서게 되었다고 한다.

평양사범학교 출신의 백선엽 장군은 어릴 적 대동강에서 물놀이 하던 기억으로 도보로 강을 건널 수 있는 지점을 알고 있어서 대동강을 조기에 도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1사단은 평양 입성의 선두라는 영예를 차지하게 되었다. 낙동강 전선의 다부동 전투와 평양 선두 입성으로 국군 1사단은 전사 연구가들에게 롬멜의 7사단 등과 더불어 현대 전사에서 용명을 날린 10개 사단 중에 하나로 뽑혔다.

유엔군이 평양 점령을 앞두고 선두경쟁을 벌이고 있을 때 북한군은 주력을 청천강 북쪽으로 철수시키고 평양에서는 유엔군의 진격을 늦추기 위한 지연전을 꾀하였다. 평양 방어에는 북한군 17사단 및 32사단이 투입되었으나, 병력은 8000명에 불과하였다. 북한군은 한국군 정면에 대인지뢰 및 대전차지뢰를 매설해놓고 완강히 버티었는데, 그것은 1사단이 대동강 상류를 건너 북한군 퇴로를 차단할 수 있는 위협적인 위치에 와 있었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무정을 평양방어사령관으로 임명하였는데 어차피 기울어져가는 전세에서 연안파인 무정에게 책임을 지워 나중에 책임을 추궁할 요량이었을 것이다. 김일성은 1956년 8월 종파파동으로 연안파를 숙청할 때 무정에게 이를 문제 삼았다. 무정은 중국으로 돌아갔는데 중공군이 1958년에야 철수하였기에 김일성이 더 이상 무정을 추궁할 수는 없었다.

10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은 평양시민 환영대회에 참가하였다. 미10군단의 선두에서 해병대가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한 지 한 달만이었다. 해방 후 남북한을 통틀어 국부로 추앙받은 노 대통령으로서 적도(赤都) 평양에 입성한 감격은 형언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 이미 중공군은 북한에 들어와 있었으며 10월 25일 유엔군과 중공군 사이에 최초의 교전이 벌어지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승만의 평양 개선은 ‘종말(終末)의 시작(始作)’(the beginning of the end)이 되었다.

김일성은 황망히 도주했다. 미군은 김일성을 비롯하여 박헌영 등 주요 인사의 사무실에서 다수의 문서를 노획하였다. 미군은 이 노획문서(seized material)을 통째로 워싱턴의 National Archives로 보냈다. 노획문서는 원사료(原史料, archival material)로서 대단히 귀중하나 충분히 활용되지 못하였다. 일부 북한 및 한국전쟁 연구자가 손을 대었으나 공산권이 붕괴하여 러시아와 중국에서 자료가 나오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별로 소용도 없게 되었다.

국군은 언제 다시 평양에 입성할 것인가? 전 국민, 특히 국군은 勇躍(용약) 분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