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직필] 한국 진보의 수준

김일성이 가짜라는 주장은 여러 곳에서 제기되었다. 그러나 김일성이 1937년 6월 보천보전투에 참가한 그 김일성인 것은 맞다.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金聖柱)다. 그는 1929년에서 1931년 사이에 김일성으로 개명하였는데 구한말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을 차명(借名)한 것이다. 독립운동이나 공산주의 활동을 하던 당시에 가명을 쓰고 또는 이름을 두세 개 갖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최용건도 본명은 최석천이었고, 김일은 박덕산, 김책은 김재민, 강건은 강신태였다. 김일성이 보천보 전투에 참가한 그 김일성이 아니라는 주장은 성균관대의 이명영이 대표적인데 이것을 지적한 것이 이명영 밑에서 공부하던 이종석이다.

1945년 10월13일 스티코프에 의해 김일성 장군으로 소개되자 “저것은 가짜다”는 주장이 파다하게 퍼진 것은 민중들 사이에 김일성 장군에 대해서 오래 동안 기대해온 바가 컸는데 난데없이 33살의 새파란 청년이 등장하니 모두들 놀랐던 것이다.

조선공산당이 1928년 코민테른의 12월 테제에 의해 지하로 들어간 이래 소련에서는 조선의 인텔리 공산주의자에 대해서 기대를 접었다. 라이벌 트로츠키를 비롯하여 정통 볼세비키인 즈다노프, 지노비에프, 카메네프 등을 숙청한 스탈린으로서는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나온 이론가 박헌영이 아무래도 구미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호지명은 이승만의 연배이다. 그는 이미 1920년대에 프랑스 미국 영국 등에서 수학하였다. 호지명은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탐독하였다고 한다. 월남에서 그 연배는 조선에서와 같이 한문을 배웠으므로 그것이 가능하였을 것이다. 월남전은 미국과의 전쟁 이전에 프랑스와의 독립전쟁이 있었으며 호지명은 이 항불전쟁을 지휘하였으므로 전 월남인의 국부였다. 이는 해방 직후 남북한 모두에서 이승만이 국부로 떠받들어진 것과 같다. 호지명은 스탈린의 부하가 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주은래 등소평도 호지명과 같은 시기에?프랑스에서 노동 유학을 하였기 때문에 스탈린이 호락호락 농락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박헌영은 스탈린이 농락할 수 있는 그릇이 이미 아니었다. 김일성은 소련군이 키워낸 신진기예였으므로 북한의 권력자로 내세우기에 적합하였던 것이다. 김일성 족벌이 3대세습이라는 희한한 소극을 자행하는 것은 김일성 그릇이 그밖에 안 되는 소이(所以)이다. 20대에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엘리트들과 교유하던 호지명, 주은래, 등소평과 만주의 들판에서 고만고만한 무리들과 어울리던 김일성은 도대체 인간의 그릇이 다른 것이다.

연안에서 중공의 지도자들과 어울리던 김두봉, 최창익, 무정, 허정숙과도 김일성은 부류가 달랐다. 오늘날 한국의 종북좌파들의 행태를 보며 유유상종(類類相從)이구나하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그 부류들은 로자 룩셈부르크 등의 사회민주주의와는 차원이 다르다. 심상정의 자아비판을 보며 비슷하다는 인상을 느끼지만, 제대로 00주의자가 되려면? 아직 멀었다.

사회주의자, 민주사회주의자는 훨씬 세련된, 고매한 인텔리여야 한다. 한국의 진보는 아직 김성주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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