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는 ‘친일파’였다?
그림자도 짙은 ‘장군리더십’…트루먼 대통령에 항명 해임돼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미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엘리트 장교다. 1937년 대장 퇴역(57세), 다시 1941년 7월 소장으로 소집, 이튿날 중장 진급과 함께 필리핀극동군사령관 부임. 맥아더 장군 얘기다. 그는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 70살 나이로 유엔군사령관이 되었다. 맥아더가 역량을 갖춘 장교였기에 고령에도 불구하고 전장으로 나선 것이다.
그런데 의문사항이 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4개월, 인천상륙작전 성공 1개월 후인 1950년 10월15일, 맥아더는 태평양 웨이크에서 트루먼 대통령과 만났다. 맥아더는 놀랍게도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경례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초 회담 장소로 하와이 호놀룰루가 거론됐다. 하지만 맥아더는 워싱턴에서 4,700 마일(약 7,560 km) 떨어진 웨이크로 트루먼을 오게 했다. 트루먼이 맥아더를 만나려고 웨이크를 향할 때 “내일은 ‘하나님의 오른팔’과 이야기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6·25전쟁의 지휘를 맡은 사령관인데도 한국에서 한 번도 숙박한 적이 없었다. 전방을 방문해도 항상 당일치기였다.
당시 맥아더는 지프에서 내려 전선의 지휘관과 얘기 나누는 게 귀찮았을지도 모른다. 일선 상황을 직접 눈으로 체크하고 전장의 지휘관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군대의 사기를 직접 확인하는 일 등은 이미 그의 소관 사항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가 철모를 착용한 사진은 어디에도 없다. 보도용 사진은 늘 파이프와 선글라스, 위용을 갖춘 모습이었다.
일본 신사참배도 함께 하는 등 논란
그는 일본의 신사(神社)에서 참모들과 참배를 했다. 그는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 당시 일본은 원폭에 대하여 아무런 저항의지가 없었다. 반면 맥아더는 6·25 당시 “중국군이 개입하면 원자폭탄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트루먼은 중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지나친 북진은 삼가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맥아더는 중국의 참전은 없다며 예하 부대를 다그쳤다. 하지만 이는 중국과 소련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켰고 중국군 참전을 초래하기에 이르렀다. 1951년 북한군과 중국군의 반격으로 유엔군은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맥아더는 급기야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편다. 바로 중국해상 봉쇄, 대만 국민당군의 대륙상륙, 핵공격 등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핵무기를 사용하면 소련을 자극하고 그 결과 소련의 참전을 초래할 수 있다며 거부했다. 트루먼은 자신의 명령을 거부하고 북진을 계속하여 중국의 참전을 초래한 것에 분노했다. 트루먼은 1951년 4월11일 마침내 맥아더를 해임했다.
스스로 “인천상륙작전 성공률 0.02%”
그의 이미지와 평판은 그의 실제 행동이나 언사와 많이 다르다. 인천상륙작전은 그의 오랜 군생활 중에서 대표적인 성공작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군의 전격전에 한국군과 주한미군, 영국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은 절망적인 상황에 빠졌다. 맥아더는 급기야 주일 미 8군, 영국군과 호주군을 중심으로 영국연방군도 추가로 파견했다. 하지만 부산을 확보하는 것도 힘겹기만 했다. 이때 단행된 인천상륙작전은 국난위기의 대명사가 됐다.
우리의 공간사(公刊史)에는 인천상륙작전을 1950년 6월29일 한강 방어선 시찰 때의 맥아더 구상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맥아더 스스로 “성공 확률 0.02%”라고 말할 정도의 승산없는 작전이었다. 미 정부는 워싱턴의 콜린스 육군참모총장과 셔먼 해군작전부장, 하와이의 래드포드 태평양함대사령관, 그리고 셰퍼드 태평양함대 해병대사령관을 도쿄에 보냈다. 작전 감행을 중단시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맥아더는 작전을 강행했다.
‘지휘 및 참모활동’을 중요하게 여기는 미군은 지휘관과 참모가 임무 분석부터 2단계에 걸쳐 꼼꼼하고 정확하게 챙겨서 지휘관이 최종적으로 결심한다. 맥아더가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행할 수 있었던 것은 승리를 자신할 만한 어떤 배경이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상하좌우의 반대여론 속에서 맥아더의 독단적인 결심은 도박이 아닐 수 없었다. 맥아더의 상륙작전 결심이라는 ‘사건’은 전쟁 지도의 중요한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맥아더가 주변세력을 물리치고 어떻게 결심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의 리더십의 동인(動因)은 과연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맥아더의 직관적 사고(intuitions)와 옛 일본군 참모들의 조언 덕분이라고 본다.
직관은 말 그대로 ‘통찰에 의한 자신의 경험에서 순간적으로 도출되는 선택과 외부정보를 통합하여 떠오르는 영감’이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결심에 옛 일본군의 조언이 가장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라고 필자는 보고 있다.
맥아더의 결심을 굳히게 하였던 든든한 동인이 되었던 ‘구일본군의 조언’이 공간사에는 수록되지 않았지만 수집된 증언이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이 증언은 맥아더의 ‘親日性’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구일본군을 한국전쟁에 끌어들인 맥아더. 지금까지 그에 대한 평가는 주로 빛의 영역에 머물렀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의 그림자 영역을 제대로 밝혀내야 맥아더 리더십을 더 정확이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맥아더 연구는 또다른 쟁점을 불러올 수가 있다. 그는 승전국인 미국의 입장보다는 어떤 면에선 패전국 즉 일본 입장에 서서 본국의 정책을 유도한 측면이 자주 엿보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그를 ‘친일파’라고 부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개념적으로 알고 있던 맥아더와 일본 합작 뒷 이야기는 놀라울 뿐입니다. 국제적 협잡이었네요. 맥아더가 일본의 협잡에 그렇게 쉽게 넘어가다니…
친일파 맞습니다.
친일파 이전에 일본이 맥아더를 이용하여 조선을 재침략 하려 했지요.
맥아더에게 미국 대통령이 되도록 밀어 줄테니 일본을 도와달라는 것이지요.
요시다 시게루와 맥아더의 뒷거래가 있었지요.
맥아더와 일본 모두 북한의 남침계획을 알고 있었습니다.
남침을 역이용하여 맥아더를 영웅으로 만든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는 것이지요.
요시다 시게루는 1949년말 부터 일본경찰예비대를 모집했습니다.
인천상륙작전 개념이 이때 정립되었고
일본주둔 미군은 소련의 침공에 대비하여 뺄수 없었습니다.
상륙작전시 필요한 병력을 일본이 지원하기 위함입니다.
6.25발발시 6만명을 모집했고 일부는 훈련을 마쳤습니다.
6.25발발하자 맥아더가 국군에게 후퇴하도록 명령(협박)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인천상륙작전(쑈)을 연출하기 위함입니다.
국군은 맥아더의 계략을 알아채고 6월26일 대책회의를 열었습니다.
맥아더의 명령을 거부하며 일본군이 상륙하면 일본군을 상대로 싸우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군부의 친일파들이 사실을 엉뚱하게 왜곡하였고 국제사기꾼인 맥아더를 구국의 영웅으로 둔갑 시켰습니다.
내부의 친일매국노가 더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