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성의 한국 계파정치 34] 호랑이굴서 민정계 박태준·이종찬 제낀 김영삼의 ‘브레이크 없는 벤츠’

[아시아엔=박종성 서원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김영삼이 대권을 장악한 92년 말을 전후하여 여야 계파들은 크게 두 흐름으로 다시 이합 집산한다. 그 중 두드러진 변화는 14대 대선을 앞둔 여야 계파 내 ‘입당-탈당’이었고 다른 하나는 ‘김대중 없는’ 민주당의 새로운 당권경쟁을 위한 민주당 의원들의 경쟁 격화였다. 특히 ‘김대중 없는’ 민주당을 위기의 공간으로 인식한 호남권 인맥이 이기택을 정점에 놓고 어떻게 방황하며 정치적 견제를 도모했는지가 관전 포인트다.

결과는 이기택의 승리였지만 그는 지속적으로 당내 비주류 인사들의 견제와 개혁 정국 속에서 약세 야당을 끌고 나가기 위해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극심한 파쟁과 계파 이탈은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에도 계속된다. 특히 김영삼의 승리와 김대중·정주영의 정계은퇴는 새로운 권력구도 변화를 암시한다. 그것은 민자당이 과거 통일민주계를 축으로 당력을 재구성하고 민주당 역시 이기택 체제 아래에서 김대중 중심의 평화민주당 주축과 새롭게 동거해야 할 필요를 절박하게 반증하고 있었다.

정권장악 후 김영삼의 계파 관리는 점진적 ‘세 불리기’와 급진적 확장으로 집약된다. 그것은 ‘무소속 끌어안기’와 기습적 결단에 따른 ‘자기사람 만들기’였다. 14·15대 총선 후 무소속 영입이 대표적인 예다. 14대 국회 중반, 김영삼의 ‘세 불리기’는 민정계를 견제하고 민주계를 확실히 키워 임기 후 미래까지 확실히 담보하려는 포석으로 비칠 정도였다. 1994년 8월11일, 민자당이 ‘김정남·정주일·차수명·윤영탁·변정일’ 등 무소속 의원 5명을 영입하면서 관심은 민자당 지구당위원장 교체에 쏠리고 있었다.

민자당은 당시 전체 237개 지구당의 28%인 67개 지구당 위원장을 교체하고 개편을 기다리던 9개 부실 지구당과 16개 사고지구당 및 무소속 의원들이 입당한 5개지구당 등 30개 지구당을 합쳐 모두 97명을 바꾼다. 14대 국회임기가 갓 절반을 넘은 시점에 이미 전체 위원장들의 41% 이상을 바꾼 셈이다.

14대 대선 직전까지 영입한 18명 무소속 의원 대부분은 민자당 공천에 탈락했으나 당선 후 입당한 구여권 출신인사들이었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호일·김찬우·박희부’ 의원 등 민주계를 제외하면 ‘김길홍·이상재·하순봉·김상구’ 의원 등 나머지는 거의 민정계로 분류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새 정부 출범 후, 정치신인이나 민주계 인사들이 적지 않게 위원장으로 영입된다. 우선 네 번의 보궐선거로 등원한 ‘손학규·박종웅·강경식·이용삼·반형식·유종수·김기수’ 의원 등(入黨順)이 그들이다. 당내 물갈이 차원에서 추진된 지구당 정비작업을 통해서도 상당수의 새 얼굴을 맞아들인다. 재야 출신 김문수를 비롯, ‘전성철·이기형’ 등 법조, 학계, 재야인사 등 정치신인들이 10여명 이상 입당한다.

당시 ‘민정-민주-공화’계 위원장 분포도를 보면 합당 당시와 별 차이가 없는 ‘104:39:12’의 수준이었다. 그러나 위원장 교체작업이 진행되면서 어느 계파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들을 ‘민자계’로 분류하자면 그들은 모두 57명에 이른다. 기존 민주계와 이들을 합쳐 ‘김영삼 사람’으로 분류한다면 모두 96명으로 민정계 104명에 거의 근접한 셈이다.

그렇다면 민자당의 ‘김영삼당화(金泳三黨化)’ 정도는 겉으로 족히 45%선에 달한다는 계산이다. ‘민자계’로 분류가능한 사람들을 꼬집어 ‘김영삼 사람’으로 산정하는 데는 문제가 없지 않지만 반면 민정계 중에도 소위 ‘신민주계’로 再 계파화한 세력들이 상당수였음을 감안하자면 얘기는 상쇄된다.

야권의 세 불리기도 계속되고 있었다. 1995년의 지방선거정국은 적어도 김대중에게 더 없는 기회였다. 그가 정계복귀를 공식 재선언하는 시기는 지방선거가 끝난 다음이지만 선거 전부터 그의 행보가 빨라짐을 보고 세인들은 그의 은퇴선언이 한낱 계산된 발언이었음을 뒤늦게나마 알아차린다.

여야는 지방선거에서 정당공천범위를 어디로 한정할 것인지 고민한다. 아예 정당공천을 해야 하는지 마는지 원론적 논란까지 다다른 끝에 광역자치단체장 공천과 선거절차 및 개입에 관한 몇 가지 사전 규제조항에 합의한다. 비록 정계은퇴를 기정화하긴 했지만 김대중은 영국에서 돌아온 후 민주당 막후 실세로 자신의 정치역량을 발휘하고 있었다. 때마침 불어온 지방선거 열풍은 ‘환국(換局)’의 찬스였고 민자당의 대참패는 김대중에게 결정적 반사이익이었다. 현실정치에 개입할 또 하나의 절박한 명분이었음도 재론의 여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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