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성의 한국 계파정치 22] 당총재 김영삼-대통령 박정희 회담 내용 공개 싸고 신민당 갈등
[아시아엔=박종성 서원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김영삼은 총재로 선출된 뒤, 박정희 대통령과의 정치요담 결과 공개여부를 둘러싸고 비주류계의 신랄한 공격에 부딪힌다. 비주류는 이철승·고흥문·정해영·신도환·김원만·정운갑 등이 연합세를 형성하는 판도로 발전해 이들은 집단지도체제 논리로 차기 전당대회의 당권도전을 위해 김 총재를 포위 공략한다. 김영삼은 고흥문·정해영의 지원을 받아 총재에 당선되지만 그 후 당을 개혁한다는 명분으로 고흥문이 길러온 당료파 다수를 제거하고 고흥문마저 소외시킨다. 김영삼은 이어 신도환 또한 정무회의에서 축출하고 이철승·정해영·김원만 등도 당 핵심부에서 배제한다. 김영삼의 독주로 그들은 당권에서 점차 소외되었을 뿐 아니라 당내에 설자리마저 없어지는 게 아니냐는 위기의식까지 공감한다.
이러한 계파 간 이해관계와 사감(私感)은 비주류 연합전선의 반김(反金) 정치의식을 드높인 심리적 공약수로 발전한다. 불안한 정국 속에서 또 다른 어두운 돌풍을 예고한 신민당 전당대회는 1976년 5월26일로 결정된다. 당시 주류·비주류 계보는 지연·혈연·학연·정치자금 등으로 복마전(伏魔殿)처럼 얽혀 있었고 이해관계에 따라 누가 언제 어디로, 누구와 함께 배신할지 알 수 없는 극도로 불안하고 취약한 조직을 중심축으로 삼고 있었다. 특히 상당수 지구당 위원장들이 거의 주류·비주류 양 계파에 줄을 대고 유형무형의 이익을 챙기고 있었다는데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5월25일, 결국 그 유명한 ‘각목(角木)전당대회’가 터진다. 이날 폭력으로 쫓겨난 주류는 관훈동 중앙당사에서, 그리고 비주류는 대회장인 시민회관을 점령하여 각각 대회를 연다.
김영삼의 ‘유신반대 강경노선’과 이철승의 ‘중도통합론’에 담긴 정치적 대항논리는 결국 주류·비주류 당권경쟁을 잉태한 계파 알력을 더 심화시킨다. 이어 9월15일 열린 수습전당대회에서 이철승이 집단지도체제 당헌에 의해 대표최고위원에 당선된다. 비주류연합 측에서 신도환을 보스로 등에 업은 이기택은 이같은 파벌경쟁 와중에 중앙당 사무총장에 임명된다.
그러나 공동의 적인 김영삼을 제압하고 당권을 장악한 비주류연합(혹은 신주류)은 이제 또 다시 동지들 간 계파 암투에 빠진다. 정무회의 석상에서, 원내 공식석상에서, 그리고 원외지구당 사무실이나 비공식 모임에서도 주류와 신주류는 사사건건 충돌과 파쟁을 그치지 않았고 전통야당의 정치적 종말을 재촉하는 또 다른 역사의 흐름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박정희의 암살과 전통야당의 종말. 그리고 신군부의 등장 속에서 한국의 계파정치는 군부 계파의 단절과 지속이란 또 다른 모순과 마주한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살펴본 야권 계파변화와 달리 5·16 이후 군부계파는 어떤 문제를 갖고 있었을까? 5·16 이후 민정이양을 검토하던 박정희가 민주공화당 창당과정에 남긴 문제는 60·70년대의 또 다른 정치모순을 잉태한다. 민주공화당은 창당 당시 근대정당임을 내세우면서 계파의 존재가능성을 강력히 부정한다.
그러나 창당과정에서 박정희 군부계파는 이미 친(親)김종필 계와 반(反)김종필 계의 양대 계보로 나뉘었고 이는 장차 당내파쟁을 예고한다. 5·16은 비록 4·19 이후 여야 정치권이 보인 타락과 부정에 쐐기를 박는다는 명분을 갖지만 성공한 쿠데타를 혁명으로 미화하고 취약한 대중적 지지기반을 근대정당 건설로 조속히 만회하려던 박정희의 구상은 여기서 이내 한계에 부딪힌다. 일체의 당내 서클을 부인하고 계파 발생 가능성 자체에 쐐기를 박으려 한 단호한 의지는 벽을 만나는 셈이다. 창당과정부터 계파의 소지를 안고 출발한 민주공화당은 김종필 계파 안에서도 군 출신과 민간인 세력들로 나뉘고 민간인들 역시 구 정치인과 정치신인인 사무국 요원들로 양분, 복잡한 파쟁의 불씨를 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