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구의 필리핀바로알기] 상류층·중산층 심지어 성직자도 ‘첩’ 살림

필리핀 사람들의 첩에 대한 인식과 태도는 역사와 전통의 뿌리가 깊다. 1604년의 기록에 의하면 지방 세력자들 간의 동맹은 결혼으로 맺어지기 보다는 첩을 택하는 식으로 이뤄진 것으로 여겨진다. 1609년 스페인 관리 Antonio de Morga의 기록에 의하면 필리핀 사람들의 아내는 asawa라 불리는데 이것은 본처와 첩인 여자들의 연합(consort)이라는 의미라 한다.

첫 번째 아내와 자식들은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고 법적인 지위를 이어 받았지만, 두 번째 아내와 자식들은 상속이 없는 대신 급격히 늘어나는 부모의 토지와 부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멀리 떨어진 지역의 관리자로서 또는 제 2인자로서 파견되어 부모를 대신한 권한을 행세하였다. 1664년 Fray Andres de San Nicolas가 남긴 글에 의하면, 지배층들은 가능한 한 많은 첩들을 두고 첫 번째 부인의 지휘 감독 하에 첩들은 집안일이나 가업을 이끌었다. 성직자들과 탁발 수사들도 멕시코와의 갤리선 무역에 참여하여 엄청난 부를 쌓았고 수많은 정부와 하녀들을 두었다고 한다.

미국 식민시절에도 전통은 이어져서, 맥아더 장군같은 지배자들은 거의 매일 무희들과 즐기며 술에 취해 있었다 한다.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지배층의 첩들과 서자들은 남자가 지배하고 있는 공공기관이나 기업체의 고위직책을 손쉽게 획득하고 물려가면서 광범위하게 가업(Family Business)을 확대해 갔다. 본처는 남편과 비슷한 수준의 지배층 여자가 대부분이었고 첩들은 서민층 중에서 미모가 뛰어나고 똑똑한 여자들을 택하곤 하였는데, 지배층 출신 본처가 서민층 출신 첩들에게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는다는 것이 통념이었다.

지배층들뿐만 아니라 일부 가톨릭 성직자들마저도 정부를 두거나 심지어 그들 사이에 애들까지 있다고 한다. 중산층 남자들도 간혹 외도를 하곤 하는데, 지배층과 달리 중산층의 본처들은 시기와 질투가 심해서 첩을 숨겨야만 하고 남편이 바람을 피웠는지는 남편 사망 시에 알 수 있다고 한다. 남편의 관 곁에서 슬피 우는 여자가 숨겨 둔 첩일 확률은 거의 100%이며 실제로 그런 황당하고 어색한 상황이 장례식장에서 가끔 벌어지곤 한다. 남편의 불륜을 의심해왔던 중산층 아내는 남편의 장례식장에 첩이 나타날까봐 몹시 긴장한다는 얘기도 들리곤 한다.

첩들은 현실적으로 행복하고 만족한 삶을 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유부남과는 결혼할 수 없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필리핀에는 이혼이라는 법이 없다) 남자가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의 요구를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본처보다 자신을 더 사랑한다고 확신하기에 첩은 죽을 때까지 남자를 떠나지 않는다. 지배층이든 중산층이든, 본처가 첩의 존재를 알고 심각한 시기와 질투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남편들이 첩과 새로운 삶을 꾸리기 위해 본처를 버리는 일은 거의 없다. 그들은 본처와의 안정된 삶과 첩과의 달콤한 삶을 동시에 추구한다. 본처는 경제적인 안정과 자식들의 장래를 위해 남편을 떠나지 않는다.

TV 드라마와 영화에 나오는 거의 모든 본처들은 교양과 학식이 높지만 뚱뚱하고 매우 현실적인 사고방식을 내비치는데 비해, 첩들은 저학력에 젊고 예쁘며 언제나 섹시한 옷차림에 낭만적이고 유쾌한 삶을 사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인지 서민 계층의 소녀들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 지배층의 남자와 사귀게 되는 경우, 본처보다는 첩을 선호한다는 응답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한다. (지배층의 본처가 되는 서민층은 실제로 거의 없다.)

강준만 교수의 책에 “1961년 6월 내무부 산하에서만 첩을 둔 축첩 공무원 510명이 쫓겨났다”는 구절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한국에서도 극히 최근까지 부자들과 지배층들은 공공연히 첩을 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필리핀의 법에 의하면 첩을 가지는 것은 위법이다. 축첩죄(crime of concuninage)가 성립되는 3가지 종류는 첫째, 내연녀와 함께 같은 집에서 사는 경우 (keeping a mistress in the conjugal dwelling) 둘째,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 추문을 일으키는 성행위를 하는 경우(having sexual intercourse under scandalous circumstances with a woman, who is not his wife) 셋째, 어느 다른 장소에서 동거하는 경우(cohabiting with her in any other place) 강간죄, 축첩죄 및 간통죄는 친고죄(親告罪)이기 때문에 피해자의 신고나 고소 없이는 처벌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첩이 있거나 첩을 여럿 가졌음이 남자의 능력에 대한 평가 기준 중 하나가 되기도 하여 첩이 많다고 소문날수록 더 많은 지지와 표를 모으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이는 다른 사람이 쉽게 따라할 수 없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사회적인 지위로 여겨진 듯하다. 즉, 간통(Adultery)과 불륜(concubinage)은 부와 권력의 특징처럼 받아들여지며 지배층들 사이에 널리 퍼져서 사회적으로 용인되었다 한다. 필리핀 정치가들은 불륜 사실을 숨기려하지 않았고 불륜 소문이 퍼질수록 명성이 높아지며 표를 얻기가 더 쉬워졌다고도 한다.

어느 필리핀 대통령 부부가 선거 운동 기간 중에 기자들로부터 사생활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후보자께서는 스스로 첩이 여러 명 있고 서자들도 많다고 인정해왔는데, 이것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게 아닙니까? 대통령으로서의 자질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신지요?”

그는 이렇게 답했다. “저는 여태까지 그러한 사실을 부정한 적 없고 항상 솔직하게 인정해 왔었습니다. 저는 첩들과 서자들의 존재에 대해 이미 오래전에 제 아내와 가족에게 고백하여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도 고백하여 용서를 빌었습니다. 저는 제 아내와 가족, 첩들과 서자들에 대해서도 변함없이 사랑하고 있고 계속 경제적인 지원을 하며 제가 할 수 있는 책임을 다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용서를 해 주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것은 저와 저의 처, 첩들 그리고 가족 간의 사적인 문제이며 최종적으로는 하느님과 저와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과 상관없는 사적인 문제 외에 그동안 제가 20년 이상 시장을 포함한 선출직 고위 공무원 역할을 수행해온 데 있어서 공적인 부분의 문제가 있었다면 그것을 언급하고 따져 주시기 바랍니다.”

이 후보의 솔직하고 당당한 태도에 필리핀의 남녀 대다수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그의 첩들과 서자들에 대한 문제가 그 이후 크게 부각된 적이 없었으며, 그는 압도적인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012년 1월 27일자 필리핀 신문들은 아로요 전 대통령의 시동생이자 하원 의원인 Iggy Arroyo가 영국 런던의 한 병원에서 심장병으로 사망했는데, 1년 전부터 병간호를 해오던 정부 Grace Ibuna가 빈소를 지키고 있다고 보도했다. 본처는 남편의 장례식을 준비하기 위해 다음 날 런던으로 떠났다 한다. 왜 첩을 두는가의 질문에 대한 중산층과 지배층 남자들의 대답은, “숨겨진 달콤한 과일과 같고 우리는 할 수 있으니까 따 낸다. 아침에 일어나 아름다운 얼굴이 곁에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하루의 끝자락에 나와 언쟁을 하게 되는 영리한 여자는 필요하지 않고 입을 다물어야 할 때 침묵할 줄 아는 예쁜 여자를 원할 뿐이다.”(It’s forbidden but sweet fruit. We do it because we can get away with it. It’s nice to wake up with a beautiful face beside me. At the end of the day I don’t need a bright woman to argue with, I just want a pretty girl who will shut up when she needs to shut up.)

19세기 필리핀에서는 각 지방마다 치안판사(magistrate), 행정관(administrator), 성직자와 그들의 보좌진들(집사들) 그리고 성직자의 정부들이 가장 큰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한다. 성직자의 정부와 서자들은 그들의 인맥을 활용하여 부를 쌓고 권력을 행사했다. 필리핀의 가톨릭 성직자들이 정부를 두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는데, 2000년도 이후 첩(정부)에 대해 언론에 보도된 기사들 중 몇 개만 간추려보자.

2002년 9월 5일 설문조사 (SWS Survey on Sex and the Clergy)에 따르면 조사에 응한 사람들의 1%는 성직자가 성학대하는 것을 경험하거나 본 적이 있다고 답변했다. 7%는 성직자가 정부를 가지거나 불륜 관계에 있음을 알고 있다고 답변했다. 26%는 성직자의 결혼을 허용해야 한다는데 찬성했다. 이는 1996년의 21%에서 증가한 수치이다. 91%는 아동 성학대를 범한 성직자의 신분 박탈 및 교회로부터의 추방에 찬성했다.

2012년 2월 11일, 마닐라 주교 Luis Antonio Tagle는 필리핀의 많은 성직자들이 섹스 스캔들에 휘말려 있거나 젊은 여성들, 아동들을 성적으로 학대하고 심지어 일부는 아내와 서자까지 두고 있다는 많은 보고를 받았다고 밝혔다. 또한 이해하기 힘든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는 성직자들도 있다며 통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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