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구의 필리핀바로알기] 국민 8% 중산층···월 300만원, ‘상류층 보좌관’ 구실
필리핀 국민의 약 8% 또는 800만명 정도가 중산층이다. 전문 직종 종사자들(변호사, 의사, 회계사), 종업원 100명 이하 규모의 소기업 사장들 또는 대기업의 하청업자들, 소도시 정치인들(면장/읍장 등), 중간 관리직의 공무원들, 중견기업과 대기업의 임원들이 이 계층에 속한다. 상류층의 보좌관 또는 집사들이라고 보면 된다. 한 가정의 월 평균 소득은 300만원 정도이고 평균 자산은 3억 정도이다. 서민층보다 10배 정도 높지만, 상류층보다는 1/10 이하의 생활 수준이다.
예로부터 서양과 필리핀의 집사 계급들은 농노를 관리하고 농민과 상인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 영주에게 바치는 공무원의 역할을 해왔다. 그러한 전통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어서 영주(왕)와 같은 부와 권력을 가진 부유층과 노예와 같은 의식과 생활을 하고 있는 서민층 사이에서 중산층은 관리자, 공무원 및 집사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중산층의 성격이 관료적일 수밖에 없고 생활 방식, 의식 구조 등이 한국 중산층과 비슷하다.
지배층의 권력을 빙자하여 실력 이상으로 자신을 과시하며, 윗사람에게는 비굴하고 아랫사람에게는 오만불손하다. 자신보다 큰 세력에 붙어 의지하려는 사대주의(toadyism) 성향이 강하다. 중세 시대 기사들처럼 왕(지배층)을 위해 전투에 임하던 것과 같은 전통을 이어받아 상명하복 및 군사 문화와 같이 융통성이 부족하고 인정이 없다. 여느 사람과는 다르다는 차별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이 항상 바른 체하면서 바르지 못한, 이중 인격적인 사람들이어서 이러한 성격과 의식구조가 비슷한 한국인들과 심각하게 다투기 쉬운 계층이다.
그러나 이들은 책임 회피에 능하고 법률이나 제도, 기구를 잘 이용할 줄 알기에 한국인들이 상대하기가 쉽지 않다. 스케일이 작고 자질구레한 일에 집착하는 사람들이므로 자신의 이익이 침해되었을 때 즉시 반발을 하고 보복하려 든다. 이러한 필리핀 중산층들에게 한국인들이 많이 이용당하거나 피해를 입는 편이다. 자존심이 강하고 이기적이어서 도와주거나 도움 받는 것을 싫어한다. 서민층과 크게 다른 점이 또 있다면, 계획성을 가지고 미래를 대비한다. 장래에 재난이나 불행이 닥치면 신이 도와줄 것이라는 믿음이 부족해서 차량 보험, 의료 보험, 생명 보험에 많이 의지한다. (신에게 의지하지 않고 보험 회사에 의지한다.)
한국인들을 자기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또는 경쟁상대로 여기며 대체로 비우호적이다. 교육 수준이 높고 이미 획득한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사회 질서의 급격한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 한국인은 잘살고 못살고의 극단에 자기를 두고 싶지 않은 심리 때문에 중산층이라고 느끼는 사람이 많아 실제와는 괴리가 있으나, 필리핀의 중산층들은 정신적, 지적, 정서적으로 상류층, 서민층과 구별되는 중류현상을 가지고 있다. 무리해서 상류층에 진입하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정이 없기 때문에 서민층이나 외국인을 착취할 기회가 생겼을 때에는 놓치지 않는다. 대부분의 한국 교민들에게 ‘갑’이나 동격으로 행세하는 사람들이 이 계층에 속한다.
한국인들이 세 들어 살고 있는 주택이나 아파트의 주인, 임대하고 있는 가게의 건물주인, 사업에 관련된 인·허가 담당 공무원(팀장, 과장, 국장급), 중소기업 거래처 사장, 대기업의 부장/임원급, 골프친구 등이다. 참고로, 필리핀에서는 골프가 큰 비용이 들지 않고 상류층들은 햇볕에 그을리는 것을 싫어해서인지 골프를 즐기는 계층은 거의가 상류층이 아니라 중산층이다. 한국 사람들과 생활수준이나 의식 수준 등이 비슷하므로 한국사람 대하듯 서로 존중하되, 한국개념으로서의 친구가 되기는 어려우니 착각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필리핀 사회에서 친구와 의리의 개념은 서로 도움이 될 때만 유지되는 사이일 뿐이지, 일방적인 도움을 기대하는 순간 그 관계가 무너진다. 한국인이 생각하는 친구와 의리의 개념은 필리핀에서는 가족 및 가까운 친척들 사이에서만 적용되는 개념이다. 착각으로 인해 실망하거나 상처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처음 소개 받았거나 한두 번 만난 적이 있는 필리핀 사람이 중산층인지 지배층(상류층)인지 구분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간단하게 식사 모임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 외국인이 필리핀에 와서 사업을 하고자 할 때에는 필리핀 사람들의 도움이나 조언을 구할 것이라는 생각을 밑바탕에 깔아놓고 있기 때문에 외국인이 자기들에게 신세를 진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만일 식사비용을 외국인이 부담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나 분위기를 보이면 중산층이다.
자신들의 도움과 조언을 받는 외국인들이 부담해야 한다는 의식은 그들에게는 합리적이고 상식인 것이다. 고급 식당을 선택할 때부터 식사비용 정도는 자기들이 내겠다며 손님으로 대우하겠다는 태도를 보이면 지배층(상류층)이다. 필리핀의 중·상류층 사람들은 쓸데없이 과시하는 경향이 적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고 있으므로 그 사람들의 경제적, 사회적 능력은 그들의 태도와 식사 모임에서의 품성에서 쉽게 드러나 보인다.
공무원과 공기업 직원들
선거로 뽑혀 일하는 공직자나 대통령에 의해 임명되는 장·차관급 공무원 및 공기업 임원들은 지배층에 속해있고 한국인들이 쉽게 만날 이유가 별로 없으므로 중·하위 공무원들에 대해 한국의 공무원들과의 차이점을 간략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지배 계층의 편에서 생각하면서 서민들과 외국인들을 대한다. 그들의 급여가 국민들의 세금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거의 인지하지 못하는 듯 행동한다. 외국인 투자가들을 대하는 태도 역시, 필리핀의 저임금과 같이 외국인에게 유리한 상황을 이용하여 돈벌이하기 위한 목적으로 잠시 와 있는 존재로 여기기 때문에, 외국인 투자가들을 우월하게 대우해 주지 않는다. 현지인들보다 외국인들에게 비용을 더 많이 청구하거나 좀 더 까다롭게 대하는 것에 대해서도 당연하게 생각한다. 외국인 투자가들이 고용을 창출하고 세금을 납부함으로써 필리핀에 도움을 주고 있다고 얘기해 봐야 비웃음만 살 뿐, 외국인 자신의 사업 목적과 이익 때문에 투자하고 있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므로 필리핀 공무원들로부터 우호적이고 유리한 대우를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어떤 약점을 잡히면 현지인들이 당하는 것보다 심한 곤욕을 당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