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구의 필리핀바로알기] 지배층 세습과 ‘천민자본주의’
어느 사회에나 지배층, 엘리트 계층 또는 두뇌 집단은 극소수이다. 신의 섭리로 창조된 인간도 온몸을 지휘하는 두뇌는 몸 전체의 2.5% 정도밖에 안 된다.(2.5%의 두뇌가 온몸을 지배하는 것과 2%의 지배층이 98%의 중산층과 서민층을 지배하는 사회 구조가 우연히도 비슷하다) 모든 세포는 동일한 상태에서 출발하여 세포분열 과정에서 두뇌 및 몸의 각종 부위를 형성하는 세포로 분화되는 것이지 뇌세포가 생명의 탄생 때부터 다른 세포와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다. 만일 뇌를 포함하여 몸의 각 부위별로 세포가 정해져 있다면, 체세포나 줄기세포만을 가지고 생물을 복제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두뇌, 눈, 코, 입, 허파, 간장, 위장, 팔, 다리 등등 신체의 모든 부위세포들을 제각각 복제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2.5%의 두뇌 집단(지배층)이 97.5%의 중산층과 서민들을 지휘하는 사회도 신의 섭리에 합당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두뇌 집단(지배층)이 어느 특정한 부류에서만 계속 이어지거나 세습되는 것은 신의 섭리에 합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가정이 옳다면, 세습은 비종교적이며, 세습을 행하는 기업가, 정치가, 종교인들은 신의 섭리(攝理, providence, 신의 계획이나 의도)를 방해하는 사람들이라 할 것이다.
중세 시대 또는 근대 이전 봉건 시대에는 일정한 신분이 있어야만 그에 걸맞은 부가 보장되고 세습되었었다. 그런데 산업화 시대 및 근대에 들어서자 진보 성향이 우세해지면서 ‘신분’과 ‘부’를 보장해주던 제도가 붕괴되었다. 부를 축적하는 제한들이 벗겨지고 신분이 낮은 천민계급들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축적하면서 새로운 지배 계층으로 올라설 수 있게 되는 것을 ‘천민자본주의’라 일컫게 되었고 여기에는 세 가지의 특성이 엿보인다.
첫째, 돈이 최우선의 가치를 가지며 인생의 목표가 된다. 사람의 가치를 돈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결정한다. 돈이 명예보다 우선이 되고, 돈이 사람보다 우선이 되고, 돈이 모든 것에 우선이 되는 것이다. 돈이 있으면 건강, 명예, 사람도 살 수 있다고 믿는다. 돈 많은 불량배(조폭, 지배층)가 돈 없는 학자, 예술가, 법률가, 공무원보다 존경받고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믿는다. 돈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고, 돈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둘째, 극단적인 이기주의를 낳는다. 자신(지배층)만 잘살면 되지 남(서민)의 고통이나 상생은 고려하지 않는다. 약자들에 대한 배려가 없고 무시한다. 그래서 지배층은 서민을 끝없이 착취하지만 죄의식이 없다. 출세하지 못한 사람은 억울함을 당하는 게 당연하다는 의식 구조를 가지고 있다.
셋째, 지배층의 지시를 절대복종하게 하고 설사 잘못된 지시라 할지라도 항명이나 반대 의견을 용납하지 않는다. 군사 문화(획일적 질서 유지, 상명하복 문화)를 선호하며, 서민들의 노예근성을 키워 지배층들에게 끝없이 의지하게끔 한다. 사회를 위계적으로 조직하여 평등성향을 억누른다.
필리핀을 ‘천민자본주의’사회라고 진단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필자가 보기에 (진보편향적인) 천민자본주의 성격의 부류는 2% 정도의 지배층과 8% 정도의 중산층일 뿐, 90%에 해당하는 서민들은 생산과 수단을 공유하려 하고 상부상조의 문화를 유지하고 있으므로 사회주의 및 보수주의 성격에 편향되어 있다. 소수의 자본가(지배층)들이 부와 권력을 세습하면서 사회 전체를 장악하고 있으므로 ‘자본독재 사회’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1980년까지 30년 동안은 한국 사회가 천민자본주의의 진보 성향과 상부상조의 보수 성향이 어느 정도 균형을 이뤄 왔었다. 그러나 1990년도부터는 지배층이 진보 성향으로 편향되고 발전하는데 비해 서민층들은 보수 성향으로 교화되어 빈부 격차와 계층 간 차별이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중산층 내에서도 비정규직 직원들을 차별하고, 장애인 관련 시설들에 대해서는 혐오시설이라며(땅값 떨어진다며) 지역 주민들이 결사항전하고 약자들을 차별하고 있다. 재벌들이 부를 세습하기 시작했으며, 정치권력도 대물림(세습) 되어 필리핀과 같은 확고한 신분 계층이 생기려 하고 있다. 두뇌(자본)세포는 두뇌(자본)세포로만 복제가 가능한 돌연변이 생명체의 사회, 즉 자본 독재 사회로 진화(?)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어떤 이들은 대기업과 부자들의 부를 먼저 늘리면 궁극적으로 그 혜택이 중소기업과 서민들에게 돌아간다는, 이른바 낙수효과(부가 넘쳐 흐르면 바닥을 적신다)를 주장하고 하는데, 필리핀처럼 지배층들이 부와 권력을 세습하면서 자꾸만 그릇을 키워버린다면 부가 그릇을 넘쳐흘러 서민들도 혜택을 맛볼 수 있는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을 수 있다.
낙심한 서민들이 진보적 성향으로 바뀌어 자꾸만 커지고 있는 요사스러운 그릇을 깨뜨려 버린다면 ‘혁명’이라 불릴 것이다. 서민들의 성향이 급진적으로 바뀌지는 않더라도 더 이상 그릇이 커지지 않도록(부와 권력이 세습되지 않도록) 제도적인 조치를 요구하여 평화적으로 관철시킨다면 ‘개혁’이라 불릴 것이다.
필리핀에서는 진정한 혁명이나 개혁이 한 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어서 지배층의 그릇이 한없이 커지고 있는 중이다. 한국은 이제 막 넘쳐흘러 바닥(서민)을 적시고 있는 그릇을 키우고자 하는 재벌과 지배층이 점차 힘을 키워가고 있는 양상이다. 70년대와 80대에 청년 시절을 보냈던 세대에는 20~30%의 깨어있던 학생들, 노동자들과 지식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지배층(군사독재 세력과 자본독재 세력)에 폭력적으로 저항하면서 전대협, 민노총, 전교조 등의 조직을 탄생시켜 지배층의 그릇이 커지는 것을 막거나 지연시켰었다.
그런데 그 이후 1990년대와 2000년대의 학생들, 노동자들과 지식인들은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7080세대를 포함한 기성세대들이 기득권화하고 정치세력과 재벌세력들이 세습화 하고 있고, 등록금도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치솟고 있는 데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그들만의 거대하고 강력한 신세대 조직을 탄생시키지 못하고 있고 제대로 된 투쟁을 하지 못하고 있다. 겨우 촛불집회 정도로 반발심을 표현만 할 뿐 강력하게 또는 폭력적으로 반항하지도 못하고 있다.
비폭력적인 의사 표현방식은 기득권층이 바라는 방식이고 기득권층에게 항상 유리한 방식이다. 비폭력주의자(간디와 리잘)를 영웅으로 떠받들고 있는 인도와 필리핀의 경우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비폭력을 신봉하다 지금까지도 계급사회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비폭력투쟁’은 ‘비폭력청원운동’이라 불리어야 마땅하지 ‘투쟁’이라는 단어를 가져다 붙일 수 없다. 폭력이 수반된 투쟁을 하지 않으면 원하는 것을 가진 자들의 손에서 결코 얻어낼 수 없을 것이다. 투쟁하지도 않았는데 기득권층들이 자발적으로 부와 권력을 비기득권층에게 양보한 사례를 필자는 들어본 적이 없다. 요즘의 비기득권층 젊은 세대들은 필자와 같은 50대 이상 기득권층의 취향에 맞도록 순진하고 나약하게 교육(사육)되어 있는 듯하다. 2세들을 호랑이로 키우지 못하고 애완견으로 키워버린 7080세대들의 잘못과 책임도 크다 할 것이다.
한편, 부자들의 그릇이 한없이 커지고만 있는데 낙수효과를 기다리고 있는 서민들의 실망과 분노를 몇 조각의 빵(불우이웃돕기, 기부행위, 자선활동 등)을 던져주는 것만으로 언제까지나 다독거려질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의문이다. 필자가 70년대와 80년대의 학창 시절 새벽에 일어나 공부하던 중에 가끔 남한 정부의 대북 선전 방송을 듣게 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재미있는 노래가 아직도 뇌리에 선하다. “언젠가는 모두 사라진다/ 언젠가는 남지 않고 뻗어간다/ 김일성이도, 노동당원들도 그렇게 언제까지 살 수는 없을 거다/ 언제까지 살 수 있으면, 인민이 곤란해!”
그러나 북한의 김일성이 사라졌어도 그의 독재 체제가 대를 이어가며 아직까지도 요지부동이듯이 필리핀의 자본독재 체제도 수백년 동안 건재하기만 하니, 서민(인민)들이 곤란하지 않고 견딜만하거나 분노할 줄 모르는 모양이다. 아니면 서민들의 분노를 다독거리거나 효과적으로 잠재우는 그들만의 비결이 있는 것이리라.
폭력없는 저항에 아니꼬운 시선이 있으시네요. 진리에 대해서 집요하게 탐구할때 논라운 일이 일어나는데,
촛불혁명으로 대통령 갈아 치우고, 법대로 하라는 집요한 요구에 기득권과 수구재벌들이 어떻게 반응 하고 있는지 한국을 보고 제대로 배우시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