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구의 필리핀바로알기] 서민층①···인구의 90%, ‘시키는 일만’ 착실히

안정적 서민들의 다세대 주택과 도시 서민들의 다세대 주택

1억의 전체 인구 중 90%인 약 9천만명의 국민들이 서민층이다. 회사의 직장인들과 하위직 공무원들, 고용된 약사와 회계사, 공장 노동자, 건설 노동자, 농·어민들이 이 계층에 속한다. 한 가정의 월평균 소득은 60만원 이하이다. 통계에 의하면 19%의 국민들만이 4~6세 아동을 교육 기관(유치원, 유아원)에 보낸다하니, 중산층, 상류층 10%를 제하고 나면 서민들 중에서 상위 9%의 아동들만이 취학 전 교육을 받고 있는 셈이다.

서민들의 성격은 착하고 온순하다. 특히 중산층과 지배층들을 앞에서는 항상 허리를 구부리고 조심해서 지나간다. 부유층들은 서민들이 보기에 더 똑똑해 보이고 그래서 더 많은 것을 지배하도록 허용한다. (그들을 위해 양보하고, 문을 열어주고 더 많은 공간을 주고 더 관대하게 대하며, 더 많은 실수를 용인해 준다.? Victor Johnston)

서민들이 게으르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잘못된 평가다. 새벽 5시나 6시에 동네나 시내에 나서 보라. 이미 수많은 서민들과 서민층 자녀들이 일터로 학교로 가기 위해 지프니나 버스를 타는 것을 볼 수 있다. 한밤중에 그것도 비바람이 쏟아지는 부두에 가보라. 아니면 한낮 무더위에 부두나 건설 현장에 가보라. 한국인이라면 작업을 거부할 것 같은 악조건 하에서도 온화한 얼굴로 일하고 있는 수많은 서민들을 볼 수 있다. 대다수 필리핀 서민들은 게으르지 않다. 두뇌를 활용하지 않고 일할 뿐이다.

서민들은 시키는 일만은 착실히 한다. 시키지 않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고 식민지 시대 이후 수백년 동안 세뇌되어 왔던 것으로 보여 진다. 사람들은 실수를 통해서 자각하고 지혜를 쌓아 가는데, 시키지 않는 일은 못하게 하므로 시행착오나 판단착오의 기회를 갖지 못하여 자기 계발을 못한다. 그것이 식민주의자(지배층)들이 바라는 바였으며 현재의 지배층들이 바라는 바일 것이다. 운전수에게 무엇인가 사오도록 돈을 주어 심부름을 시켰을 때 물건을 사고 돈이 남았어도 차 연료가 바닥이 난 상태로 그냥 운전해서 돌아온다. 왜 그랬느냐고 질책하면 남은 돈으로 주유하라는 지시를 하지 않았지 않느냐며 오히려 억울해 한다. 마당에 집주인이 젖은 신발을 말리려고 내 놓고 잠시 자리를 비우는 사이에 비가 오더라도, 가정부는 그것을 처마 밑으로 들여놓지 않고 그대로 둔다. 집주인이 비오는 경우 들여놓으라는 지시를 하지 않아서이다.

그러나 시키는 일은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착실히 하는데, 다만, 두세 가지 일을 동시에 시키면 안 된다. 1, 2, 3번의 순서로 일을 하라고 지시하면, 1, 3, 2번의 순서로 하기 일쑤이거나, 1번을 끝내놓고 다음 지시가 내려올 때까지 기다린다. 스스로 알아서 또는 계획을 짜서 하기보다는 지시받아 하는 것을 편하게 생각한다. 남에게 도움을 청할 때는 물론이고 도움을 받으면서도 마음의 부담을 느끼지 않을뿐더러 감사의 표현도 쉽게 한다. 자존심이 부족해서 그렇다. 자존심이 약한 사람은 정신의 자유도 남에게 쉽게 좌지우지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거대 종교나 거대 언론 매체의 선전에 쉽게 세뇌되고, 유명인의 말과 행동에 쉽게 영향을 받는다. 실수나 과실에 대해 쉽게 인정하지 않고 핑계를 찾는다, 실수나 과실을 인정했을 때 과도한 징계와 불이익을 받아왔던 식민 시대 때부터의 경험이 서민들의 의식 속에 강하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족과 친척들을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챙기며 서로 돕는다. 미래에 대한 역동적인 인식이 없으니 계획도 있을 수 없고, 예측도 있을 수 없고, 시나리오 설정도 있을 수 없다. 필리핀 노동법에는 급여를 한 달에 두 번 나눠서 지급하도록 되어있는데, 서민들이 계획성 있는 생활을 15일 이상은 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서민층 중에서도 하위에 속하는 건설 노동자들은 급여를 매주 받아야만 생활이 가능하다. 급여 지불에 있어서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한다. 예를 들어, 1만페소의 월 급여를 15일에 5천페소, 월말에 5천페소를 주면 특이한 반응이 없다. 15일에 3천페소, 월말에 7천페소를 주겠다하면 불만이 터져 나오고 시끄러워진다. 15일에 7천페소, 월말에 3천페소를 주겠다 하면 대단히 기뻐하며 훌륭한 사장이라 칭송한다. 조삼모사(朝三暮四)를 떠올리는 한국인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부잣집 외상보다 거지 몇 돈이 낫듯이 미래의 든든한 목돈보다는 지금의 확실한 푼돈이 더 중요할 수도 있겠다.

돈을 모으는 기회보다는 쓰며 즐기는 기회를 더 선호하는 것 같다. 비용이 1인당 2700페소 정도인 회사의 주말 야유회를 앞두고 전 직원들에게 야유회 대신 2,500 페소씩 현금으로 나눠주고자 하는데 동의 여부를 알아보라 했더니, 2/3 가량이 야유회를 선택했다. 여직원의 남편이 토요일 근무해야 하는데도 결근하고 아내의 회사 야유회에 애들과 함께 동행하고, 남자직원 역시 아내와 애들이 동행한다. 미혼 여직원의 남자친구도 다니던 직장을 하루 결근하고 따라 나선다. “부자가 되는 방법은 내일 할 일은 오늘 하고, 오늘 쓰고 즐길 일은 내일 쓰고 즐겨라”라는 유대인 속담이 있는데, 필리핀의 서민들은 오늘 즐길 수 있는 일을 내일로 넘기기는커녕 내일 쓰고 즐길 일조차 오늘 당겨서 쓰고 즐겨버리는 듯하다.

서민들은 대부분 사후 천당에 갈 것이라고 믿으며 삶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며 산다. 부자로 사는 것에 관하여, 근면과 성실로 재산을 모으는 것은 신의 섭리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존 캘빈의 말에 동의하는가 하면, 부자는 신의 축복으로 되는 것이지 노력해서 되는 게 아니라 한다.

교리에 충실한 서민들은 부자가 되기 힘들다는 것을 경험과 현실로 증명한다. 언젠가 필리핀 서민들과 진지하게 ‘부자’에 대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부자가 되고자 한다면, 우선 열심히 일해 많이 벌어야 한다. 많이 벌어서 꾸준히 재물을 쌓아둬야 한다(저축). 그러고 나서 씀씀이를 줄여야 한다(절약).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다. 재물을 쌓아둔 채로 씀씀이를 줄이려거든 가족이나 친척, 이웃, 친구들이 어려운 일을 당하여 도움을 요청해 와도 쉽게 들어줘서는 안 된다. 서민들의 가족, 친척, 이웃, 친구들은 거의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고 소득이 저축을 하기에는 부족하기에, 재난, 사고나 갑자기 큰 병에 걸렸을 때 스스로 해결할 수 있을만한 재력이 없다. 그래서 친한 사람들 중 누군가가 재물을 쌓아두고 있다고 알려지면, 역경에 처한 서민들이 수시로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어려움에 처한 친척이나 이웃의 요청을 거절하고 재물을 지키려 하면 ‘천당에 가지 못하고 반드시 지옥에 떨어진다’고 믿고 있다.

지옥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그동안 아껴 모아둔 재물을 역경에 처한 주위 친척이나 이웃들을 위해 방출해야 한다. 또는 친척이나 이웃에게 잘 대하는 것이 천당에 가는데 도움이 된다고 믿기 때문에 실제로 그러고 싶은 것 이상으로 친척과 이웃을 돕고 친절하게 대한다. 도움을 받게 되는 서민은 도움을 준 이웃 서민에게는 형식적으로 감사를 표하고, 재물 쌓아둔 서민을 인도하여 자신을 돕게 한 신에게는 진심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서민들은 복음을 생활과 잘 드러나지 않는 주위에서 실천한다. 가난한 살림에 자기의 친자식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위에 그들보다 훨씬 어려운 가정의 애들을 입양하여 친자식들과 똑같이 정성껏 키우는 많은 서민들을 보고 있다. 노력해도 애를 갖지 못하면 망설임 없이 자기들보다 더 가난한 가정의 애를 입양하여 친자식으로 여기며 키우는 서민들도 부지기수다. 필자 직원들 중 한 명이 그러하고, 거래처의 회사 직원들 중 2명이 그러하다. 자기보다 더 가난한 가정의 이제 막 젖을 뗀 영아를 자기 호적에 올려서 정성껏 양육하는 가난한 처녀도 있었다. (그 처녀는 몇 년 전부터 사귀던 영국 청년과 지난해에 결혼식을 올리고 올초에 비자가 나오자 그 애를 데리고 신랑과 함께 영국으로 갔다) 참으로 교리에 충실하고 착한 서민들이다. 그러나 이들만의 환경으로는 재물을 모을 기회가 쉽지 않고, 부자가 되는 것이 그들의 삶에서는 우선순위가 아닌 듯 하고 관습이 된 것 같다.

결국 이러한 서민 생활과 관습 하에서 재물을 모으는 게 무의미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고 재물을 모으기 위해 과도하게 일할 이유가 줄어들어 버렸으리라. 차라리 매일매일 최대한 즐겁게 살다가 천당 가서 일시에 보상받는 것이 나은 것이다. 그래서인지 필리핀 서민들은 조금이라도 여윳돈이 생기면 즉시 써버린다. 주위에서 손 벌리기 전에 쓰고 즐기는 것이 나을 것이다. 죽어서 천당 가기 전까지의 대기 시간은 최대한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친한 사람들하고 노래하고 춤추고 게임(노름)하고 놀러 다닐 기회가 있다면 일하는 것을 잠시 보류해 버릴 핑계를 찾아내고야 만다. 직원들 중에서 해고하기 힘든 정규직 직원들의 결근과 지각 및 조퇴가 두드러지게 많은 이유 중 하나다.

신의 축복에 의해 부자가 되는 것은 어떤 게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대답은 단순했다. 로또에 당첨시켜 주는 것! 또는 사장을 움직여 거액을 아무 조건 없이 그냥 주게 만드는 것! 전지전능한 신에게는 언제라도 가능할 터인데, 지상에서의 그러한 축복보다는 사후에 천당에서 보상 내려주는 것을 선호하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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