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구의 필리핀 바로알기] 지배층 위주의 토지제도···개혁법안 번번이 실패

스페인이 필리핀에 도착했을 당시에는 강력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국가 체계가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각 마을(barangay)의 수장인 Datu(동장 또는 이장에 해당함)를 중심으로 하는 지배 계급은 마을 토지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었고, 자유민은 마을 토지의 극히 일부를 소유하여 경작하고, 농노는 지배 계급의 토지를 경작하고 생산물의 절반을 납부했다. 대부분의 인구는 원시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고, 사적 토지 소유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은 스페인의 식민 통치가 시작된 이후였다.

스페인 식민 통치 기간 중에 스페인 왕국은 식민화에 공헌한 군인과 성직자, 스페인 상인(이주자), 토착 지배층들에게 토지와 함께 사법권을 부여하면서, 차츰 지주와 영주로 발전하는 그들에게 토지세를 징수했다. 그리고 농민들은 지주와 영주들이 정한 소작료를 지불하였다. 이들 중에서 초기에는 교회의 토지가 크게 확대되었는데, 교회 농장에 소속될 경우 국가가 부여하는 강제 노역으로부터 면제된다는 점을 이용하여, 교회에서 농민들의 토지를 다량 포섭하거나 확보하였다.

스페인 지배 중·후반기에는 점차 민간인 대지주의 비중이 커져 갔는데, 국왕의 토지 증여를 기반으로 한 스페인계, 스페인에게 협력한 토착 지배층계, 중국인 상인들 중에서 스페인계 또는 토착 지배층과 결혼하거나 그들의 상업 수단으로 토지를 대단위로 매입한 중국인 혼혈들이 민간인 대지주들에 속했다. 18세기 후반 스페인 정부가 수출용 농작물의 생산을 장려하면서 이들의 비중과 역할이 크게 확대되었다. 그리고 그 무렵 영국의 산업 혁명이 세계 시장으로 급속히 확대되면서 지주들은 토지와 필요 자본, 고리의 대부금을 제공하는 역할을, 농민들은 노동과 농기구를 부담하였는데, 고리대에 무지한 많은 자작 농민들이 그들의 토지를 지주들에게 빼앗기고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대토지의 확대로 인해 토지를 상실한 농민들은 소작농 혹은 노동자가 되거나 산악 지역으로 이주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고리대와 강제노동에 불만을 품은 농민들의 반란도 주기적으로 반복되었고 이따금 반기독교 색채를 띠기도 하였는데 이는 교회의 토지 수탈과 착취가 가혹했기 때문이다.

토지 개혁에 대한 법률 및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필리핀의 초대 대통령 아귀날도(Emilio Aguinaldo, 1869~1964)는 영주와 교회가 소유하고 있는 토지들을 압수할 것을 공표했지만 미국이 필리핀을 점령하면서 아귀날도의 토지 개혁은 실패하였다.

?1902년 토지 등기법에 의해 농민들이 정부로부터 제한된 토지를 매입하여 등기를 가능하게 하였다. 미국은 바티칸과 협상을 벌여 교회 소유지의 거의 90%에 달하는 토지를 매입하였으나 교회 토지의 분할 과정에서 농민들은 토지 구입비와 유지비용의 부담 때문에 아주 극소수만이 참여하였고, 대부분은 당시 토지 귀족과 미국계 설탕 회사에게 판매되거나 임대되었다. 이 과정에서 대토지 소유자인 설탕 귀족과 토지 귀족이 형성되었고 이들은 정치적 지배력을 확대해 나갔다.

?1933년 토지 차용법(the tenancy act)에 의해 지주와 소작인이 50대 50으로 수확 작물을 분배하게 했지만 법 내용에 대해 무지하고 법적 절차를 밟는데 필요한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던 대다수의 소작인들은 배제되고 지주들에게만 혜택이 돌아갔다. 미국 식민 통치 기간 중 통과된 토지에 관한 법률들은 거의 대부분 기존의 지배층들에게 유리하였고 소작농들은 현실적으로 그러한 법들이 정한 토지 소유 요건들을 갖추기 힘들었다. 그리고 가난한 농민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수많은 절차와 증거를 제출해야 했고, 지주들이 제기하는 소송에 대한 법적 대응을 하지 않으면 토지 소유를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상업적 농작물을 생산하는 스페인 통치 시절에는 소작농과 소토지 소유자가 지배적이었지만, 미국 통치 시절에는 새로이 대규모 농장(사탕수수, 파인애플, 코코넛, 쌀농사)이 발전한 지역에서는 (소작농이 아닌) 임금 노동자의 비중이 높아졌고, 대지주들은 경쟁에서 뒤쳐져서 부채를 변제하지 못한 농민들과 소지주들로부터 빠른 속도로 토지를 수탈해갔다.

미국 점령 시기 대지주들의 토지 확대 방법들은 관리들과 짜고 공유지에 대한 조사와 서류를 위조하여 토지 취득하거나 저당법과 고리 대금을 이용하여 압류하는 방식이 주를 이뤘다.(1930년도 중반에는 농민들의 2/3 정도가 부채를 지고 있었다 함) 또는 측량 기사를 동원하여 등록된 토지를 재조사하는 과정에서 편입시켜 버리거나 농민과의 법정 공방이 발생하였지만 대부분의 경우 매수된 법관들이 대토지 소유자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농민들 토지에 대한 경계표와 울타리를 옮겨 버리거나 순진하고 문맹인 농민에게 토지를 판매했다는 계약서에 서명하도록 하는 경우, 그리고 일시적으로 경작한다고 빌리고선 나중에 돌려주지 않거나 폭력을 동원하여 강탈하기도 했다고 한다.

미국 점령기에는 미국과의 교류와 무역에 의해 적절한 교육을 받고 자본이 충분했던 지주들이 대규모 농장을 급격히 확장하였고 이에 따라 소작 조건은 더욱 열악해져 갔다. 일본 식민 지배 기간 동안에는 일본 정부에 대항하는 농민 반란 세력이 등장하여 쌀과 옥수수, 사탕수수를 대단위로 재배하고 있던 루손의 중부 지역을 장악하였다. 농민 반란 세력들은 일본군을 지원하는 지주들의 땅을 빼앗아 소작인들에게 나눠주고, 자신들을 지지하는 지주들은 소작농들에게 일정한 지대를 받게 하고 보호하여 주었으나, 전쟁이 끝나면서 반란군의 토지개혁은 무효가 되어버렸다. 이후 농민 반란군의 잔여 세력들은 특히 UP(University of the Philippines) 대학의 서민 출신 지식인들이 합류하면서 공산주의 이론으로 무장한 신인민군(New People’s Army)으로 집결하여 필리핀 전역에서 산악 게릴라 활동과 도시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며 공산 혁명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필리핀에서는 지난 100여 년 간에 걸쳐 10여 차례의 토지 개혁 법안이 마련되었으나 대부분 실패하였다. 그 이유는 식민지 시대의 토지정책을 이용하여 막대한 부와 권력을 장악한 지주들이 현재까지도 필리핀의 지배층에 확고히 자리 잡고 있고 그들이 대토지 소유를 철폐하려는 토지 개혁 법안에 강하게 저항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토지 개혁을 요구하는 농민들이나 조직들에게 권력 기관과 사병들을 이용하여 테러를 가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불리한 법률의 제정 및 실시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개혁을 수포로 만들거나 지연시켜 왔다.

?전후(미국으로부터의 독립 후) 첫 대통령이었던 Manuel Roxas는 지주와 소작농의 수확물 배분을 7대3으로 제정하였다.

?막사이사이 대통령(Ramon Magsaysay, 1953~1957)은 소작지가 없는 농민들에게 농경지를 확보해주도록 하고, 농민들의 토지 임대 및 토지 소유권을 보장하는 법 개정을 단행하기도 하였다.

?마르코스 대통령(Ferdinad Marcos 대통령,1965~1986)은 필리핀의 모든 토지를 개혁 대상에 포함시켰다.

?코라손 아퀴노 대통령(Corazon Aquino, 1986 ~1992)은 Comprehensive Agrarian Reform Program(포괄적 토지 개혁)을 법으로 제정하고 대규모 농장에서 일해 온 소작농들이나 무토지 농민들에게 토지를 소유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당시의 상황은, 국민들의 86%가 서민들이 었는데 서민들 중 2/3은 땅이 전혀 없는 소작농/극빈자들이었고, 서민들 중 1/3만이 약간의 땅을 가지고 있었다. 중산층에 해당하는 국민의 13.7%는 전국토의 64%를, 최상류층 0.3%는 전국토의 24%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토지 개혁법은 지주들이 반발하면서 법 규정의 시행 과정에 개입함으로 인해 제대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에스트라다 대통령(Joseph Estrada, 1998 ~2000)은 소작농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대단위 농사를 짓는 것을 승인하고 농민들의 이익과 농업 발전을 위해 정부와 사기업이 협력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으나 지배층(우익) 쿠데타로 실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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