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구의 필리핀 바로알기] “진보(약탈)가 앞장서고 보수(종교)가 지배했다”
마젤란이 발견 이후 아시아 무역기지로 각광받아
1521년 마젤란이 필리핀을 발견한 후 스페인은 필리핀을 아시아 무역 기지로서 최적의 지역으로 인식하고 본격적인 식민화 작업에 착수했다. 그 이전의 필리핀은 50~100가구 정도의 Barangay(마을) 단위로 분열되어 씨족 족장들이 지배하는 고대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은 대부분 정령신앙을 믿어 정복자들은 그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켰다.
스페인에서 파견된 귀족, 상인, 선교사, 군인들은 5000여명에 이르렀는데, 그들은 가족을 데려오지 않았기 때문에 현지인들과 결혼하거나 첩을 두게 되었다. 이들 소수의 스페인 사람들과 혼혈 출신들이 각자 1000명 이상의 현지인들을 지배하는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1688년 영국의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 이후 필리핀 지배층들도 대단위 토지경작 사업(plantation)을 일으켜 스페인, 미국, 멕시코, 중국 등과의 거래가 활기를 띠었다. 이후 유럽제국은 필리핀을 포함한 여러 식민지들과 19세기까지 300여년 간 중상주의 정책을 폈다. 스페인은 중상주의 정책을 추진하면서 제국(모국과 식민지) 내부의 엄격한 상업 독점을 유지하려 했다. 이 시기에 대서양을 오간 대부분의 상인들은 세비야와 아바나 항구만을 이용해야 했고, 1년에 2회씩 엄격하게 조직된 함대를 통해서만 항해할 수 있었다.
스페인, 갤리온선으로 멕시코~동남아 무역독점
스페인의 대중국 및 대일본 무역의 제1차 기착지인 필리핀과의 무역 방식도 이와 유사하게 1년에 1~2회 마닐라와 멕시코를 왕복하는 한두 척의 대형범선을 이용하는 것으로 제한되었다. 이른바 갤리온선 무역(Galleon Trade)이다. 스페인 당국은 식민지들이 자기들끼리 무역하는 것을 금지했고, 해외에서 온 외국상인들이 허가받지 않고 무역 행위를 하는 경우 방해하거나 탄압했다.
중국 명나라에서 생산되는 비단, 도자기, 상아, 향료 등과 멕시코에서 생산된 은은 주로 마닐라항에서 물물교역 형태로 거래됐다. 당시 명나라는 은본위 화폐제도를 채택하고 있었다. 필리핀과 멕시코 간의 긴 항해를 견딜만한 거대한 규모의 함선은 1000여명을 태우고 1700~2000톤 규모로 상품과 사람을 실어날랐다.? 당시 스페인과 멕시코 사람들이 이주해오기 시작해서 필리핀 원주민들과의 혼혈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갔다. 이 항로는 250년간 무역 및 문화교류를 이루는 주무대가 됐다.
17세기 첫 등장 커피하우스서 ‘식민정보’ 교환
필리핀의 존재가 세계 역사에 등장한 이후 초기 230년(1520년~1750년)은 세계적으로 유럽제국들이 선도하던 대항해, 대탐험, 식민지 건설의 시대였다. 미주 대륙, 아프리카 및 아시아 지역을 정복하며 중상주의에 열을 올리던 유럽제국 세력들과 필리핀을 정복하여 지배하던 세력들은 같은 인종, 같은 뿌리라고 볼 수 있다.
이들 세력들의 활약으로 유럽에서는 주식회사들이 설립되었고, 무역 정보를 교환하는 커피하우스가 등장했으며(1652년 런던에 최초로 등장), 1683년에는 3000여개의 커피하우스가 생겨났다. 이들은 이후 인도네시아와 서인도제도, 브라질, 아프리카 등의 식민지에 대규모 커피농장(plantation)을 경영할 정도였다.세계 최초의 주식 중개인도 등장(1688년)했는가 하면, Lloyd’s List를 발행(1696년)하여 선박의 입출항정보와 해외무역 동향정보를 수록하기도 했으며, 런던 보험회사(1720년)와 발틱해운 거래소도 설립(1744년)됐다. 피터 L. 번스타인은 저서 <리스크>에는 당시의 모습이 잘 소개돼 있다.
‘보험만능’ 시대···음주사망,?여성정조까지?포함
지구 저편에서 건너온 정보, 항해 목적지까지의 시간과 날씨 변화, 낯선 바다에 숨어있는 위험 등을 미리 파악하는 데 필요한 최신 정보가 절실하던 시대였으나, 대중 매체가 없었기에 커피전문점은 새로운 소식과 소문을 접하는 중요한 거점이 됐다.
그 당시 보험에 가입하려는 사람들은 중개인을 찾아가야 했다. 중개인들은 왕립거래소(Royal Exchange)의 구내나 커피전문점에 모여 있는 개별 ‘리스크 감수인’들에게 해당 보험에 대한 리스크를 팔아 넘겼다. 거래가 성사되면 리스크 감수인은 “약정된 보험료에 대한 대가로 손실 발생 시 책임을 떠맡는다”는 동의를 확증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계약서 밑에 기재했다. 이들 개인 보험 인수자들은 ‘서명자’(underwriter)란 이름의 ‘보험업자’였던 셈이다.
번창하는 그 시대의 모험정신은 런던의 보험산업을 급속도로 성장시켰다. 보험업자들은 어떤 종류의 리스크건 기꺼이 보험증권을 발행했다. 일설에는 당시의 보험 가입 대상에는 가택 침입과 노상강도, 음주로 인한 사망, 말(馬)의 죽음, 심지어 여성의 정조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무역과 해적 행위 및 식민지 개척(경영)이 활발해지면서, 조상으로부터 부를 물려받는 (보수의) 시대에서 벗어나, 이제 부는 취득하거나 발견(약탈)할 수 있고, 축적할 수 있으며, 투자할 수 있는 동시에 투자 손실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진보의) 시대가 되었다.
위험 부담이 적은 분야에 종사하는 유럽의 지주(보수주의자)들보다 위험부담이 있어야만 재능을 발휘하는 해적들과 상인(진보주의자)들이 해양 개척과 신대륙 정복에 적극적이었으며, 가톨릭을 전파시키며 정복지 원주민들을 정신적으로 예속시켜 나갔다. 진보(약탈과 정복)가 앞장서고 보수(종교)는 안정화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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