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소설 ‘갤리온 무역’18] 리카르도 ‘애드문’으로 이름 바꿔 스페인 국왕 알현 그러나···

<3부> 리카르도와 애드문 8

[아시아엔=문종구 <필리핀 바로알기> 저자] 이튿날 동이 트면서 날씨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몇몇 겨우 살아남은 해적들이 상황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뼈대와 긴 돛대 몇 개만 앙상하게 남아있는 해적선 다섯 척이 바닷가로 올라와 옆으로 쓰러져 거대한 생선의 사체死體처럼 보였다. 섬의 기슭과 인근 바다에는 난파된 배의 조각들이 여기저기 어지럽게 흩어져 있거나 떠다니고 있었다.

그 중에는 엔젤호 선명이 새겨진 부서진 판자도 있었고, 엔젤호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찢겨진 돛포도 몇 장 떠다녔을 뿐만 아니라 엔젤호의 비품으로 여겨지는 식품 저장통도 여럿 눈에 띄었다. 특히 리카르도의 것으로 믿어지는 엔젤호 선장 모자가 수습되어 교회에 인도되었고 이것은 얼마 후에 교황청으로 이송되었다.

그 후 해적들과 교황청의 고위 간부들 사이에서는 엔젤호가 해적들과의 전투 중에 폭풍우를 만나 자메이카 연안에서 난파되었고 리카르도 선장도 선원들과 함께 실종되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엔젤호가 셀로나호로 바뀌었고 리카르도가 애드문으로 이름을 바꾼 것은 그 배에 타고 있었던 선원들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알 수가 없었다.

새로운 이름의 애드문 선장 지휘를 받게 된 셀로나호는 자메이카 섬을 떠나 동쪽으로 항해하여 푸에르토리코의 산후안 인근 해역에서 또 다른 해적선을 공격했다. 해적선에서 노획한 보물들을 셀로나호에 잔뜩 옮겨 실은 후 생포된 해적들 모두 수장해 버렸다. 그 때부터 애드문은 해적선에서 발견된 해적들 중에서 신부가 있는지 여부를 굳이 조사하거나 가려내려 하지 않았다.

산후안에서 한달 가량의 휴식을 취하고 포탄과 식료품 및 식수를 실은 후 스페인으로 귀환하던 중 아조레스섬 인근에서 또 한 척의 해적선을 발견하여 공격했다.

이 해적선에는 1595년에 항해 중 열병으로 사망한 영국의 노예상인이자 악명 높은 영국 여왕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던 해적 존 호킨스의 졸개들이 300여명의 노예들을 태우고 영국으로 향하고 있었다. 애드문은 해적선에 보관되어 있던 보물들과 노예들을 모두 셀로나호에 옮기고선 노예무역을 하던 해적들 모두 갑판에 꽁꽁 묶어둔 채 해적선과 함께 불태워 버렸다.

1600년 7월2일, 셀로나호는 스페인의 세비야항에 도착했다. 당시에는 공업과 무역이 발달하여 자치권의 확대를 요구했던 네덜란드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1568년부터 80년 동안이나 전쟁을 벌였는데, 그 날도 현재의 벨기에 영토인 뉴포트지방에서 스페인이 네덜란드-영국 연합군과 격전을 벌였다. 스페인이 패하여 후퇴한 날이기도 했다.

며칠 뒤 애드문은 즉위한 지 2년째인 스페인 황제 펠리페 3세와 은밀하게 만나 해적들에게서 노획한 엄청난 보물들 중에서 황제의 몫인 1/3을 직접 황제에게 선사膳賜했다. 2년 전 황제의 시종들을 통해 선사했던 것에 비해 거의 두 배에 달하는 가치였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황제는 애드문에게 기사작위를 주고자 했다. 물론 단순한 보답 이외에 또 따른 중요한 이유도 있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스페인의 상선들과 황제의 보물들을 약탈한 공로로 드레이크 선장에게 기사작위를 내렸으니, 드레이크의 졸개 해적들에게 보복하고 보물을 되찾아온 애드문 선장에게 스페인 황제가 기사작위를 내린다는 것은 커다란 상징성도 있었다.

그러나 애드문은 한사코 사양했다. 그는 명성을 추구하는 자들을 허영덩어리라며 천박하게 여겼다. 펠리페 황제와 같은 인간들은 인생에서 부와 권력과 명성보다 훨씬 소중한 것들이 있음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끝까지 기사작위를 사양하는 애드문을 끝내 이해하지 못한 채, 그 대신 우정의 징표로 반지를 선물했다. 그리고 애드문과 선원들이 생활하는 데 아무런 불편함이 없도록 새로운 이름에 대한 증빙서류를 발급해 주었고, 교황청이 위해를 가하려는 경우 애드문을 보호해 주기로 약속했다.

애드문은 2년 전에 사망한 전 황제 펠리페 2세를 싫어했다. 그는 과도하게 가톨릭을 신봉하면서 ‘가톨릭 유럽’을 지키기 위해 종교의 자유를 탄압했다. 이웃나라들과 수 없이 많은 종교전쟁을 일으켰고, 종교의 자유를 갈구하던 이슬람교도들이나 신교도들의 반란을 불러일으켰다.

상인들의 자유로운 거래도 과도하게 간섭하면서 자신의 부와 절대 권력에 집착했다. 세계 각지에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스페인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명성과 ‘일곱 바다의 지배자’라는 칭호에 우쭐하는 허영심 많은 인간이었다. 1571년 레판토해전에서 막강한 터키해군을 무너뜨리며 승리하긴 했으나, 1588년에는 영국해군에게 참패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 펠리페 3세는 전혀 딴판이었고 정치를 싫어하여 신하들에게 정무를 맡기고는 자신은 사치스러운 궁정생활만 즐겼다. 스페인은 펠리페 3세 이후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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