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실화소설 ‘더미’17] 임신한 아내에게 키스도 없이 한국으로 떠난 달후
[아시아엔=문종구 <필리핀 바로알기> 저자] 1998년 11월 26일. 거실에 있는 텔레비전에서 계속 한국 뉴스가 흐르고 있었다. 대도大盜라고 불린 조세형이 16년의 감옥살이 끝에 석방되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달후는 시종 우울하고 짜증스런 표정으로 짐을 챙겼다. 부산으로 돌아가는 밤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였다. 리나는 두렵고 불안한 마음을 진정할 수 없어서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며칠째 잠을 설친 그녀의 얼굴은 피곤하고 고달픈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의 배속에서 자라고 있는 아기에 대해서는 아직 그에게 말하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눈물을 훔친 그녀가 얘기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물었다.
“오늘 가시면 언제 돌아오실 거예요?”
“지금으로서는 나도 몰라! 가봐야 아니까…… 내가 연락할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그는 전날 밤보다 더 냉정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거칠게 짐을 꾸리면서 바쁘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확연히 드러났다.
그녀는 사무치게 미워하는 눈으로 그를 쏘아 보았다. 그를 향해 절규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입술만 꼭 깨물고선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버림받는 두려움과 슬픔에 벌겋게 짓무르진 눈이 쓰라렸다.
모든 끝장은 단호해야 한다. 그가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큼직한 여행용 가방을 끌고 방을 나섰다. 택시 타는 데까지 후들거리는 가슴을 부여안고 뒤따라 나온 그녀를 껴안아 주지도, 마지막 키스도 해 주지 않았다.
리나는 어둑해진 거리에 비참한 기분으로 서 있었다. 고통과 불안, 현기증 때문에 제대로 서 있기도 어려웠다. 그는 택시가 서자 불만에 찬 몸짓으로 바로 곁에 서있는 그녀를 외면하고서 택시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그녀는 해야 할 마지막 말을 끝내 그에게 전하지 못하고 가슴 깊숙이 묻었다. 또 다시 부옇게 젖어가는 눈동자 속으로 택시는 점점 작아지면서 아련히 사라져 갔다.
한번 마음먹은 일을 중도에서 포기하는 건 어쩐지 미련이 남는다. 그것도 비리(非理)가 이쪽에 있다면 모르지만, 이른바 정의를 위해, 인도(人道)를 위해서라면, 비록 개죽음을 당하더라도 나아가는 것이 의무를 아는 남아의 본뜻일 게다.
나쓰메 소세키(1867-1916)
12월 중순, 인채는 광주로 가서 달후를 사기죄로 고소했다. 고소인 조사를 받는 동안 죄가 없으니 긴장할 필요가 없는데도 마음이 조였다. 며칠 뒤 그 사건은 달후의 거주지인 부산경찰서로 이송되어 버렸다. 얼마 후, 달후는 피고소인 조사를 받기 전에 예전 송 회장의 심부름을 하던 시절에 사귀었던 임영길 형사를 만났다.
“아니, 김달후 씨! 필리핀에서 사업가로 성공했다는 소문이 자자하던데 부산에는 어쩐 일이시우?”
“임 형사님, 잘 계셨지요? 필리핀 사업은 어떤 사기꾼 교민을 만나 다 털리고 얼마 전에 돌아왔어요. 역시 외국에 나가면 한국 놈들 조심하라는 말, 빈 말이 아니더라고요.”
“아니, 어떤 새끼가 감히 우리 김 형을……?”
“그나저나 뭐 하나 부탁할 일이 있어서 만나자고 했어요. 그 사기꾼이 오히려 나를 고소해서 그러는데 혹시 북부경찰서에 아는 사람 있어요?”
“북부경찰서요? 잘 아는 사람은 없지만 우리 조직이야 한 사람 건너면 다 알게 되어 있으니까…… 담당 수사관이 누구요?”
“잘 되었네요. 내 사건을 담당하는 사람이 임성일 수사관이니 잘 좀 말해 주시오. 내가 필리핀 현지문화하고 현지법을 몰라 사기를 당하고도 오히려 한국에까지 쫓겨 와서 사기죄로 고소를 당했지 뭡니까.”
“알겠소. 임 수사관과 친한 형사를 찾아 얘기해 두겠소. 그런데 언제 조사 받으러 오라 하던가요?”
“다음 주 월요일 아침 10시입니다.”
“그래요? 시간이 별로 없군. 김 형, 내 말 잘 들으시오. 한국 수사관행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소. 민주화가 어떻고 인권이니 뭐니 떠드는 놈들 때문에 요즘에는 수사관들이 피고소인을 닦달하지 못해. 그러니 첫째, 수사관들 앞에서 김 형이 유리하다 싶으면 아무 거짓말이라도 마음껏 하시오. 둘째, 김 형에게 불리하다 싶은 것은 무조건 부정하고, 상대방이 증거를 제시하면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하시오. 수사관이나 검사가 필리핀까지 가서 진실 여부를 확인할 것도 아니니까. 알겠소?”
“수사관 앞에서 거짓말을 해도 돼요? 필리핀에서는 수사관 앞에서 허위진술하면 위증죄로 처벌받는데……”
“그런 것은 필리핀 같은 후진국에서나 해당되는 것이고, 선진국 대한민국에서는 거짓말한다고 처벌하지 않소! 일단 검찰이 기소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니까, 수사관 앞에서는 거짓말이든 뭐든 무조건 당신에게 유리하도록 말하시오. 내가 임 수사관에게는 불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하도록 손을 써 놓을 테지만, 그렇더라도 기록에 남아야 하는 조서에는 무조건 김 형에게 유리한 것만 말하고, 불리한 것은 모조리 부정하고 거짓말로 둘러대시오.”
한달 후 경찰서에서 인채와 달후는 대질 조사를 받았다.
달후는 모든 사실을 부정하고 거짓말을 했다. 박인채가 제출한 자료는 모두 필리핀 사람들이 박인채와 공모하여 조작한 것들이라고 진술했다. 인채는 그가 진술하는 도중에 그의 주장이 거짓이라며 증거를 요구했다. 그러나 수사관은 짜증을 내며 달후가 진술할 때 방해하지 말 것과 인채에게 질문할 때만 말하라고 호통을 쳤다. 그러면서 인채가 요구했던 사항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일부러 잊어먹은 척 무시하고 넘어갔다.
달후의 거주지 경찰서에서 조사하니 같은 동네 사람이라고 그를 편들고 있는 것인가? 혹시 매수당한 것일까? 하는 의심과 불만이 치솟았다. 수사관의 불공정한 태도에 대해 경찰청 감사실에 진정서를 낼까 생각하다 그만두기로 했다. 경찰서 바깥에는 줄곧 그악스럽고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세 시간에 걸친 조사를 받는 동안 인채는 심신에 금이 간 듯 고통스러웠지만 꼭 해야 할 일을 한다는 생각으로 버티었다. 그렇게도 꼼꼼하고 치밀한 성격임에도 남편과 같은 한국 사람이라는 이유 하나로 선뜻 믿어 준 아내를 생각하니 너무나 미안했다. 아직도 필리핀 검찰에서는 이쪽저쪽을 저울질하며 입찰 가격을 높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로 인해 아내의 불안과 스트레스가 쌓이고 있었고 요 몇 달 새에 10년 이상 늙어 버린 것 같아 가슴이 미어졌다.
어슬녘에야 조사를 마치고 경찰서를 나온 인채는 부모님이 살고 계시는 광주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차창 밖으로는 간간이 눈이 내리고 있었다. 문득 힐레드 호세이니가 ‘천 개의 찬란한 태양’에 적었던 말이 떠올랐다.
눈송이 하나하나는 이 세상 어딘가에서 고통 받고 있는 피해자의 한숨이다. 그 모든 한숨이 하늘로 올라가 구름이 되어 작은 눈송이로 나뉘어 아래에 있는 사람들 위로 소리 없이 내리는 것이다.
마닐라로 돌아온 후 인채는 달후가 거짓으로 진술한 부분들에 대해 조목조목 지적하고 설명한 진술서를 써서 증거자료와 함께 동봉하여 담당 수사관에게 보냈다. 사건을 검찰로 송치할 때 그 편지와 증거자료를 반드시 함께 보내달라고 부탁하는 문구도 잊지 않았다. 혹시 누락할지 모르니 한 부씩 복사하여 보관했다.
하지만 한 달 후인 1999년 2월, 경찰서에서는 무혐의 의견으로 사건을 검찰에 송치했고, 검찰청에서는 즉시 ‘무혐의 처분(증거불충분)’이라고 통지서에 찍었다. 무혐의 처분 이유로 김달후가 허위진술 했던 사항들만 조목조목 나열되어 있었다.
두 달 뒤, 이번에는 인채가 광주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김달후가 인채를 무고죄로 고소한 것이었다. 인채는 어이가 없었지만 성실하게 조사에 임했고 모든 것을 사실대로 진술했다. 얼마 뒤에 인채는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그 무렵, 승호는 애니카의 명의로 별장 계약자들을 4월 25일부터 27일까지 다시 세부로 초대했다. 단지의 토목공사가 끝났다는 보고와 함께 현장 확인과 친목도모를 위한다는 초대목적을 적었다. 그리고 중도금 25%는 1999년 4월 말까지 코필개발회사의 계좌로 송금하라는 통보를 맨 아래에 명기했다.
일 년 전의 일정과 같이 첫날은 단지를 조성하고 있는 현장방문, 둘째 날은 세부 시장 초청 만찬, 셋째 날은 친목도모를 위해 가까운 보홀 섬으로 단체 여행을 계획했다. 그런데 둘째 날부터 태풍 케이트의 영향으로 호텔 안에서만 시간을 보냈다. 이 태풍은 이상하게도 필리핀 역사상 태풍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 민다나오 섬 인근에서 발생했다. 그리고 태풍은 보통 매년 5월 말 또는 6월 초부터 발생하는데 이 태풍은 4월 말에 발생했다. 자연이 인간의 비정상적인 행위를 미리 알고 경고했었던 것인데, 그 자리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그 누구도 아무런 예감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일 년만 더 기다리면 대망의 2천년대가 되고 그때부터 필리핀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인 세부에 그림 같은 별장을 소유하게 된다는 꿈에 부풀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이웃사촌이 될 것이기에 미리 친분을 쌓느라 바빴다.
첫 번째 모임에서도 그랬지만, 두 번째 모임에서도 양희승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모든 행사는 멋진 차림의 승호와 명품으로 치장한 애니카가 주관했고, 모든 공식서류에는 애니카가 서명했다.
“어쩜! 젊은 친구가 외국에까지 와서 이렇게 대단한 사업을 추진할 수가 있었을까! 머잖아 청년 재벌이 탄생하겠어!”
“이승호 사장의 약혼녀라고 하는 저 애니카라는 아가씨가 세부 섬에서는 유력한 집안의 딸이래요, 글쎄!”
젊은 승호의 사업적 능력과 필리핀 고위 정치인들과의 친밀한 모습은 계약자들에게 감동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벤츠나 BMW를 타고 다니고 값비싼 옷을 입고, 명품 백을 들고 있으면 무조건 상류층이라고 단정하는 어리석은 한국인들. 얼마간의 정치자금을 기부하면 식사자리에 나와 주고 만찬장에 나와서 격려사를 해 준다는 필리핀 정치인들의 문화와 관습을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간 그들은 25%의 중도금을 코필개발회사 계좌에 송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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