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실화소설 ‘더미’ 16] 경찰간부가 제안했다 “청부 살인!”
당신이 악몽에 쫓기고
삶의 멍에에 짓눌려
몸을 뒤척이며 돌아누울 때
당신 곁에서 잠자던 나는 잠에서 깨어나
당신이 얼마나 늙었는지를 새삼 느낍니다.
– 샤퍼(Ulrich Shaffer)
[아시아엔=문종구 <필리핀 바로알기> 저자] 인채는 변호사를 통해 이상한 소문을 들었다. 사건을 담당하는 검사에게 달후 측 경찰이 접근했고 기소를 이끌어내기 위해 5만 페소를 제시했다는 것이었다. 그 소문을 인채의 변호사에게 귀띔한 브로커는 인채 측에 10만 페소를 주면 불기소처분을 받게 해주겠다고 제시했다.
인채 지인들의 조언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첫 번째 갈래는 김달후를 만나 적당한 돈을 줘 버리고 합의하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 갈래는 사기와 협박꾼에게는 합의가 무의미하니 정면 돌파하라는 것이었다. 두 번째 갈래의 조언을 하는 지인들은 이렇게 말했다.
“박 사장, 한 번 사기꾼은 영원한 사기꾼이에요. 게다가 그는 무고까지 했어요. 그에게 합의해 주는 것은 밑 빠진 독이고, 또 다른 핑계와 빌미를 찾아내어 끊임없이 더 많은 돈을 요구할 것이 분명해요.”
인채는 정면 돌파를 결심했다. 산티아고 노인의 독백처럼, 사내대장부라면 죽을 수는 있을지언정 사기꾼이나 협잡꾼에게 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편, 달후는 인채가 물러서지도 않을 뿐더러 한국에 가서 자신을 사기죄로 고소할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그는 자신의 예상대로 상황이 돌아가지 않고 있어서 용기가 꺾이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었고 너무 멀리 와 버렸다. 그래서 바퀴벌레 죽이듯 인채를 발뒤꿈치로 확실하게 밟아 짓이겨 놓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마까리오의 상관인 경찰 간부를 다시 만나 검사에게 제시할 금액을 상향조정했다. 이제 검사가 구속기소할 것인지 아니면 무혐의 처분할 것인지는 어느덧 비공개 입찰 형식이 되어버렸다. 인채는 아내가 감옥에 들어가는 것만큼은 어떻게든 막으려 갖은 애를 쓰고 다녔다.
주위 사람들은 인채와 마리셀의 수심에 가득 찬 얼굴을 보면서 혀를 내둘렀고 달후를 비난하는 소문은 푹푹 찌는 열대의 바람을 타고 마닐라 교민 사회 이곳저곳으로 날아다녔다. 교민들은 이제 그가 가까이 오는 것을 싫어했다. 그와 말을 섞는 것조차도 꺼렸다. 그가 무섭기도 했지만 그에게서 사기를 당한 후 더미를 사주한 무고까지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한편 달후는 검사 측에서 요구하는 가격이 계속 올라가고, 인채와 마리셀이 구속되는 경우에는 변호사를 고용하여 한국에서의 소송을 끝까지 진행할 것이라는 소문을 접하자 마음이 흔들렸다. 그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나쁜 평판이 퍼지고 있어서인지 투자를 결정했던 교민 두 사람이 돈을 입금하기 직전에 석연찮은 이유를 대며 투자를 취소해 버렸다. 또 다른 투자 예정자는 최근 들어 그의 전화를 받지 않고 있었다. 그는 어느덧 오기와 절망 사이를 위태롭게 넘나들기 시작했다.
그는 마까리오와 경찰 간부를 다시 만나기로 했다. 이번에는 리나가 동행했다. 경찰은 처음에 만났을 때와 변함없이 자신만만하고 위압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다. 은밀한 대화가 10여 분간 오간 뒤 경찰이 말했다.
“미스터 김. 이 사건을 해결하는 데 얼마를 쓸 생각이오?”
“글쎄요… 요즘 워낙 경기가 좋지 않아 여윳돈이 없어서… 7만 페소 이상은 어려워요…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음… 그렇다면, 7만 페소를 주시오. 미스터 박과 마리셀을 제거해 주겠소.”
“네? 제거한다는 말은…… 그 사람들을 죽여주겠다는 말이요?”
“그렇소!”
리나가 치마를 세게 움켜쥐었다. 소름이 끼쳤던지 그녀는 그때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곁에 있던 마까리오가 리나와 달후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나직이 속삭였다.
“우리 보스가 그런 일을 여러 번 했지만 한 번도 실수한 적도 없고 발각된 적도 없어요. 믿어도 됩니다.”
달후가 주저하는 표정을 짓자 경찰이 나직이 말했다.
“필리핀에서는 아직도 마약관련 범죄가 많다는 것을 미스터 김도 잘 알 것이오. 특히 말라떼 지역은 아주 심해요. 마닐라에서 마약에 연루되어 있는 한국 사람들도 여럿 있다는 정보를 나는 가지고 있소. 자, 이제 내가 쓸 살해방법을 일러 주리다.”
달후가 바짝 다가서며 귀를 기울이자 경찰이 음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미스터 박이 혼자 거리를 걸어 다닌다거나 혼자 차를 운전하고 다닐 때 내 휘하의 경찰이 뒤를 밟다가 인적이 드문 곳에서 총으로 그를 쏠 것이오. 그 경찰은 미리 준비한 마약을 그의 몸에서 나온 증거로 제시하면서, 마약소지혐의로 조사하려 했는데 그가 저항하면서 권총을 탈취하려 하여 우발적으로 쏘게 되었다는 진술서를 작성할 것이오. 그 사건의 조사는 내가 직접 하거나 내 친구가 할 것이니까 한두 명의 목격자가 있어도 상관없소. 대체로 목격자들은 경찰이 관련된 사건에 참견하는 것을 꺼려하오. 마닐라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는 마약딜러들 중에 말 잘 듣는 놈을 골라서 미스터 박이 예전부터 그 딜러와 마약을 거래했었다는 진술서를 받아 놓으면 모든 게 완벽해져요. 죽은 자는 원래 말이 없는 법이니까 반대 진술은 불가능하잖소. 어떻소, 미스터 김?”
마까리오와 경찰은 서로를 쳐다보며 흐뭇하고 잔인한 미소를 교환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과 어깨를 폈다. 그러나 리나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는 것이 어째 께름칙했다.
“알겠소. 좀 더 생각해보고 연락하겠소.”
그가 결론을 미룬 채 미팅을 마무리하려 하자 경찰과 마까리오가 실망하는 눈치를 보였다. 그는 슬며시 지갑을 꺼내어 얼마간의 돈을 세어 경찰과 마까리오에게 쥐어 주고 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나는 두려움이 질주해오는 듯한 느낌을 떨쳐내지 못한 채 얼른 그의 뒤를 따라 나섰다. 그녀의 얼굴은 귀신처럼 창백했다.
콘도로 돌아온 후 극도로 불안정하고 신경이 날카로워진 리나는 그의 살인청부계획에 노골적으로 반대했다. 신경질적으로 목소리를 높이다가도 때로는 애원하는 목소리로 그의 팔을 붙들고 늘어졌다.
“그 사람들은 우리를 돕기 위해서 투자한 사람들이잖아요. 돈을 투자하고는 우리한테서 한 푼도 돌려받지 못한 사람들인데, 왜 당신이 그들을 죽이려고 해요?”
그가 리나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화를 버럭 냈다.
“너는 상관하지 마! 그리고 지금부터 이 일에 관여하지 말고 알려고도 하지 마!”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만일 그 사람들에게 무슨 사고라도 나면, 마리셀 씨 가족들이나 친척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우리하고 소송 중이라는 것은 다 소문나 버렸는데, 당신과 내가 제일 먼저 조사를 받게 될 게 빤하잖아요! 제발 그만 두세요, 네!”
그녀가 울부짖으며 사정했지만, 마음만 먹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흉악하고 냉정한 남자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그였기에 그녀의 나약한 태도가 역겨워졌다.
“씨팔! 그러니까 지금부터 이 일에 관여하지 말라고 했잖아!”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매달렸다. 두려움과 무기력감으로 온몸이 마비가 되는 것 같았다.
“내가 이미 알고 있는데, 나중에 조사받게 되면 어떻게 모른다고 거짓말을 해요? 다른 것은 모두 당신이 시키는 대로 하겠어요. 하지만 이건 정말이지 원치 않아요. 제발 그러지 마세요, 부탁이에요, 제발!”
“이게 지금 누구 편을 드는 거야? 나하고 같이 살기 싫어? 정말 꼴같잖은 게 보자보자 하니까……”
그는 무서운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고함을 질러댔다. 순간 그녀에게마저 살의殺意를 느꼈다. 그러자 마침내 그녀는 참고 있었던 슬픔과 공포에 짓눌린 흐느낌을 토해냈다.
저 멍청하고 소심한 년 때문에 일을 제대로 못하겠군!
그는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리나가 지겨워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는 생각했다.
‘그나저나 리나가 협조하지 않는 이런 상황에서는 살인청부가 나에게 오히려 위험하고… 돈은 다 떨어졌고, 인채를 죽여 버리면 돈은 누구한테 갈취하지? 사기칠 만한 놈들은 낚싯밥을 물지 않고 있고… 씨팔놈의 새끼들.’
리나를 향해 끓어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억누른 그는 시든 배추 속잎 같은 심정으로 집을 나와 술집으로 향했다. 그의 스트레스는 언젠가부터 술과 창녀가 애무해주고 있었다. 그날 밤에도 자포자기해버린 그의 심사가 알코올과 엉망으로 뒤섞이자 강렬하고 추한 성욕을 불러일으켰다.
자정이 한참이나 넘은 시간, 아무렇게나 고른 술집 여자와 함께 모텔로 들어간 그는 탐욕과 알코올의 더러운 찌꺼기들을 싸구려 창녀의 질 속에 오줌 갈기듯 아무렇게나 사정했다. 그리고 송장처럼 널브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