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실화소설 ‘더미’ 27] 그때 그 사기꾼이 돌아왔다, 지미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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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엔=문종구 <필리핀 바로알기> 저자] 4월 23일, 원규가 급히 마닐라로 들어갔고 동업자들 네 사람이 모여 회의를 했다. 동업자들은 원규가 전하는 SNC의 분위기를 들은 후 승대의 해명을 들었다. 그는 SNC 내에서 극히 일부의 임원들만 그의 능력을 시기하고 있고 일반 직원들 모두가 그를 좋아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 임원들이 대리점 지정에 대한 결정권을 가지고 있으니 자기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했다. 그것은 해명이 아니라 거짓 변명이었다는 것을 원규와 인채는 그때에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들은 승대를 진심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승대는 ‘참내, 어이가 없어서’라고 말하며 흉측하게 인상을 긁었다. 그러자 이문식이 흠흠 하고 목청을 가다듬은 후 원규와 승대를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고 사장 말고 다른 사람이 경영한다면 저희와 계약할 수 있다고 했다면서요?”

“네,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SNC에는 박인채 사장이 경영하는 것으로 얘기하고 우리 내부적으로는 계속 고 사장이 경영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인채가 눈이 휘둥그레지며 나섰다.

“네에? SNC를 속이자는 말입니까? 그쪽에서는 마닐라의 SN-ETRA에 주재원을 파견하고 있는데 금세 들킬 것 아닙니까?”

“OSC 내부에 두 개의 조직을 만들면 됩니다. 현재 직원들은 기존의 거래처들을 고 사장이 관리하고 새로 만드는 조직은 박 사장이 SNC만 관리하는 것입니다. 물론 내부적으로는 우리의 투자계약서 조항대로 두 조직 모두 고 사장이 경영하고요.”

그때 승대의 눈빛이 번쩍하고 빛을 발했다. 인상이 펴지면서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SNC와 대리점 계약을 따내면 필리핀에서의 차량부품판매 수입이 크게 늘어 회사의 매출도 세 배 이상 증가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가 선뜻 이문식의 제안에 동의했다. 원규도 인채가 동의한다면 이의가 없다고 말했다. 인채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문을 열었다.

“지금까지 고 사장이 회사를 꾸려온 지 일 년이 넘었습니다만 아직까지 한 번도 제대로 된 회계 보고서를 동업자들에게 제출한 적이 없습니다. 계속 회사가 적자고 바쁘다 하고, 직원들의 능력이 떨어져서 고 사장을 따라오지 못한다고 불평만 하고 있어요. 이런 상태에서 새로운 조직을 구성할 자본이 회사에 있나요?”

그러자 승대의 얼굴이 다시 굳어지며,

“여러 번 구두로 말씀드렸듯이 회사가 적자 상태인 것은 맞고요, 제가 흑자 전환을 위해 밤낮으로 뛰어다니느라 바쁘다는 것, 직원들이 아직도 제가 원하는 수준에 미치지 못해 훈련시키고 있다는 것도 맞습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조직을 무슨 돈으로 만들지요? 필요한 자금을 산출한 후에 동업자들 각자가 지분대로 투자해야 하나요?”

“나는 투자할 돈이 없습니다.”

그 제안을 했던 이문식이 제일 먼저 손사래를 치며 빠졌다. 그러자 승대도 적자인 회사를 꾸려나가느라 오히려 자신의 개인 돈을 회사에 빌려주고 있다고 거짓으로 둘러대면서 돈이 없다며 발을 뺐다. 그러면서 좋은 기회를 놓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과 조바심으로 몸이 떨렸다.

OSC 회의실의 분위기가 다시 무겁게 내려앉았다. 잠시 후 이문식이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이 또 제안하며 나섰다. 그는 역시 명문고 출신 수재다웠다.

“이러면 어떨까요? 새로운 조직을 박 사장님이 관리하기로 외부에 알릴 것이니까 그 조직의 구성에 필요한 자금도 박 사장님의 자금으로 일단 시작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대리점 계약이 성사되어 이익이 발생하면 박 사장님의 투자금을 우선 변제한 후 배당하면 되고, 만일 계약이 성사되지 않으면 박 사장님의 투자금을 동업자들이 지분대로 분담하는 것입니다.”

“아! 그것 좋은 생각이십니다! 저는 찬성입니다!”

수재의 제안이 끝나자마자 아이큐 천재가 박수를 치며 좋아라고 찬성했다. 원규가 다시 인채를 쳐다보았다. 인채의 의견에 따르겠다는 눈빛이었다.

이윽고 인채가 결심한 듯 마지막 조건을 제시했다. 그가 조달하여 회사에 빌려주는 투자금은 돈을 회수할 때까지 인채가 관리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다른 세 명의 동업자들이 동의하자 네 사람은 합의문을 작성했다. 합의문에는 향후 도움을 주는 거래처 임직원들에게 커미션을 주는 조항도 넣었다. 이것 역시 훗날 원규와 인채를 엄청난 곤경에 빠뜨리는 빌미가 될 줄 그때 두 사람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원규가 부산으로 돌아간 후 OCS의 새로운 조직(SN조직)은 박인채 사장이 경영하고 승대는 SN조직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며 SNC 임직원들을 설득했다.

한편, 인채는 합의문대로 승대가 개설해 준 OSC의 새로운 계좌에 운영자금을 블루오즈 계좌에서 이체했다. 그 자금은 SN조직을 위한 직원채용과 관리 비용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5개월 후인 그해 10월에 SNC는 OSC를 필리핀 대리점으로 지정했고, OSC의 매출이 조금씩 오르기 시작했다.

승대가 단독으로 회사를 경영한지 1년 8개월이 후딱 지나간 2010년 11월 25일, 원규가 승대의 전화를 받았다. 오랜만에 듣는 그의 목소리는 흥분하여 다급함이 묻어 있었다.

“선배님, 소식 들으셨어요?”

“소식이라니? 무슨……?”

“SNC의 임원 6명 중 3명이 대기발령 났데요. 이 상무님은 빠졌고. 대표이사도 위태롭다는 것 같네요. 내년에 SN그룹 강 회장 처남이 총괄로 오고,”

“무슨 일이 있었나?”

“임원 중 한 명이 거래처로부터 돈 먹은 것이 들통 나서 그래요 외부에서 찌른 거래요. 저야 불만이 있어도 이 상무님이나 저를 좋아하는 직원들과의 관계를 생각해서 입 닫고 있었지만 외부 업체들이야 다르죠. 강 회장님이 임직원들의 윤리를 얼마나 강조하시는데요.”

“아! 재벌 회장 스타일이 그런 것인가? 강 회장은 탈세 안 하고 탈법 안 하고 도덕적으로 경영하는가 보군. 하하하!”

“오너잖아요. 자기가 하면 괜찮고 부하직원이 하면 안 되는 거죠.”

“오너가 하면 괜찮고 부하직원은 안 된다? 그게 무슨 이론이야?”

원규는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승대가 시퉁스럽게 대꾸했다.

“이론이 어디 있어요? 사람 맘이 그런 거죠. 가게 주인 아들이 과자 그냥 먹으면 말로 타이르면 되지만 점원이 몰래 먹으면 자르는 것이 인간이죠. 이 참에 손 실장도 찌를까요?”

“……?”

이런 대화도 나누었었다.

“방금 부산에서 선배 한 사람이 자네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들었네. 내가 자네하고 동업하고 있는 줄 모르고 있는 선배인데, 자네에 대해 부정적인 얘기가 한국에 돌고 있다고 하네.”

“누구요? 무슨 이야기요?”

“두 가지를 얘기하던데, 첫째, 모교에 대해 나쁜 말을 하고 다닌다는 것. 둘째, 경쟁하는 회사에 대해 자꾸 나쁜 얘기를 하고 다닌다는 것.”

“하하하! 완전 웃기네요. 제가 모교에 대해서 나쁘게 이야기한다고요?”

“자네에 대한 나쁜 소문이 자꾸 퍼질 수 있으니 각별히 말을 조심해야 할 것이네. 남 얘기나 다른 회사 얘기 절대로 하지 말고.”

“말을 조심하고 말고가 뭐가 있어요. 어느 회사를 비방했다고 하데요? 아주 어이가 없네요. 정영수 선배나 이창일 선배겠죠. 아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네요.”

“정 선배나 이 선배는 그 자리에 없었는데? 내가 자네에게 바라는 것은 경쟁회사들을 항상 긍정적으로 얘기하든지 아예 말실수하지 않도록 말수를 대폭 줄이라는 것이네.”

“경쟁업체 얘기는 안 하고 단지 필리핀 회사 이야기 합니다. 가만두세요. 제가 어찌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네요. 모교를 욕하고 다닌다는 말까지 나왔다는 것을 보니 누군지 정말 저를 많이 미워하나 보네요. 선배님, 그 얘기 금강에서 나왔죠? 부산에 알아보니 금강에서 저를 욕하고 다닌다는데요. 최근 매우 심하게.”

원규는 승대의 말투에서 얼핏 이상한 것을 느꼈지만 잠시 후 잊어버렸다.

세상을 살다보면 이기적이고 뭐든 자기 편의대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잘못을 지적하여 충고하면 평소에 앙심을 품고 있었던 사람들에게로 변명의 화살을 쏘아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편협한 정신의 인간들을 만나면 피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인간은 흉측한 악을 맘 속 깊이 품고 있을 수도 있다. 또는 논리가 무질서한 것으로 보아 약한 정도의 정신분열증을 겪고 있을 수도 있다.

원규는 그때 승대가 원규와는 가치관이 전혀 다른 인간이거나 정신병자라는 것을 깨달았어야 했다. 그와는 악연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대비했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한 번 믿은 사람에 대한 평가를 좀체 바꾸지 않는 우직함이 심했다. 한 번 믿은 승대에 대한 새로운 판단이 너무 무디고 너무 느려 바보스러웠다.

11월 말, 직원들의 급여를 계산하고 있던 인채는 이상원 사장의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박 사장님, 큰일 났습니다! 지미 양이 사기를 치고 도주했습니다!”

“네에? 아니, 어떻게……?”

“작년까지는 임대료가 1년 치 선불이었는데, 올해에는 임대료를 올리지 않는 대신 3년 치를 선불로 내라는 거예요 그것도 일시불로. 만약 그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 건물에 세 들어 있는 가게와 사무실을 다 비우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지난주에 3년 치를 일시불로 주고 새로운 임대 계약서를 썼습니다. 그런데 어제 갑자기 실제 건물주인이 나타나 지난 3개월 치 건물 임대료가 밀렸으니 우리더러 내라는 것이지 뭡니까! 저희가 너무나 놀라서 지미 양을 찾아갔더니 그 집은 벌써 며칠 전에 비워지고 그들 부부가 어디로 갔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계약했던……”

이상원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숨을 헐떡거렸다. 인채는 놀라서 “어허!” 하며 뒷덜미에 손을 가져다댔다. 숨을 고른 이상원이 말을 이었다.

“우리가 계약했던 지미 양 회사의 더미들 주소로 오늘 급히 찾아가 만나보았는데, 그들은 지미 양을 기억하지도 못하고, 자기들이 그 회사의 더미로 등기되어 있는지조차도 모르고 있더라고요.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습니까?”

“제가 작년에 지미 양의 회사에 등록되어 있는 주주들 면면을 확인해 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네. 그런데 박 사장님 말씀을 흘려들었지 뭡니까. 그리고 그렇게 점잖은 양반이 설마 사기꾼일 줄 상상도 못했었거든요.”

“지미 양이 계획적으로 사취하고 도주해 버렸으니, 이제는 실제 건물주인하고 협상을 잘 하시는 수밖에 당장에는 달리 방법이 없을 것 같고요, 지미 양을 대사관에 신고하세요. 그래야 다른 교민들이 또 피해를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 이름을 몰라요. 지금 생각해보니 한 번도 본명을 제대로 쓰는 것을 본 적이 없네요. 우리도 항상 그를 지미 양으로만 불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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