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실화소설 ‘더미’18] 아기는 남자의 애정행위 아닌, 신이 주신 선물
[아시아엔=문종구 <필리핀 바로알기> 저자] 며칠 후, 양희승과 이승호는 손익 계산을 했다. 계약금과 중도금 입금 총액 12억 5천만 원. 지출은 2년 치 땅 임대료 100만 페소를 포함하여, 승호의 한국 출장경비, 단지 토목공사비용과 손님들의 호텔 숙식비용, 기타 경비 등 약 1억 5천만원이 소요되었다.
“110만 불이 남았으니 승호 너는 30만 불을 가져라. 그것을 가지고 당분간 어디든 숨어 지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니, 사장님은 뒤에 계시고 일은 제가 다 했는데…… 제가 더 많이 가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무슨 소리야! 이 계획은 처음부터 내가 짰고, 내 돈으로 시작했잖아!”
양희승이 발끈했다. 하지만 승호는 침착한 어조로 조용히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저하고 애니카가 아니었다면 사장님 혼자서 무슨 재주로 이 일을 성사시킵니까? 그리고 투자자들이 고소하면 저하고 애니카에게 큰 문제가 생깁니다. 소송비용도 생각해야 하고, 앞으로 몇 년이 될지 모르지만 숨어 지내야 하는 비용도 만만찮을 테고. 하지만 사장님께서 BMW를 사 주시고, 여러 가지 행사에 돈을 쓰셨으니, 15만 불을 드리겠습니다.”
“뭐, 뭐라고! 너, 지금!”
양희승은 책상을 탕 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일그러진 얼굴 근육은 푸들푸들 경련을 일으켰고 벌겋게 달아올랐다. 화염이 이는 듯한 무서운 눈빛이 두터운 안경을 뚫고 나와 승호에게 내리꽂혔다. 하지만 승호는 씁쓸한 비웃음만 띄울 뿐이었다.
110만 불의 잔액이 들어있는 통장은 코필개발회사 명의이고 승호가 통장 관리인이다. 승호가 한 푼도 주지 않으면 양희승으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다. 오래전부터 칼자루는 승호가 쥐고 있었다.
희승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계획부도를 낼 때부터 사취하는 방법을 승호에게 가르쳐준 사람이 바로 그 자신이었다. 부동산업을 미끼로 한국인 투자자들을 유인하기로 했을 때 승호도 이미 사기꾼이 되었지 않은가! 사기꾼들은 자신 외에는 그 누구도 믿지 않는다는 철칙을 그가 잠시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실수였다. 창밖에는 소슬한 안개비가 내리고 있었다.
며칠 뒤, 양희승과 그의 아내는 15만 불을 받은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세부를 떠났다. 승호는 소송비용에 쓰라며 상당한 액수를 애니카에게 쥐어준 후 그녀와 헤어졌다. 그리고 잠적했다.
몇 달 뒤에야 사기라는 것을 알아차린 계약자들이 소송을 걸었지만, 애니카와 그녀의 가족은 이승호의 더미였다고 자수하여 모든 책임을 한국인에게 떠넘기는 바람에 그들의 법정다툼은 이상하게 흘러가 버렸다. 필리핀 정부는 피해자들과 직접 계약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손실이나 그들과 코필개발회사 사이의 계약이행에 대한 아무런 책임이 없다며 발을 뺐다.
피해자들은 한국 검찰에 이승호를 고소했지만 그는 조사받으러 나타나지 않았다. 아예 한국에 들어가지 않았고 어디에 있는지 그의 행방을 아는 이가 없었다. 결국 투자금을 회수할 방법을 찾지도 못한 채 필리핀에서의 소송비용만 계속 불어나게 되자, 피해자들이 하나둘 이탈하기 시작하더니 1년 뒤에는 아무도 그 사기사건에 대해 신경 쓰는 이가 없게 되었다.
한편, 달후가 한국으로 돌아간 후 마닐라로 돌아오지 않자 돈이 바닥난 JD인터내셔널 측에서는 더 이상 소송비용을 감당할 수가 없었고, 패소가 거의 확실시되는 사건이어서 하는 수 없이 변호사와의 계약을 해지했다.
그즈음에 웬 깔끔하게 각이 진 제복 차림의 경찰관 한 명이 마리셀의 가게에 찾아왔다. 조용한 장소에서 얘기를 하고 싶다고 하여 마리셀은 가게 안 쪽에 있는 인채의 집무실로 안내해서 함께 들어갔다. 그녀는 막연한 불안감과 불쾌감을 느꼈다. 그 경찰은 얼마 전에 달후에게 살인청부를 자원했었던 마까리오의 상관이었으나 마리셀과 인채가 그들의 관계를 알 턱이 없었다.
경리 여직원이 준비하는 커피가 나올 때까지 세 사람은 부자연스러운 미소만 주고받았을 뿐 아무도 먼저 말을 꺼내려고 하지 않았다. 어색한 긴장감이 조그마한 인채의 사무실을 가득 채웠다. 커피가 세 사람 앞에 놓이자 그제야 경찰은 인채를 거만하면서도 느끼한 표정으로 쳐다보면서 그가 찾아온 목적을 단도직입적으로 털어놓았다. 자신이 살인 교사를 받았노라고 했다. 그 말에 인채와 마리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머리털이 곤두서고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두 사람의 불안하고 당황한 눈빛에 만족한 듯 경찰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며칠 전에 누군가가 미스터 박을 죽여 달라며 7만 페소를 주고 갔소. 그 사람의 이름은 지금 밝힐 수 없으니 일단 K라고 합시다. 그런데 내가 은밀하게 뒷조사를 해보니 미스터 박은 훌륭한 사람이고 오히려 K가 나쁜 사람이더이다. 그래서 받았던 돈을 돌려주었소. 미스터 박이 나에게 7만 페소를 준다면 K를 제거해 주겠소. 만일 살인이 꺼려진다면 5만 페소만 주시오. 그러면 K가 나에게 살인 교사했다는 진술서를 써 주겠소. 그 진술서가 현재 당신이 진행하고 있는 소송들에 유리하게 활용될 수 있을 것이오.”
경찰은 설명을 끝내고 나자 뻔뻔스러운 얼굴로 실내를 둘러보고는 인채에게 언제 필리핀에 들어와서 언제부터 사업을 해 왔느냐, 어떤 비자를 가지고 있느냐, 애들은 어느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느냐는 둥 엉뚱한 질문들을 쏟아냈다. 그러자 인채는 그의 질문에 잠시 성의 없이 응대하다 화장실에 가는 척하며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마리셀도 눈치를 채고 남편을 뒤따라 나갔다.
인채에게는 필리핀 생활의 철칙이 몇 개 있는 데, 그 중의 하나가 필리핀 경찰은 그가 누구이든 (설사 아주 가까운 친척이라 하더라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찰 간부인 처고모부도 무고한 민간인을 살해하고 감옥에 들어가 있다고 하지 않던가. 그는 이 경찰 놈이 미끼를 들고 찾아온 것이라고 직감했다. 그는 미끼를 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즉시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어 상의하라고 아내에게 일렀다.
잠시 후 인채가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고, 때마침 여직원이 들고 온 과일을 경찰에게 권하면서 곧 화제를 날씨와 마닐라의 교통체증 문제로 돌렸다. 인채는 경찰이 소파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고 느긋하게 얘기하는 걸 무덤덤하게 들었다. 10여 분이 지나자 마리셀이 전화기를 귀에 대고 들어오더니 경찰에게 넘겨주면서 변호사가 통화하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순간 경찰의 표정이 일그러지면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잠시 후 얼굴이 활활 달아오른 경찰은, 통화가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서며, 조금 전에 했던 그의 말은 농담이었으니 잊어달라고 인채 부부에게 정중하게 말하고선 황급히 나가 버렸다.
한편, 필리핀 검사 측의 입찰 시도에 인채는 변호사 한 사람을 더 선임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죄도 없는 무고 사건을 돈으로 해결하려다 자칫 공무원 매수죄까지 덮어쓸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변호사들의 노력으로 횡령사건이 무혐의 처리되었다. 그리고 다시 얼마 후 차용금반환소송도 인채 측이 수월하게 승소했다. 판결문을 받아든 그는 재빨리 JD인터내셔널의 장비와 차량들에 대해 압류 신청을 했다. 그러고 나서, 마리셀은 리나를 무고죄와 위증죄, 그리고 명예훼손죄로 고소했다.
리나는 돌아오지 않고 연락도 되지 않는 달후를 석달 동안 기다리다 콘도의 임대계약을 해지했다. 정비소는 다행히도 김달후와 박인채가 크게 다투기 전에 일 년 치 임대료를 미리 지불했었기 때문에 당분간은 그곳에서 머무를 수 있었다.
중고차 수입이 끊기고 수리할 차도 없어서 정비사들과 경비원을 모두 해고한 후 정비소 안에 있는 사무실로 거처를 옮겼다. 달후가 떠난 후 아무도 관리하는 이 없이 방치되어 있던 사무실은 습기가 차고 곰팡내가 풍겨 을씨년스러웠다. 며칠 후에는 리나의 언니네 가족도 옮겨 와서 다 함께 살림을 합쳤다.
그러나 이사한 지 한 달도 채 안되어 법원으로부터 정비소 안에 있던 장비들, 사무실 집기들, 그리고 아직 팔리지 않은 중고차들에 대한 압류통지가 날아 왔다. 블루오즈 측의 청구를 법원에서 받아들인 것이었다. 마리셀이 고소한 무고죄, 위증죄와 명예훼손죄에 대해 조사를 받으러 나오라는 검찰의 통보도 받았다. 리나는 놀라지도 않았고 당황하지도 않았다. 대부분의 가난한 필리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리나도 그 모든 일이 신의 뜻이겠거니 하며 체념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녀는 점점 불러오는 배 때문에 당분간은 예전처럼 술집에서 일할 수도 없었다. 달후도 연락을 해 오지 않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그의 한국 주소를 알고 있으니 찾아가 보라고 주위에서 조언했지만, 그 남자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았기 때문에 절대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애는 낳아서 애 아빠하고는 다른 인성人性의 사람으로 혼자 키우기로 했다. 필리핀 사람들이 믿기에 아기는 남자가 사랑의 행위로써 여자에게 남긴 것이 아니다. 신神이 아기의 엄마에게 주신 선물이다. 신의 선물을 소중히 다루기 위해 매일 매일 몸가짐을 조심히 했고 그 남자를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기로 했다. 속으로는 걱정이 되었지만 그들은 걱정보다 농담을 더 많이 나누며 어떻게든 현실에 적응하려고 노력했다. 여태까지 리나의 도움을 받아왔던 부모와 형제들이 이번에는 한 마음으로 리나를 돕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