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실화소설 ‘더미’⑭] 사설경비회사는 현직 경찰, 검찰, 군간부가 실제 오너

[아시아엔=문종구 <필리핀 바로알기> 저자] 리나는 겁을 집어먹고 안절부절 못했다. 사무실 안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흘러 그녀를 질식시킬 듯했다. 잠시 후, 인채가 마리셀의 손을 이끌어 사무실을 나섰다. 서로 작별의 인사도 없었다. 리나만 핏기 없는 얼굴로 문 앞까지 따라 나섰을 뿐 달후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문을 나서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잡아먹을 듯이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다음 날, 그는 교민 정보지 업자들에게 연락하여 광고를 실었다. 정비소의 전면 사진과 도색이 끝나 바이어를 기다리고 있는 중고차의 사진도 함께 실은 광고 문안은 이러했다.

“현재 성업 중인 자동차 정비공장과 중고수입차 판매업에 투자하실 분을 모십니다. 연 수익률 투자금의 100% 보장! – JD인터내셔널”

9월 첫째 주부터 매주 이 광고가 실렸고, 그는 많은 문의를 받았으며 상담을 하느라 입에서 쉰내가 날 지경이었다. 인채도 이 광고를 보았다. 아무래도 자기와 같은 피해자가 줄을 이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인채는 달후에게 전화를 걸어 9월 말까지 투자금을 돌려주지 않으면 투자계약서에 따라 한국에 가서 고소할 것이라고 최후통첩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인채는 그가 얼마나 음험하고 악질적인 인간성을 숨기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달후가 8월 말까지도 송금하지 않고 9월 중순까지도 자꾸 이 핑계 저 핑계를 대자, 송 회장이 예고 없이 마닐라에 나타났다. 송 회장이 묵은 숙소는 한국인들이 자주 찾는 여관급 호텔이었는데, 조그마한 호텔 로비에는 항상 교민 정보지가 비치되어 있었다. 마닐라 도착 몇 시간만에 송 회장이 정보지에서 달후가 낸 전면광고를 보게 된 것은 그의 운이 끝나 가고 있다는 것을 묵시?示했다.

“내 허락도 받지 않고 감히 내 회사의 투자자를 모집해? 이런 쌍놈의 새끼!”

광고에 경악을 금치 못한 송 회장은 분노가 머리끝까지 뻗쳤다. 그는 즉시 평소 친하게 지내던 서면 사시미파 두목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음 날, 조폭 행동대원 두 명이 마닐라에 도착했고, 송 회장과 함께 JD정비소 사무실에 찾아갔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송 회장과 두 명의 조폭을 보자마자 퍼렇게 질린 달후는 사무실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싹싹 빌었다. 그렇지만 송 회장의 흉측하고 사나운 표정은 한 치도 누그러들지 않았다.

부자들은 돈 문제에 있어서 의리나 인정 따위를 갖지 않는다. 송 회장은 자신을 속인 달후를 당장 때려죽이고 싶은 듯 그에게 글로 옮겨 놓기 혐오스러운 온갖 쌍욕과 고함을 질러댔다. 그는 바닥으로 시선을 떨어뜨린 채 치욕을 고스란히 당하고만 있었다. 아니, 치욕이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와 같은 부류의 인간, 즉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인간들은 워낙 천해서 스스로의 비굴함에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험상궂게 생긴 어깨들 두 녀석의 얼굴에 짜증스럽고 빈정거리는 표정이 어렸다.

리나는 벌건 대낮에 그것도 자신의 사무실에서 달후가 그 전까지 친하게 지내던 송 회장에게서 모욕을 당하는 것을 보고는 당황했다. 영문을 알 길 없는 그녀는 사무실 밖에서 서성이면서 두려움이 엄습해 오는 가슴을 부여안고 눈물을 흘렸다.

잠시 후, 어깨들의 두툼한 주먹과 발들이 그의 얼굴을 사정없이 가격했고 꿇어앉은 그의 무릎을 무참히 짓밟고 걷어찼다. 그들의 폭행은 점차 난폭해져 갔다. 그가 비명을 질렀다. 겁에 질린 개가 깨갱깨갱 짖는 것 같았다.

리나가 기겁하여 경비를 불렀지만 송 회장에게서 제법 큰 액수의 보너스를 받은 경비원은 못 들은 척했고 오히려 호기심 어린 이웃들과 지나가던 행인들이 기웃거리자 멀리 쫓아내 버렸다. 직원들도 어디론가 숨어 버렸는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번에 위기를 모면하더라도 언젠가는 송 회장이 동원한 조폭에게 병신이 되거나 죽임을 당할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비굴한 인간들은 그렇게 심한 일을 겪으면 상당히 기가 꺾이게 마련이다. 육체가 지치니 천한 그의 정신도 지쳐버렸다. 결국 그는 죽느니 차라리 바보가 되자 하는 심정으로 그가 가진 돈 전부를 송 회장에게 양도하는 각서를 썼다. 그에게는 삼촌의 모텔에서 슬쩍했던 돈, 기장군청에서 일하면서 소소하게 그러나 꾸준히 받았던 뇌물, 퇴직하면서 받았던 돈과 박인채가 송금했던 돈을 모아둔 통장이 있었다. 그 돈이면 송 회장은 송금 받아야 할 잔금과 필리핀을 오가면서 술과 여자들에게 썼던 비용, 그리고 조폭을 동원한 비용까지 회수하고도 조금 남았다. 송 회장 같은 부자들이 가지고 있는 철학이 있다. 빼앗는 것을 겁내지 않고 주저하지 않는 사람만이 돈을 벌 수 있다.

목적을 달성한 송 회장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한때의 졸개이자 고향 후배였던 달후를 남겨두고 어깨들과 함께 그날 밤 비행기로 부산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두 사람은 영영 결별했다.

송 회장이라는 끈이 떨어진 달후는 이미 드러난 사기 본성 이외에도 그동안 숨겨 놓았던 잔혹한 본성을 끄집어내어 광택을 내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것은 악마의 이빨에 물리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박인채가 알도록 해 주는 일 뿐이었다. 아니, 필리핀은 모든 것이 느려 터졌기 때문에 인채에게 자각이 빨리 일어나도록 만드는 일이었다.

며칠 후 그는 사설 경비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리나의 형부인 마까리오와 그의 상관을 만났다. 박인채와 마리셀을 협박하여 돈을 뜯어내기 위한 방법을 상의하기 위해서였다.

필리핀의 사설 경비회사는 현직 경찰이나 검찰 또는 군 간부들이 실제 오너인 경우가 많다. 두 시간 동안의 미팅을 끝낸 후 그는 마까리오와 그의 상관인 경찰 간부에게 약간의 사례비가 들어 있는 봉투를 건넸다. 하숙집 주인 미스터 한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으면서 한 수 배웠던 바가 있다. 신세를 지고 도움을 받았다면 술이나 밥으로만 때우기 말고 반드시 돈으로 보상하라.

그가 소송 계획을 꺼내자 처음에 리나는 반대했었다. 인채를 계속 함께 일하도록 압박하는 수단일 뿐이라며 그녀를 속여 보려고 했지만, 어린애가 보아도 졸렬하기 짝이 없는 수법이라서 그녀가 선선히 협조해 주지 않았다. 그러자 그의 말을 듣지 않으면 당장 한국으로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소리를 지르고 화를 냈다. 앞으로 그녀의 부모나 친척들을 도와줄 수 없다고 선언했다. 밤마다 술에 취해 들어와서는 그녀와 그녀의 여동생에게 행패를 부렸다. 그녀와 그녀의 언니, 형부가 더미라고 관공서에 폭로하여 모두 감옥에 넣어 버리겠다는 협박까지 해대자 결국 가난하고 나약한 리나는 그에게 협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이미 맛이 간 그를 무서워하기 시작했다. 독을 품은 가시와 같은 존재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검찰에 고소장을 제출할 때 리나는 검사 앞에서 선서를 했다. 필리핀에서는 고소장에 적은 진술이나 첨부한 자료가 거짓일 경우 위증죄로 처벌받는다. 그녀는 훗날 죄 값을 치루는 한이 있더라도 당장 그와 헤어져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애가 태어나면 그가 착한 사람으로 거듭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무슨 짓이든 시키는 대로 하기로 작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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