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실화소설 ‘더미’ 41] 필리핀과 한국 검찰, 동일 사건 어떻게 결론낼까?
[아시아엔=문종구 <아시아엔> 필리핀 특파원, <필리핀바로알기> <자유로운 새> 저자] 한 달 후, 인채는 필리핀 경찰 특수부에 출두하여 조사받으라는 소환장을 받았다. 고소인은 곤잘레스 총경이었다. 로하스와 함께 경찰특수부에 가서 확인해보니 공무원 매수혐의와 살인교사혐의였다. 인채가 곤잘레스에게 10만 페소를 주면서 헬렌과 파블로를 살해하도록 교사했다는 것이었다.
돈을 건넨 시점은 3개월 전, 돈을 건네며 살인교사를 했던 장소는 경찰청 본부 건물 내에 있는 자신의 집무실이라고 했다. 인채는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로하스도 너무 어처구니가 없는지 껄껄 웃었다.
“어허! 총경이라는 자가 말이지…… 만약 미스터 박이든 그 누가 총경에게 돈을 주면서 살인을 교사했다면 그 즉시 현장에서 체포해야 마땅한 것을, 뭐? 근무시간에 자기 집무실에서 받았다고? 3개월이나 지난 후에 신고를 해? 그것도 마리셀이 맡겨둔 돈을 돌려달라고 청구서를 보내고 나니까 그제야 신고해? 사건을 조작하려면 좀 더 그럴듯하게 해야지, 이게 뭐야? 거참 웃기지도 않는 작자로군!”
그러자 수사관들도, “일단 사건이 접수되었으니까 수사를 하긴 합니다만, 우리도 조금 웃긴다는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경찰 조사를 마치고 나온 인채와 로하스 변호사는 곤잘레스를 사기죄로 고소하기로 했다. 그동안 곤잘레스와 주고받았던 문자 메시지와 통화녹음, 대화녹음도 증거로 제출하기로 했다.
그날 밤 인채는 <국민신문고>에 민원을 신청했다. 살인교사누명을 대사관에서 조사해서 벗겨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자 일주일 후에 다음과 같은 회신이 왔다.
안녕하세요. 주필리핀대사관입니다. 국민신문고를 통해 요청하신 민원을 잘 접수하였습니다. 민원의 요지는 민원인의 필리핀 현지 사업 연관 분쟁과 관련하여 민원인이 필리핀 경찰 고위간부를 매수하여 사업 파트너를 살해하라고 사주했다는 누명을 쓰셨다는 내용에 대한 진상 파악을 해달라는 내용으로 보입니다. 이와 관련, 해당 경찰간부를 확인한 바 필리핀 경찰청에 재직하고 있는 곤잘레스 총경으로 확인되어, 대사관에 파견 근무 중인 서승국 경감을 통해 본건 민원 관련 면담 등을 진행하였습니다. 곤잘레스 총경은 자신이 민원인의 현지 사업 연관 분쟁을 도와주기 위해 노력했음에도 민원인이 이를 폄하하고 오히려 자신을 비난하여 화가 난 상황이었는데, 민원인과 분쟁 중인 필리핀인 사업 파트너들과 그 변호사가 자신의 사무실을 방문하여 민원 내용과 같이 살인교사, 공무원매수 등 혐의로 민원인을 무고할 것을 제안하여 진술서 작성을 하고 고소를 한 사실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가족 간의 문제를 외부로 확대시켜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민원인을 만나 원만히 화해하고 고소를 취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합니다.
한국 대사관과 한국 경찰이 조사하는 것을 알고는 곤잘레스가 발을 빼려 하자 이문식과 승대는 애를 태웠다. 더미 파블로를 시켜 곤잘레스에게 더 후한 물질적 보증을 해주도록 지시했다. 일단 보증일 뿐이었다. 나중에 일이 잘 풀리면 원규나 인채의 돈을 갈취하여 곤잘레스에게 건네주면 될 것이고, 설사 잘못되더라도 한국으로 도망 가버리면 보증이든 약속이든 휴지가 될 것이었다.
이문식과 승대의 푸짐한 돈과 변호사 지원을 약속받은 곤잘레스는 고소취하 하겠다던 약속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고소를 취하하면 인채에게 70만 페소를 돌려줘야 하는 문제도 혼자 해결하기 힘들다는 점도 고려했기 때문이다.
한편, 마닐라에서는 마리셀이 회사에 찾아가 회계자료를 열람하려 하자 사장인 헬렌이 거부했다. 1년 전에 승대와 파블로, 헬렌이 참석한 이사회에서 모든 한국인의 회사 출입을 금지한다는 의결을 했었기 때문에 인채는 사무실 밖에서 아내를 기다렸다. 마리셀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봐요, 헬렌! 나는 38%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 대주주이고 이사회 멤버요. 그런데 왜 내가 회계자료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오?”
“……”
헬렌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했다. 필리핀의 주식회사법에 의하면 단 1%의 주식을 소유한 주주라도 회사의 회계자료를 열람하는 것은 주주의 당연한 권리이기 때문이다. 직원들이 회사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오너들끼리의 다툼을 불안한 눈빛으로 흘끔거렸다. 헬렌 곁에서 살기 띤 눈으로 마리셀을 노려보고 있던 파블로가 명령조로 말했다.
“마리셀! 변호사에게 자문을 구한 뒤에 당신의 요구를 들어줄지 말지를 결정할 테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오!”
파블로는 꼴사납고 한심한 허세를 부렸지만 마리셀이 굽히려 들지 않았다.
“뭐라고요? 변호사한테 물어보겠다고 한 것이 벌써 며칠째요? 그리고 회계자료열람은 법에 규정되어 있는 주주의 권리요!”
“입 닥치지 못해!”
파블로의 불쾌한 고함소리에 놀란 인채가 사무실로 뛰어 들어갔다. 그는 분노와 두려움으로 발그레해진 아내를 보호하기 위해 그녀 곁에 바짝 붙어 섰다.
“우린 더 이상 할 말이 없소! 헬렌 퇴근하자!”
파블로가 헬렌을 이끌더니 서둘러 사무실을 나가 버렸다. 회계자료를 보관하고 있는 창고의 열쇠는 헬렌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채와 마리셀은 그날도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다. 벌써 보름째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인채는 이러한 사정을 원규에게 설명하면서 헬렌과 회사를 상대로 회계자료열람청구소송을 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동안 수집했던 승대의 새로운 회계비리 자료를 부산으로 보냈다. 그 자료들을 근거로 원규가 승대를 고소했다. 두 번째 업무상 횡령혐의였다. 그리고 마리셀은 많은 직원들 앞에서 자신에게 욕을 한 파블로를 명예훼손죄로 고소했다.
두 번째 횡령혐의로 조사받기 위해 경찰서에 간 승대는 모든 것을 부정했고 거짓말로 둘러댔으며 원규가 제출한 자료들은 모두 원규와 인채가 필리핀에서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승대의 처갓집 사람들이 담당 수사관과 수사과장을 수시로 만나 밥을 먹고 술을 마셨다.
수사관이 이번에도 불기소 의견으로 사건을 검찰에 송치했다. 그러자 승대의 변호사가 그의 인맥을 동원하여 검사를 회유했다. 검사는 두 번째 횡령사건을 증거가 부족하다면서 무혐의 처분했다.
인채가 원규의 전화를 받았다.
“역시 한국 경찰과 검사는 믿을 수가 없네. 검사의 불기소 통지서에 승대의 거짓말들이 잔뜩 나열되어 있어.”
“좋아! 그렇다면 이 사건을 필리핀 검찰에 고소하자. 과연 이렇듯 똑같은 사건, 똑같은 물증을 가지고 한국과 필리핀, 어느 쪽이 제대로 된 판결을 하는지 비교해 보자! 아, 그리고 이문식이가 3년 전 우리에게 보내왔던 재무제표 확인 결과 나왔어. 그 자료들은 완전히 엉터리고 조작된 것이래.”
“엉터리? 조작된 재무제표란 말이야?”
“그래. 국세청에 제출된 자료하고 비교해보니 매출과 당기순이익은 두 배 이상 부풀려 놓았고, 자산도 두 배로 조작한 자료였어.”
“음……”
원규는 신음했다.
“인채야, 이문식이 사기꾼인 줄도 모르고 고향 선배에다가 A대학 동문이어서 무조건 믿었던 것이 큰 실수였어. 너한테 정말 미안하다.”
“어느 산에나 뱀은 있게 마련이야. 속은 사람이 나쁜 게 아니라 속인 사람이 나쁘지. 이제 알았으니 다른 사람들이 똑같은 피해당하지 않도록 이번에는 너희 대학 동문들에게 이문식과 고승대의 실체가 제대로 알려졌으면 좋겠다.”
그러나 원규가 이문식을 한국검찰에 고소한 사기죄는 승대와 똑같은 수법인 허위진술과 변호사의 도움으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원규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탄식했다.
어허! 한국의 경찰과 검찰이 이 정도로 엉터리란 말인가!
모든 거짓말과 돈과 인맥이 통하는 것이 한국의 수사기관이란 말인가! 나도 애초에 돈을 쓰고 힘 센 변호사를 사서 그 자들을 고소했었어야 한단 말인가? 돈 없고 빽 없는 사람들의 피해와 원한은 어떻게 풀라고……
원규의 연락을 받은 인채는 한국에서 무혐의 처분했던 똑같은 자료들을 가지고 고승대와 헬렌을 횡령죄로, 이문식을 사기죄로 필리핀 검찰에 고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