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실화소설 ‘더미’ 40] 교도소 가득 메운 ‘벼룩의 간 빼먹는 놈들’
[아시아엔=문종구 <아시아엔> 필리핀 특파원, <필리핀바로알기> <자유로운 새> 저자] 인채는 곤잘레스 총경의 사무실을 투덜거리며 나왔다. 그의 바지 속에는 아까부터 소형 녹음기가 켜져 있었다.
우려했던 대로 곤잘레스는 다음 날부터 자기 힘으로 무혐의 처분을 받았으니 돈을 더 달라며 마리셀을 달달 볶았다. 필리핀 경찰은 돈 앞에서는 가족도 친척도 없다는 소문을 익히 들었었지만 이 정도인 줄 처음 겪는 인채가 혀를 내둘렀다. 어쩔 수 없이 로하스 변호사와 상의하여 곤잘레스를 상대로 70만 페소 반환청구서를 보냈다.
“거기 OSC 맞지요? 헬렌 씨 바꿔주시오…… 아, 나? 경찰청에서 근무하는 곤잘레스 총경이오.”
로하스 변호사 사무실에서 보낸 반환청구서를 받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곤잘레스가 OSC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여보세요? 전화 바꿨습니다. 제가 헬렌입니다만.”
“나는 곤잘레스 총경이오. 당신과 소송 중인 마리셀의 고모부 되는 사람이오. 시간 나면 내 사무실로 잠깐 와 주시겠소?”
“잠깐만요……”
헬렌은 옆자리에 있던 파블로와 상의했다. 고위 경찰이 그것도 소송상대 측의 친척이 직접 전화하여 만나자고 하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었다. 잠시 두 사람이 속닥거리더니,
“네, 총경님. 저의 대부 파블로 씨하고 저의 변호사가 동행해도 된다면 내일 오전에 찾아뵐게요.”
“좋소! 그럼 내일 봅시다.”
그날 밤, 파블로가 이문식과 심종하를 만나 작전을 짰다. 그들은 수시로 부산에 있는 승대에게 국제전화를 걸어 전략을 상의했다. 필리핀 경찰들의 성격에 대해 익히 잘 알고 있는 파블로는 불과 몇 시간 만에 그의 프리메이슨 조직원들로부터 곤잘레스 총경에 대한 정보를 받았다. 곤잘레스는 다섯 명의 시민들을 살해하여 5년간 옥살이를 한 전력이 있었고 마약범죄에 연루되어 있으며, 두 명의 후처들을 챙기느라 기회만 생기면 돈을 갈취하는 인물이지만 종교단체 INC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파블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분명히 곤잘레스가 우리 편이 되어 주겠다는 조건으로 돈을 요구할 것이오.”
“얼마나 요구할 것 같소?”
“우선, 20만 페소를 주시오.”
“20만 페소나?”
심종하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하지만 이문식은 놀란 기색이 없이, “총경 정도 되는 고위 간부가 어떤 일을 추진하려면 그 정도 금액은 껌 값이네. 우리가 반반씩 부담하세.”
“아니, 이 사장! 내가…… 왜?”
한두 해가 지나면 환갑인 심종하는, 2년 전에 승대의 지분을 인수하면 생활비와 용돈을 벌어가며 따뜻한 필리핀에서 노후를 안락하게 지낼 수 있다는 이문식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였었다. 대학 동기이기 때문에 설마 자신을 속이겠는가 하는 믿음도 있었지만 독실한 기독교인인 그는 지분을 인수하기 전에 하느님께 기도를 했었다. 그리고 3일 만에 꿈속의 신으로부터 인수해도 좋다는 응답을 받았다.
그런데, 인수한 후부터 회사의 거래처들이 하나씩 끊어지고 매출이 뚝 떨어지더니 처음에는 매달 백만원 정도의 생활비를 회사에서 받다가 지난 몇 달 동안에는 한 푼도 못 받고 있었다. 최근에는 오히려 자기 호주머니에서 돈을 내어 도와줘야 할 정도로 회사의 적자가 심각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심종하는 자기가 직접 연루되지 않은 이런 일에 왜 자기 돈을 써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사장! 윤원규나 박인채 하고의 분쟁은 자네하고 승대가 책임지고 해결한다고 하였지 않은가!”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 이 사람아, 상황을 잘 봐. 지금 우리는 같은 배를 탔잖아. 그리고 저 놈들이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니 우리가 살려면 저것들을 죽이든지 병신을 만들어 버려야 하지 않겠어?”
심종하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10만 페소를 이문식에게 내놓았다. 심종하와 승대가 체결한 주식양도계약서는 동업자들의 투자계약서 조항을 위반한 것인데다가 주식양도계약서에 서명하고 공증했다는 날짜에 사실상 승대는 마닐라에 있지 않아서 문서위조 혐의로 고소를 당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미팅이 끝나고 헤어진 후 이문식은 파블로를 따로 만나 무언가 속닥거리더니 7만 페소를 건네주었다. 이문식은 나머지 3만 페소를 자기 호주머니 속에 넣었다.
이튿날, 헬렌과 파블로는 변호사와 함께 곤잘레스 총경을 만났다. 잠시 서로를 소개한 후 가벼운 얘기를 나누더니 네 사람은 박인채와 마리셀이 횡령죄사건에서 무혐의처분 받은 것에 대해 분개했다. 곤잘레스는 이미 그들과 한 패가 되기로 작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고위 경찰에게는 진실이나 정의나 처조카보다 돈이 훨씬 더 소중했다.
파블로가 곤잘레스를 은밀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그에게로 상체를 내밀었다.
“그렇다면 이런 방법은 어떨까요?”
“어떤 방법 말입니까? 말씀해 보세요.”
“누명을 씌우는 것입니다. 미스터 박이 총경님께 10만 페소를 주었다고 하고, 그 돈의 목적은 살인교사. 살해 대상은 나와 헬렌.”
“내 처조카 사위를 살인교사죄와 공무원 매수죄로 고소한다……?”
“그렇지요.”
“그렇게 되면 미스터 박의 반박도 만만치 않을 텐데요? 그의 뒤에는 언론인 라울과 변호사 로하스가 있소.”
“그 뒤처리는 우리가 책임지겠습니다.”
파블로가 다짐하며 헬렌의 변호사에게 눈치를 주었다. 그러자 변호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곤잘레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미스터 박이 나한테 70만 페소를 돌려달라고 청구서를 보내왔소. 아마 조만간 소송을 제기할 것 같소.”
“그것도 우리 변호사가 대응해 드리겠습니다. 물론 소송비용은 우리가 부담합니다.”
“내가 그를 살인교사죄로 고소하면 그쪽에서도 맞고소가 들어올 것인데……”
“그 건도 우리가 소송비용을 부담하겠습니다.”
“나는 은퇴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고, 자칫 이 소송 건 때문에 내 연금이 다 날아갈 수도 있소.”
곤잘레스 총경의 요구사항이 늘어가자 파블로는 쓴웃음을 삼키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곤잘레스의 돈 문제를 해결해주면서 오히려 그에게 돈을 가져다 바치는 우스운 꼴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를 이용해야만 한국과 필리핀의 소송에서 이길 수 있다고 판단한 이문식과 고승대는 모든 비용을 부담하겠다고 파블로에게 약속했었다. 헬렌은 긴장이 되는지 무릎 위에 놓은 두 손을 쉴 새 없이 꼼지락거리고 있었으나 묵묵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이윽고 파블로가 곤잘레스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 건은 우리 뒤에서 자금 지원을 하고 있는 한국 사람들하고 협의하겠습니다.”
“그 한국인들이라면…… 이문식과 고승대 말입니까?”
“잘 아시네요. 그 두 사람뿐만 아니라 심종하라는 한국인도 우리를 돕고 있습니다. 그 한국인들은 돈이 많으니까 총경께서 섭섭하지 않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그 한국 사람들은 내 처조카 사위인 미스터 박보다 돈이 많소?”
“당연하지요! 더구나 세 사람이잖아요.”
세 명의 한국인이 뒷돈을 댄다는 말에 곤잘레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음……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해줘야 할 것이 있소. 나를 당신의 프리메이슨 조직에 넣어 주시오. 그 조직에 가입하려면 기존 조직원 세 명 이상의 추천을 받아야 한다고 들었고, 파블로 당신이 그 조직의 간부라는 것도 알고 있소.”
파블로는 곤잘레스의 마지막 요구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변호사와 헬렌을 돌아보았다. 필리핀 프리메이슨의 그해 총 두목인 그랜드 마스터는 현직 경찰총장이었고 그 사실은 경찰관들 사이에서는 비밀도 아니었다. 그의 입술에 어느덧 음흉한 미소가 걸렸다.
“조직의 형제들과 상의해서 당신의 가입을 도와주겠소.”
“좋소! 그럼 거래가 된 것이오! 이제 우린 한 가족이고 형제요!”
곤잘레스가 고마운 낯빛으로 파블로에게 악수를 청했다.
헬렌 일행이 곤잘레스 사무실을 나오기 직전, 파블로가 신문지로 둘둘 만 두툼한 것을 곤잘레스의 호주머니 속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그 안에는 5만 페소의 현금이 들어 있었다. 파블로도 이문식에게서 받은 7만 페소 중에서 5만 페소만 곤잘레스에게 주고, 2만 페소는 자기 수입으로 챙겼다. 곤잘레스는 호주머니에서 나오는 파블로의 손을 잡아 다시 한 번 힘차게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