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실화소설 ‘더미’ 42] 한국판사는 ‘더미’에 대해 제대로 알려 하지 않았다
[아시아엔=문종구 <아시아엔> 필리핀 특파원, <필리핀바로알기> <자유로운 새> 저자] 첫 번째 횡령사건은 처음에 승대가 변호사의 도움을 받지 않고 조사에 임했다가 검사가 혐의를 인정하여 기소했다. 법정에서 고승대의 변호사 최연수는 사건과 관련이 없는 무수한 자료들을 들고 나와 판사와 검사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온갖 거짓말과 허위주장을 일삼았으며, 명백한 증거는 더미들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원규가 제출한 증거자료들은 조작된 것이라고 우겼다.
검사는 헬렌이 서류상 사장일 뿐이고 실제적으로는 피고의 지시를 받는 더미이기 때문에 헬렌의 서명이 들어있다고 하더라도 피고인 고승대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최 변호사는 더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며, 그들은 법적 권한과 책임을 지는 상근이사들이라고 주장했다. 검사는 더 이상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지만 방청석에 앉아있던 원규가 혼자 속으로 반박했다.
더미들은 법에 따르는 권한과 책임을 지는 상근이사들이 맞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필리핀 법을 적용할 때다. 투자계약서는 한국인들만 서명했고, 한국을 관할법원으로 했으니 필리핀 더미들은 한국 법에 따르는 권한과 책임이 없다. 그러므로 한국 법정에서 다루는 승대의 횡령혐의는 한국의 법에 따른 권한과 책임이 없는 더미들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없다. 만일, 법정에서 투자계약서를 인정하지 않고 필리핀 법을 적용할 것이라면, 회사의 주주로 등기되어 있지 않은 윤원규는 고승대의 횡령에 의한 피해자가 될 수 없고, 고소인의 자격이 없다.
최 변호사가 최후변론을 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필리핀 법에 의하면 외국인은 회사를 경영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OSC의 사장인 헬렌이 회사의 모든 경영권을 행사했고 피고 고승대는 헬렌의 지시를 받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피고인과 고소인 사이에 투자계약서가 체결되었다 하더라도 회사 경영자가 그 투자금을 회사를 위해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피고인의 권한 밖의 일이었습니다. 피고인이 지출한 금액은 피고인의 임금과 수당으로서 회사의 사장이 결재한 후 회사의 통장에서 직접 인출된 것입니다. 그리고 재판부에서 고려해 주셔야 할 중요한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피고인은 피해자가 고용한 무장경비에게 목숨의 위협을 받고 강제로 쫓겨났습니다. 둘째, 피해자가 제출했던 자료들은 필리핀에서 조작된 것들입니다. 셋째, 피고인 혼자서 회사를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최 변호사와 눈빛을 주고받은 김승희 판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승대를 쳐다보았다.
“피고는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다면 하세요.”
“네, 저는 동업을 한 것이 아니라 투자를 받아 적자인 회사를 흑자로 만들어가고 있었는데, 흑자로 전환되자마자 회사를 강탈할 목적으로 피해자가 저를 위협하여 쫓아냈습니다. 제가 오히려 피해자인데, 너무 억울합니다.”
2012년 4월. 고승대의 업무상 횡령죄 1심 판결이 났다. 결과는 무죄였다. 김 판사의 판결취지는 이러했다.
피고인이 이사회 결의 없이 보수를 지급받았다고 하여 그것이 횡령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피고인은 자금 집행 당시 상근이사 3명 중 2명의 서명을 받았다.
재판정에 나와 있던 원규는 허탈했다. 상근이사 3명 중 2명의 서명을 받았다니! 판사는 필리핀의 더미라는 존재에 대해 이해하기를 거부했고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판결 소식을 접한 어느 언론매체에서는 이런 기사를 실었다.
필리핀 현지 교민들은 “고씨가 필리핀에서는 더미방지법을 악용하고, 한국 법정에서는 더미주주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교묘한 행태를 보였다”며 “재판부가 이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어서 벌어진 일인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상식이 있는 일반인들의 법에 대한 무지였고 편견이었다. 어느 변호사가 말했다.
“많은 시민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한국의 법원이 진실을 규명하고 정의를 구현하는 조직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거든요. 우리나라의 판사는 지나치게 많은 재량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증과 심증 중에서 어느 것을 증거로 채택할 것인지는 판사의 권한입니다. 피고인이 죄가 있고 없고는 법과 물증에 의해서가 아니라 판사의 마음먹기 나름입니다. 그래서 법정은 판사의 마음을 쟁취하기 위한 전쟁터라고 말합니다. 전쟁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진실, 정의, 도덕, 윤리 같은 것은 전쟁터에 필요하지 않습니다. 변호사들은 그들의 변론이 진실인지, 정당한지, 비열한지를 따지지 않습니다. 승소하기 위해 필요한지 유용한지만을 따집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은 법정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한 단면일 뿐입니다. 판사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실제로는 더 더러운 짓들을 벌이거든요.”
또 다른 변호사가 말했다.
“한국에서는 수사기관에나 법원에서의 선서 없는 위증은 죄가 되지 않습니다. 각종 준비서면이나 진술서에서의 거짓말도 선서가 없으면 아무런 처벌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미국이나 다른 나라에서는 사법방해죄가 된다고 하더군요. 사기꾼들은 우리나라의 법을 좋아하지요. 우리나라에서 사기꾼들에게 당하는 피해자들이 특히 많은 이유이기도 하지요.”
“정의와 무관한 모든 지식은 지혜가 아니라 쓸모 있는 지식”이라고 플라톤이 말했다. 지혜를 갖추지 못한 법조인들이 지도층으로 인정받고 존경받는 사회는 지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