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실화소설 ‘더미’ 43] 마사지숍 단골 ‘순진한 아줌마’가 사기당한 이야기
[아시아엔=문종구 <아시아엔> 필리핀 특파원, <필리핀바로알기> <자유로운 새> 저자] 블루오즈 안마 숍의 단골고객 중에 안미숙씨가 있었다. 나이는 40대 중반으로 남편과 사별한 후 중학교에 다니는 애들 두 명의 영어공부를 위해 필리핀에 들어온 지 1년 정도 되었다고 했다. 허리가 좋지 않은 미숙은 한의원에 다니면서 침을 맞곤 했는데, 블루오즈에서 안마를 받으면서부터는 침을 맞지 않아도 오히려 더 좋아진 것 같다며 매주 한 번씩 인채의 가게에 들르곤 했다. 그녀는 붙임성이 좋고 영어로 대화하기에도 무리가 없어서 인채 부부와 금세 친구가 되었다. 한국에 모아둔 재산을 계속 가져다 쓰기만 하다 보니 이러다가는 애들이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빈 털털이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인채 부부에게 털어놓기도 했다.
2012년 5월, 미숙은 교민 정보지를 통해 강윤길을 알게 되었다. 50대 초반인 그는 마닐라의 파사이 지역에 있는 한국식품점 ‘Q마트’를 운영하고 있었고, 그의 아내는 연초에 외아들이 대학으로 진학하게 되어 아들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가 있었다. Q마트를 팔고 그 역시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하여 교민 정보지에 광고를 내었다고 얘기했다.
미숙은 며칠간 Q마트를 방문하여 한두 시간씩 강윤길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마트에 드나드는 손님들을 살펴보았다. 한국인들과 필리핀인들이 섞여서 꾸준히 드나들어 하루 평균 매상이 5만 페소라는 그의 말이 과장된 듯하지만 3만 페소는 되어 보였다. 그는 마진이 30%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가게 임대료와 직원 두 명의 급여, 전기세 등의 비용은 5만 페소 정도라고 하였다. 미숙이 속으로 계산해보니 하루 3만 페소의 매출로 30% 마진이면 월 25만 페소의 수입은 나올 것이고, 강윤길이 말한 비용들 제하면 20만 페소의 순수입이 생기게 된다. 그 정도면 한국 돈으로 환산해서 500만원이 넘으니 해볼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숙이 관심을 보이며 거의 매일 마트에 들러 손님들의 동향을 살피자 강윤길은 마음이 달았다. 마트를 인수하고 싶다며 다녀간 사람이 지난 넉 달 동안 다섯 사람이나 되었지만 그들 모두 갑자기 연락을 끊어 버려 마음이 답답하고 급해져 있었다. 게다가 미숙의 얘기를 잠시 들어보니 무언가 생활방편을 마련해야만 하는 절실함이 엿보였다.
미숙이 마트를 방문하기 시작한지 일주일째 되던 날, 강윤길은 미숙을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식사를 하면서 미숙은 오퍼 받은 마트 인수가격 7500만원에서 500만원을 깎는데 성공했다. 기분이 좋아진 미숙이 식사비용을 내겠다고 하자, 그렇다면 노래방 비용은 자기가 쏠 테니 한 곡만 부르자고 강윤길이 제안했다. 미숙의 살짝 벌어진 촉촉한 입술을 그의 눈길이 간간이 훔치며 지나갔다.
노래방에서 미숙은 오랜만에 신나게 놀았다. 맘껏 소리쳐 노래를 불렀고, 남편이 저 세상으로 떠난 후 처음으로 남자의 품에 안겨 춤을 추었다. 하지만 강윤길의 입술이 그녀의 얼굴 가까이 다가오자 정신이 번쩍 들어 그를 밀치며 정색을 했다.
“강 사장님, 이제 그만 가요.”
“아니, 아직 한 시간도 채 안 되었는데…… 한 곡만 더 부릅시다.”
“아뇨, 집에서 애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어서 나가요.”
그녀의 표정은 매몰차지는 않았지만 당황한 듯 눈길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얼핏 역겨운 기색을 내비치기도 했다.
며칠 후, 미숙은 인채와 마리셀을 만나 Q마트를 인수하기로 계약했다고 말했다. 인채가 걱정하는 어투로 물었다.
“필리핀 법으로는 외국인이 가게를 직접 소유하거나 운영할 수 없는데……”
“네, 알고 있어요. 강 사장이 썼던 회사 이름 그대로 쓰기로 했어요. 마트는 개인회사Single Proprietorship로 등록되어 있고요, 지금 마트에서 일하고 있는 여직원 로즈의 명의로 되어 있는데, 로스하고 운전수를 제가 계속 고용하기로 했으니 문제없을 것 같아요.”
“그럼 로즈라고 하는 여자 한 사람을 더미로 쓰는 것이네요, 괜찮을까요?”
“강 사장과 3년째 일하고 있다고 하던데, 지금까지 한 번도 문제가 없었다고 해요.”
마리셀은 들떠 있는 미숙과 함께 마냥 기뻐하며 재재거렸다.
“사업 시작을 축하해요. 안 사장님! 호호호!”
“사장은, 무슨! 호호호!”
“개업식은 언제 하세요? 저희가 한번 찾아뵐게요. 그리고 우리도 앞으로 안 사장님 가게를 이용해야겠어요. 우리 가게에서 그다지 멀지 않으니까요.”
“개업식은 안 할 거예요. 잔금은 다음 주 월요일에 가게에서 정산하기로 했어요. 그러고 나면 곧바로 제가 운영할 거예요. 자주 놀러 오세요.”
“네, 그럼 남편과 함께 다음 주 월요일에 Q마트로 찾아 갈게요.”
마리셀과 미숙의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인채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이 가시지 않았다. 강윤길의 더미까지 그대로 인수하기로 했다는 것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느껴졌다.
미숙이 Q마트를 정식으로 인수하던 날, 아침 일찍 인채와 마리셀이 미리 준비해 두었던 아담하고 예쁜 꽃나무 화분을 들고 찾아갔다.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미숙이 그들을 반갑게 맞았다. 그녀 곁에서 장부를 확인해주던 강윤길도 빙그레 웃으며 그들과 인사했다. 서로 처음 인사하는 사이였지만 인채는 그가 왠지 낯설지 않았다.
인채는 슬금슬금 로즈를 관찰했다. 얼굴은 그다지 예쁘지 않았지만 20대 초반의 처녀다운 싱싱한 젊음과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가게 입구에 앉아 흐릿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언뜻 미욱하지만 착해 보였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인채는 한국에서 출장 온 고향 친구들과 함께 하얏트 호텔의 카지노에 놀러갔다. 도박을 싫어하는 인채는 손님들이 원하는 경우에만 카지노에 가곤 했고, 그 안에서 어슬렁거리며 구경만 했다. 친구들이 룰렛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사이 그는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는 곳으로 가보았다. 바카라라고 부르는 카드도박을 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강윤길이 앉아서 베팅을 하고 있었다. 그제야 인채는 그와 처음 마트에서 인사했을 때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느낌의 이유를 알았다. 그가 앉아 있는 테이블 앞에는 천 페소짜리 칩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강 사장이 마트를 팔고나면 곧바로 한국에 돌아간다더니 아직도 안 갔네? 그리고 도박을 크게 하는데…… 혹시 카지노 중독? 그는 카드에 집중하느라 사람들 틈에 섞여서 자기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인채를 눈치 채지 못했다.
두 시간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 인채의 친구들이 5백 불 정도 잃게 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윤길이 궁금하여 잠깐 바카라 게임 테이블로 가 보았다. 그는 몇 개 남아 있지 않은 칩을 만지작거리면서 심각하게 굳은 얼굴로 담배만 뻑뻑 피워대고 있었다.
며칠 후, 인채는 바기오에서 어학원을 경영하고 있는 이상원 사장의 전화를 받았다. 인채와 비슷한 연배인 이상원은 필리핀에서 생활하면서 겪는 이러저러한 일들을 인채와 격의 없이 서로 상의하는 사이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불안한 기색이 묻어 있었다.
“박 사장님, 바기오에서 또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습니다. 가까이에서 알고 지내는 김 사장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한국에서 명예퇴직하면서 받았던 퇴직금을 돼지농장에 투자했어요. 그런데 그 농장을 며칠 전에 더미한테 몽땅 빼앗겨 버렸지 뭡니까!”
“더미한테요? 어떻게?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처럼 주식회사를 만들어 회사 소유로 농장을 인수하려고 했답니다. 그런데 회사설립을 도와주던 변호사가 자기 명의를 빌려주겠다고 했대요.”
“네? 변호사가 자기를 더미로 쓰라고 먼저 제안했다고요?”
인채는 그 말에 충격을 받아 어안이 벙벙했다.
“그렇다는군요. 그래서 변호사 정도면 어느 사회에서나 지도층이니까 믿고 그 사람 단독 명의로 개인회사를 설립했대요. 농장을 인수한 후에 기존의 축사를 허물고 새로 더 크고 깔끔하게 지었을 뿐만 아니라, 농장 안에 살면서 일하는 직원 가족들의 거주지도 새로 지었고요. 공사가 끝나고 축사에 돼지를 가득 채운 후 한국 사람들과 필리핀 지인들을 불러 개업식을 하려고 날을 잡았는데, 개업식 하루 전에 변호사가 그러더래요. 그 농장은 자기 소유니까 허락 없이는 아무나 함부로 들어올 수 없다고. 그래서 김 사장이 당신은 더미 아니냐고 따지니까 화를 내면서 한 번만 더 그따위 말을 꺼내면 김 사장을 고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더랍니다.”
“회사 설립 전에 변호사는 명의만 빌려준 것이고 실제 오너는 김 사장이라고 명시한 서류를 작성하지 않았었나요?”
“그런 서류가 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이 서명했고요. 그런데, 지금은 그 서류의 서명이 자기 것이 아니라 위조된 서류라고 주장하고 있다지 뭡니까.”
“변호사의 서명이 아니라고요?”
“네. 변호사가 그 서류에만 비슷하지만 살짝 다르게 했던 모양이에요. 변호사가 서명했던 다른 서류들하고 비교해보니 확실히 조금 다르더랍니다.”
“어허! 그 변호사 놈이 처음부터 김 사장을 털어 먹으려고 작정했던 모양이네요.”
“너무 황당한 경우라…… 변호사를 상대로 소송해서 이길 것 같지도 않고. 그 농장에 투자한 돈이 1억 원이 넘는다고 하던데……”
“어휴…… 필리핀에서는 친절하게 접근하는 모든 사람들을 조심해야 해요. 더구나 더미를 쓰는 것이 불법인 줄 너무나 잘 아는 변호사가 자기를 더미로 쓰라고 했다는 친절한 제안은 특히 더 조심해야 하는 것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