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실화소설 ‘더미’ 49] 정체불명의 사내들이 산으로 차를 몰았다
[아시아엔=문종구 <아시아엔> 필리핀 특파원, <필리핀바로알기> <자유로운 새> 저자] 부산으로 돌아온 달후와 홍 회장은 사업을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홍 회장은 남들에게 정보를 누설하지 말 것을 신신당부하면서 그동안의 수고비로 일시불 천만 원을 주었다. 통이 크다는 점과 사업이 성공하면 더 큰 보수를 주겠다는 홍 회장의 면모를 미리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 날 달후는 승대를 만나 저녁을 먹으며 수고비로 200만원을 주었다. 수고에 대한 답례는 반드시 현금이어야 한다는 것을 달후는 그때까지도 잊지 않고 있었다.
홍 회장은 회사 내에 특별 부서를 꾸렸다. 태양광 설비는 모두 저렴한 중국산을 수입하기로 했기 때문에 공장을 차릴 필요는 없었고, 무역실무를 담당할 직원과 전기 기술자, 그리고 축전지 기술자를 채용하기로 했다.
달후는 다나오 시 전체의 가로등과 관공서의 외등을 태양광 전지로 교체하는 계약을 체결할 임무를 띠고 다시 세부로 들어갔다. 다나오 시와 계약이 성사된 후 필리핀 전 도시로 사업을 확대하는 계획이었다. 다나오 시장을 포함하여 필리핀 사람들에게 초라하게 보여서는 안 된다는 홍 회장의 지시에 따라 달후는 출장비를 두둑하게 받았다.
세부로 간 달후는 모든 연락을 홍 회장하고만 해야 했다. 프로젝트를 은밀하게 진행해야 한다며 홍 회장은 회사의 그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말 것을 지시했고, 달후의 세부 행과 다나오 시장과의 사업추진도 극비사항이었다. 그래서 더 이상 승대를 통하지 않고 오스메에게 직접 연락했다.
달후는 세부 시내에 있는 캐슬피크 호텔에 투숙했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시장과 잠깐 면담하거나 식사하는 것 외에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좋은 술집과 고급 식당을 찾아다니며 돈을 펑펑 썼다.
공부만 잘했지 이곳 사정 모르는 멍청한 판사들은, 필리핀에서 일하는 한국인이 회사공금을 개인적으로 마음껏 써도 대기업 주재원의 임금과 수당보다 많지 않으면 무죄라고 판결하지 않았던가! 히히히! 가만있자…… 필리핀에 살고 있는 교민들 중에 대기업 주재원의 생활수준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몇 퍼센트나 될까? 상위 1퍼센트도 안 될 텐데. 아하하하!
달후는 세부에서의 생활을 좀 더 멋지게 즐기기 위해서 승용차가 필요했다. 그래서 호텔에서 소개해 준 렌터카 업체에 찾아갔다. 코로나 한 대를 한 달간 렌트하기로 하고 계약서를 작성한 다음 차를 몰고 주차장에서 나가는데, 마침 토미가 들어오다 그의 옆얼굴을 얼핏 보게 되었다. 토미는 마닐라에서의 중고차 매매업이 성공한 후 세부에서 렌터카 사업에 진출한지 벌써 5년째였다.
어? 저 사람……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라고 생각하며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토미는 방금 나간 고객의 파일을 가져오라고 직원에게 지시했다. 계약서와 운전면허증 사본에는 김달후라고 적혀 있었다. 국적은 한국. 토미는 즉시 리나에게 전화를 했다.
12년 전, 달후의 버림을 받은 리나는 마리셀과의 모든 재판에서 패소하여 2년 징역형을 받았다. 달후의 아들 훈Hun을 낳은 지 5개월 후였다. 주변에 힘 있는 사람이 없었던 리나는 토미에게 도움을 청했다. 리나의 사정을 딱하게 여긴 토미가 인채과 마리셀을 찾아갔다. 리나는 달후가 시키는 대로 했던 더미였을 뿐이고 실제로 리나도 피해자라고 말하며 선처를 호소했다. 결국 마리셀이 법원에 탄원서를 보냈고 리나는 감옥에 수감된 지 석 달 만에 풀려났다.
그 후 싱글 맘인 리나를 토미가 가끔 찾아가 경제적인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러다가 한 번씩 육체적인 관계를 맺기도 했지만 서로 깊이 빠지지 않은 상태로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줄곧 마닐라의 선술집에서 경리 일을 보면서 아들 훈과 단 둘이 살고 있었다.
토미의 연락을 받은 리나가 그녀의 형부인 마까리오와 의논했다. “훈이 아빠가 세부에 와 있대요. 형부가 한번 만나봐 주세요. 하지만 만일 저나 훈이에게 아무런 애정이나 관심이 없다면 저도 여태까지 살아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잊고 살 테니 그냥 돌아오셔도 돼요. 훈에게는 아빠에 대해서 당분간 비밀로 해 주시고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김달후. 갑작스레 그에게 생각이 미치자 리나의 심장은 쓰라림으로 조여들었다. 며칠 뒤, 다나오 시와 세부 시를 연결하는 국도에서 달후의 차를 뒤쫓아 오던 경찰이 세웠다. 오스메를 만난 후 세부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달후가 무슨 일이냐며 따지자 다짜고짜 그에게 차에서 내리라고 명령했다.
그때 갑자기 불량해 보이는 사내 세 명이 차 뒤쪽에서 불쑥 나타났다. 그들의 허리춤이 불룩한 게 권총을 숨기고 있는 듯 했다. 그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차에 시동을 걸려하자 경찰이 총을 꺼내 그의 얼굴에 겨누었다. 그가 다나오 시장의 이름을 들먹이며 친분을 과시해도 경찰은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경찰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하게 코로나의 뒷좌석으로 옮겨 탔고, 세 명의 사내들은 운전대와 조수석에 그리고 그의 옆 좌석에 한 명씩 탔다. 그러고 나서 그의 휴대폰을 빼앗아 전원을 껐다. 오후 5시경의 국도에는 지나가는 차량들이 많았지만 아무도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 하는 사람이 없었다. 남의 일에 호기심은 있지만 참견하거나 끼어들지 않는 것은 필리핀 사람들의 오래된 관습이다.
아니, 딱 한 사람이 있었다. 달후가 운전석에서 내려 뒷좌석으로 옮겨 타기 직전, 선팅을 짙게 한 차가 그들 곁을 지나다 급정거했다. 그리고는 창문을 내렸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둥그스름한 얼굴이 달후를 가만히 쳐다보는 듯하더니 이내 시동을 걸고 가 버렸다.
곧이어 코로나가 출발하자 경찰도 어디론가 사라져 갔다.
달후와 정체불명의 사내들을 태운 차는 두 시간 이상 북서쪽으로 달렸다. ‘말로만 들었던 납치를 당했구나’라고 생각하자 그는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가진 돈을 모두 주겠다, 고 했지만 그들은 필리핀 어로 무어라 시끄러운 대꾸를 했을 뿐 한마디도 영어를 쓰지 않았다. 그들의 땀 냄새와 입 냄새가 역하게 그의 코 속으로 파고들었다.
어느덧 날은 어둑해지기 시작했고 차는 비포장 산길을 한참동안 달렸다. 길바닥은 패이고 울퉁불퉁했다. 소나기가 지나갔는지 군데군데가 질척거렸다. 차량통행이 거의 없는 듯 길에 잡초가 많이 나 있었다. 코로나는 쉼 없이 덜컹거렸고 차체의 하부가 돌에 긁히는 소리가 자주 들렸다. 달후는 숨 막히는 공포 속에 심한 요의를 느껴 차를 잠시 세워달라고 했지만 그들은 들은 체 만 체했다.
달후는 문득 국도에서 이 사내들에게 납치되기 직전에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던 사내가 승호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글라스 때문에 눈을 보지 못했으니 단정할 수는 없지만 얼굴형과 코, 입매무시가 십년 전에 마닐라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승호를 닮아 있었다. 하지만 ‘설마 승호가 세부 섬의 지방 국도에서 차를 운전하고 다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흔들어 버렸다.
이제 주위가 어두워졌다. 조심스럽게 길을 찾아 달리던 차가 어느 궁벽지고 허름한 집 앞에서 멈추었다. 리파Lipa라고 부르는 풀잎으로 지붕을 얹은 초가집이었다. 집의 거실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창문이 없는 거실 주위로 날벌레들이 몰려들었다. 집 주위는 사방을 둘러보아도 불빛하나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밀림 숲이었고 쥐 죽은 듯이 괴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