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실화소설 ‘더미’ 48] 암세포들의 합창 “우리가 남이가?”
[아시아엔=문종구 <아시아엔> 필리핀 특파원, <필리핀바로알기> <자유로운 새> 저자] 암세포는 스스로를 정상세포로 변화시키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주위에 있는 정상세포를 암세포로 바꾸려고 한다. 마찬가지로, 반성할 줄 모르는 인간은 스스로를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주위 환경을 잘못된 자신에게 맞게끔 바꾸려고 한다. 그래서 반성할 줄 모르는 인간은 암세포와 같다.
암적 존재들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원규와 인채가 얘기를 나누었다.
“정상세포들이 더 이상 피해를 입기 전에 암 세포를 방사선으로 파괴하든지 수술로 제거해야 돼!”
“중앙동에는 해운회사들이 많아서 항해사 출신들이 많아. 그들 얘기로는 바다 속에 항해사들이 알지 못하는 난파선이나 암초들이 많이 있단다. 그래서 항해사들은 새로 발견되는 암초를 반드시 해도에 기록한대. 항행통보航行通報·Notice to Mariner라는 것이 있어서, 새로운 암초를 발견하면 다른 모든 항해사들에게 알려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 마도로스들의 의무이자 관습이래.”
“음, 그것 좋은 관습이군. 암세포는 파괴하든지 제거하자! 파괴할 수 없는 암초는 세상에 널리 알리고 해도에 기록하자!”
통화를 하고 있는 인채의 발치에서 거실로 몰래 들어온 따스한 햇살이 노닐었다. 베란다 창문 너머 마닐라 베이의 수평선 위에는 늦은 오후의 부드럽고 농염한 태양이 뭉게구름을 온통 노랗게 물들이고 있었다.
이글거리는 저 석양,
굽혔다가 다시 일어서는
용기 있는 가슴을 태우리라.
용기란 성공할 확신이 없을지라도, 어렵고 위험해서 다른 사람들이 꺼리더라도, 가치 있는 목적을 위해 굳은 의지를 발휘하는 힘이다. 무릇 용기 있는 사람은 아무리 큰 시련이 닥쳐도,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꿋꿋하게 두려움에 맞선다.
고승대와 이문식. 그들이 바라는 것을 배려해 준 사람들에게 은혜는 못 갚을지언정 오히려 뒤통수를 치는 자들. 동업회사의 공금을 횡령하고도 오히려 재판부를 농락한 자들. 잘못을 지적하는 원규에게 오히려 투서협박을 하며 무고한 사람들의 인생마저도 파탄 내려고 했던 자들. 운영자금을 빌려준 인채와 그의 아내를 오히려 필리핀 감옥에 넣으려 했던 자들. 인채의 처고모부까지 사주하여 살인교사 누명을 씌우는 자들. 온갖 추악한 거짓 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는 교활하고 비열한 자들.
원규는 부산에서 고승대를 명예훼손죄로, 이문식을 사기죄로 고소했다. 앞으로도 회사의 회계자료를 통해 발견되는 것뿐 아니라 두 사람의 모든 악행과 비리에 대해 합법적인 책임을 물을 것임을 명확히 했다. 용서할 수 없는 자들은 용서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고승대와 이문식은 훗- 하고 코웃음을 쳤다.
우리들의 악행과 비리를 밝혀내는 것이 무어 그리 중요하다는 말인가. 한국의 경찰청, 검찰청 그리고 법정은 우리가 고용한 변호사와 함께 거짓말로 장난칠 수 있는 우리의 희극 무대인데.
때로는 법률을 따를 수 없는 때도 있어요. 법률이란 자꾸 바뀌는 것이지만 꼭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아요. 당신은 해야 할 일을 할 권리가 있어요. -존 스타인백(1902-1968)
고승대의 횡령에 대한 무죄 판결에 크게 고무된 사람이 또 한 사람 있었다. 바로 김달후였다. 고승대를 만난 후에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필리핀에 대한 미련이 불현듯 되살아났는데, 송 판사의 판결이 그를 한층 더 자극하고 부추겼다. 어디를 가더라도 감시카메라의 포위망을 벗어날 수 없는 좁은 한국에서보다는 필리핀 같은 후진국에서 한국사람이나 현지 교민을 상대로 크게 한탕 해 먹는 것이, 나중에 재수 없이 걸리더라도 수월하게 빠져나갈 수 있다고 스스로를 유혹했다.
한국과 필리핀은 같은 아시아권에 속해 있으면서도 문화가 크게 다르다. 특히 한국은 정치인들과 사귀기 어려운데 필리핀은 수월하다. 한국은 정치인들이 개입하면 일이 수월하기 때문에 정치인들과의 친분은 크나큰 자산이다. 필리핀은 정치인이 개입한다 하더라도 안 되는 일이 많고 그들에게 책임을 묻지도 않는다. 필리핀 정치인을 사귄 후 그 사람 이름으로 사업을 추진하다가 나중에 일이 어긋나더라도 그 사람은 책임지지 않으니, 일을 추진한 달후 역시 책임지지 않아도 될 것이다. 피해자가 그를 한국에서 고소해도 쉽게 무죄판결을 받을 수 있다. 고승대의 판례가 있지 않은가!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니까, 이래저래 한국인을 상대로 사기 쳐 먹기 딱 좋은 환경이 필리핀이라고 그는 판단했다.
“고 사장님! 승소를 축하드립니다!”
달후의 축하전화에 승대가 의외라고 생각했지만 반가운 어투로 받았다.
“네,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아하하하!”
“이제 마음 편하게 큰 사업 일으키셔야지요. 필리핀에는 언제 다시 들어가십니까?”
“한국에서는 승소했는데, 그 놈들이 필리핀에서 계속 저를 걸고 넘어지네요. 그래봐야 지들만 손해고, 크게 다칠 일만 남았지만요. 하하하!”
“우리 고 사장님께서 사람이 너무 좋아요. 나 같으면 당장 사람들 풀어 죽여 버릴 텐데 말입니다. 하하하!”
“맞아요. 제가 마음이 약한 게 탈이에요.”
“고 사장님, 그런데 혹시 태양광 발전에 관심 있는 필리핀 고위 공무원이나 정치인 알고 계세요? 고 사장님이 좀 소개해 주셨으면 해서요.”
“아, 네. 하지만 제가 요즘 바빠서요……”
“그러지 마시고 한 번 만납시다. 내가 잘 알고 있는 졸부가 있는데, 필리핀에 투자하고 싶어 하거든요.”
달후의 말투가 은밀해지고 끈적끈적해지자 승대의 아이큐가 재빨리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들은 며칠 후에 만나 작업을 구상했다.
달후는 우연히 해운대 일대의 부동산 개발붐으로 큰돈을 번 홍 회장을 알게 되었다. 예전의 송 회장과는 달리 홍 회장은 조폭들과 어울리지 않았고 건축기사와 토목기사들을 고용하여 제대로 된 개발회사를 경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홍 회장도 돈은 많은데 그에 걸맞는 명예를 갖추지 못했다는 자괴감을 가지고 있었다. 허영심에 지배받는 인간들에게서 흔하게 발견되는 약점이었다. 그리고 달후는 그것을 정확하게 알아채고 있었다.
달후의 의도를 간파한 승대가 이문식에게 연락했더니 파블로의 프리메이슨 조직원인 오스메를 추천했다. 오스메는 세부 섬에 있는 다나오Danao 시장의 사촌형이다.
세부는 한국인들에게 유명한 휴양지이고 마닐라보다는 치안이 안전하다고 알려져 있어서 달후는 수월하게 홍 회장을 꼬드길 수 있었다. 해외사업 진출과 필리핀 정치인을 사귄다는 두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기 위해서, 며칠 후 달후와 홍 회장이 세부로 날아갔다. 승대의 전갈을 미리 받은 이문식과 파블로가 오스메에게 얘기했더니 달후와 홍 회장은 세부 공항에서부터 다나오 시청까지 경찰 오토바이의 경호를 받으며 이동했다.
시장의 저택에서 근사한 저녁을 대접 받을 때였다. 성질이 급한 홍 회장이 그 자리에서 직접 다나오 시장과 오스메에게 태양광 사업의 전망에 대해 물어보았다. 홍 회장은 달후 정도의 영어실력을 갖추고 있었으니 굳이 달후를 중간에 세우지 않아도 되었다. 다나오 시장과 오스메는 시종 긍정적인 답변만 했다.
손님들의 질문에 부정적인 답변을 하는 것은 무례라는 것이 필리핀 관습임을 알지 못하는 홍 회장은, 시장과 오스메의 확신에 찬 대답을 사업에 대한 일종의 보증으로 받아들였다. 만약 그 사업을 추진하면 도와줄 수 있느냐고 홍 회장이 묻자, 그들은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약속하였고, 급기야 홍 회장이 시장과 어깨동무하며 “우리가 남이가!”라는 한국어 건배사를 외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