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실화소설 ‘더미’ 39] 조지 오웰 “자네를 파괴한 자는 절대 그냥 보내지 마라”

자네를 파괴한 자는 절대 그냥 보내지 마라. 묵묵히 기다리고 있다가 힘이 생기면 보복하라. 더 이상 보복해야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할지라도. – 조지 오웰(1903-1950)

[아시아엔=문종구 <아시아엔> 필리핀 특파원, <필리핀바로알기> 저자] 2011년 12월, 더미 헬렌이 박인채와 마리셀을 필리핀 검찰에 고소했다. 혐의는 횡령죄.

10여년 전에 김달후의 더미한테 이와 비슷한 소송을 당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 인채는 블루오즈의 고문 변호사에게 이 사건을 맡겼다. 그런데 이번 소송은 예전과 달랐다. 이번에는 상대 측이 검사를 돈과 프리메이슨 조직으로 압박했다. 그리고 이번이 훨씬 더 심각하고 위험했다. 프리메이슨은 필리핀의 정관계에 조직망이 두터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블루오즈의 고문변호사는 프리메이슨에게 질려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마리셀이 고모부인 곤잘레스를 떠올렸다. 십년 전에 형을 선고받아 5년 동안 옥살이를 했지만 퇴소 즉시 신청한 복직 요구가 대법원의 판결로 받아들여졌다고 들었다.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지만 그런 만큼 그의 영향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반증한 셈이었다. 고모에게 연락해보니 그는 벌써 총경으로 승진까지 해 있었고, 경찰청 본부에서 마약 단속반 반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처음에 인채는 아내의 의견에 반대했다. 필리핀의 경찰들은 워낙 부패가 심해서 친척이라 하더라도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 그가 반대한 이유였다. 하지만 마리셀은 그토록 가까운 친척에게 설마 나쁜 짓이야 하겠느냐며 남편을 안심시켰다.

곤잘레스는 마리셀이 들고 간 소송 자료를 훑어보더니 변호사를 당장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새로운 변호사를 선임해 줄 테니 70만 페소를 준비하라고 했다. 변호사 선임료와 사건이 종결될 때까지의 잡다한 비용을 포함한 것이라고 했다. 며칠 뒤 곤잘레스는 그 돈을 자신의 자택으로 보내라고 마리셀에게 지시했다. 마리셀은 곤잘레스의 조언대로 변호사를 해임하고 새 변호사를 기다렸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도 선임해 준다던 변호사 소식은 없고 검사실에서 들려오는 소문은 박인채와 마리셀의 기소 가능성이었다. 그런데 곤잘레스는 마리셀에게 추가로 돈을 요구했다.

“뭐라고? 약속은 안 지키면서 무슨 돈을 또 달라고 해요?”

인채가 버럭 화를 내자 마리셀이 움츠러들며 대꾸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고모한테도 말씀드렸지만 고모부한테 제대로 전달이 안 되는 것 같아요. 집에도 잘 안 들어온대요.”

“고모부라는 그 사람, 혹시 딴 집 살림하는 것 아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요.”

“그렇겠지! 그러니까 우리 돈 받아서 그런 짓 하는데 쓰는 거겠지!”

“……”

“당신, 앞으로 고모부하고 얘기하지 말아요! 전화가 와도 받지 말고, 꼭 받아야 할 상황이면 반드시 통화를 녹음해 놔요! 그리고 지금부터는 내가 직접 나서야겠어!”

“네……”

마리셀이 낮게 말하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녀의 가슴은 그동안의 고뇌로 바짝 타버렸다. 핏기가 없는 낯빛이 파리해지며 슬퍼보였다. 그러자 인채는 갑자기 아내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이 사건은 애초에 한국인들을 믿고 한국인들끼리 동업을 하다 한국인이 잘못하여 시작된 것이 아니었던가. 김달후에게 당한 후 이번이 두 번째다.

처고모부의 행태에 크게 실망한 인채가 아내와 함께 라울을 찾아갔다. 그는 몇 명의 기자들과 함께 한국의 신문고와 비슷한 단체를 운영하고 있는 언론인인데, 그 단체에서는 매일 힘없는 서민들의 투서를 받아 자체적으로 취재하고 조사한 후 라디오와 신문을 통해 부패한 기득권층과 공무원들을 실명으로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문제를 풀어주곤 했다. 게다가 필요하다 싶으면 소송까지 불사하면서 약자들의 분하고 억울한 사정을 적극적으로 해결해주고 다녔다.

사정 이야기를 들은 라울은 그들에게 변호사 로하스를 소개했다. 그는 유명한 인권변호사였다. 인채와 마리셀을 고소한 사건은 너무나 단순하고 명백한 무고였기 때문에 로하스는 검사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프리메이슨 조직원들을 차단하는 데 주력했다.

“고 사장! 검사의 결정이 나왔네.”

이문식의 전화를 받은 승대는 반가움에 귀를 바짝 곤두세웠다.

“네, 선배님! 그래, 어떻게 되었어요? 구속기소가 결정되었지요?”

승대의 물음에는 자기도 민망할 만큼 설레임과 기대가 잔뜩 묻어 있었다. 그 정도로 죄 없는 박인채와 마리셀의 감옥행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프리메이슨 조직의 힘을 믿었기 때문에 그가 원하는 결정을 받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가 지연되는 것이 짜증스러웠다. 필리핀은 원래 더딘 나라니까, 하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그는 인채와 마리셀이 필리핀 감옥 안에서 학대당하고 성폭력에 시달리는 장면을 날마다 상상하며 즐겼다. 모든 죄를 덮어 줄 테니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하면 어떻게 침을 뱉어줄까, 얼마를 요구할까를 생각하며 자기도취에 빠졌다. 그랬더니 잔인하고 흉측스러운 미소가 입 꼬리에 걸렸다.

“아니…… 그게 말이지…… 필리핀의 거물 언론인하고 아주 센 변호사가 박인채를 돕고 있는 모양이야. 기각되었다.”

“네에? 아니……”

승대는 솟구쳐 오르던 기대가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잠시 허탈감에 몸을 떨더니 이를 으드득 갈았다.

“그럼, 그 연놈을 감옥에 쳐 넣으라고 준 돈 50만 페소는 저에게 돌려주셔야죠.”

“뭐라고? 돈을 돌려달라고?”

이문식은 이 좀스럽기 그지없는 녀석이 짜증났다.

“그거야 이미 그 자들을 고소하면서 선임했던 변호사 비용하고 프리메이슨 조직원들 활동비로 다 썼잖아. 잘 알면서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그리고 앞으로 저 쪽에서 헬렌을 상대로 무고죄와 손해배상청구소송을 걸어올 수 있으니까 미리 돈을 더 준비해!”

“……”

“헬렌은 너의 더미라는 것을 명심해야 돼! 만일 헬렌의 소송비용을 부담하지 않으면 그 여자가 먼저 더미라고 자수해 버릴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헬렌은 죄를 면죄 받고, 그 여자가 모든 사실을 있는 대로 죄다 까발리면 너만 다친다는 것도 알고 있겠지? 앞으로 발생하는 모든 소송에서 네가 불리할 것은 당연하고.”

이문식의 말을 들은 그는 한순간에 새파랗게 질렸다. 더미의 약점을 가지고 몇 달 전에는 그가 이문식과 더미들을 협박했지만, 이제는 이문식이 더미를 이용하여 그를 협박한 것이다. 이 역시 아이큐 천재와 명문고 출신 수재의 차이였다.

검찰로부터 기각 통지를 받은 인채가 경찰청 본부 건물 안에 있는 곤잘레스 총경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곤잘레스는 그를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맞았다.

“고모부! 새 변호사를 선임해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니 제 아내가 맡겨둔 70만 페소를 돌려주시오!”

인채의 단호한 말투에 곤잘레스가 움찔했지만 이내 거만하고 거친 태도로 돌변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 돈은 이미 다 쓰고 없어!”

“돈을 다 쓰다니요? ……도대체 어디에 썼단 말입니까?”

인채의 집요함에 곤잘레스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나서 입을 열었다. 짜증이 그의 얼굴에 잔뜩 올라 있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이번에 무혐의 처분 받았고, 항소도 기각되었잖아. 그게 다 내가 뒤에서 돈을 쓰면서 힘써 준 덕분에 그리 된 거라고!”

곤잘레스는 시치미를 뚝 떼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표정으로, 넉장거리라도 하려는 듯 두 팔을 크게 벌려 뒤로 젖혔더니 그가 앉은 의자가 뒤로 벌렁 나자빠질 뻔 했다. 인채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그를 똑바로 쳐다봤다.

“거짓말 마세요! 우리는 아무 죄가 없다는 것을 고모부도 처음부터 잘 알고 있었고, 내가 선임한 변호사가 반박 서류를 잘 정리해서 그리된 것이오. 또한 프리메이슨의 영향력을 차단한 것도 우리 변호사와 언론인 친구들이었어요. 그리고 고모부가 분명히 그 돈은 변호사 선임 비용이라고 말했었고, 그 돈으로 검사들에게 뇌물이든 다른 어떤 용도로도 쓰지 말라고 내가 말했었지요? 그러니 어서 돈을 돌려주시오!”

인채의 말을 듣고 있던 곤잘레스의 얼굴이 붉어지더니 갑자기 책상을 쾅 내리쳤다.

“자네 사건을 위해 다 써버리고 없다고 하지 않았나! 자네가 원하는 대로 기각됐지 않나! 그러니 내가 화내기 전에 더 이상 이 문제 거론 말고 어서 돌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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