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실화소설 ‘더미’⑦] “우리 회사 주주도, 이사회 멤버도 되고 그러나···”
[아시아엔=문종구 <필리핀 바로알기> 저자] 인채는 이 투자 건에 대해 아내와 상의했다. 마리셀은 무역과 자동차매매업에 대해 전혀 모르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남편이 안마숍 외에도 다른 사업을 해보았으면 하고 바랐기 때문이고, 같은 한국 사람들끼리 하는 사업이라면 필리핀 사람들하고 하는 사업보다는 안전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은행에는 마침 집을 마련하려고 모아 두었던 2억원 가량의 현금이 있었다. 마리셀은 투자에 대한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조건으로 찬성했다.
며칠 후 달후와 인채가 정비소 사무실에서 만났다. 이번에는 투자를 상의하기 위해서였다. 리나가 타온 커피를 마시며 인채가 말했다.
“마침 나에게 투자할 만한 자금이 있네. 지난번에 자네가 얘기했던 1억8천만원을 내가 투자하게 되는 경우 이 투자금을 보호하고 이익금을 보장받을 수 있는 장치는 뭐 없을까?”
“아, 그 부분을 염려하시는군요. 형님 입장에서야 당연하지요.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투자금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회사통장을 하나 더 만들어 드릴 테니 형님과 형수님께서 투자금에 대한 입출금을 직접 관리하십시오. 그리고 이익금을 보장하는 조치로, 제가 더미로 쓰고 있는 리나의 명의로 58%의 지분이 있는데, 그 지분 중에서 30%를 형수님 명의로 등기하겠습니다. 그러면 형수님께서 정식으로 우리 회사의 주주가 되고 이사회의 멤버도 되는 것이지요. 어떻습니까?”
“음, 그거 좋은 생각일세. 우리가 서로 믿고 일을 같이 하더라도 혹시 나중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면 곤란하니 우리가 합의한 사항들을 열거한 계약서를 쓰도록 하세. 그런데 자네도 알다시피 필리핀에서는 자네와 나의 계약은 효력이 없을 수 있으니까, 법적인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 한국 법에 따르는 것으로 하세.”
“형님, 좋은 의견이십니다. 저보다 필리핀에 오래 사셔서 저보다 많이 알고 계실 테니 계약이나 법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형님 의견을 따르겠습니다.”
4월 중순, 달후와 인채가 투자계약서에 서명하였고, 마리셀과 리나가 지분양도계약서에 서명했다. 리나는 인채와 마리셀이 공동으로 서명해야 입출금이 되는 별도의 회사통장을 개설했다. 그리고 며칠 후, 인채는 600만 페소를 블루오즈 통장에서 JD인터내셔널 통장으로 이체했다.
4월 25일, 정비소를 둘러보러 온 인채는 흐뭇한 미소를 짓고 돌아갔다. 한 달 전에 도착했던 열 대의 중고차는 도색까지 말끔하게 마치고 인근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었다. 달후와 인채가 계약하던 날 선적되었던 열 대의 차도 통관이 끝났는지 벌써 주차장에 도착해 있었다.
리나는 수입차 열 대의 대금을 지불해야 한다며 송금해야 하는 두 개의 수표를 인채의 말라떼 사무실로 보냈다. 하나의 계좌번호는 송 회장의 것이었고, 또 다른 계좌번호는 달후의 계좌였다. 한국에서 중고차를 수출하는 사람은 송 회장과 달후의 고향 친구인데 고향 친구의 은행계좌에 문제가 있어서 달후가 대신 받아 전달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거짓말이 늘면서 서서히 사기꾼으로 진화하고 있었다. 인채와 마리셀은 수표에 서명했다.
두 번째의 잔금을 제 날짜에 어김없이 받은 송 회장은 그동안 달후에게 실망했던 감정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며칠 뒤, 달후의 지시를 받은 리나가 통관비를 지불해야 한다면서 또다시 수표를 보냈고, 인채와 마리셀이 또 서명했다. 모든 것은 아귀가 딱 들어맞아 보였고, 5월 초에 송 회장이 다시 중고차 열 대를 선적했다.
1998년 5월 11일. 달후는 자꾸만 짜증이 났다. 이 날은 필리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고 있었다. 서민 출신 에스트라다 후보가 무난히 당선될 것이라고 사람들이 떠들어 대었다. 정치란 번듯한 가문에서 제대로 교육받은 엘리트들만 해야 하는 것으로 세뇌되어 있던 그는 서민 출신들이 정치판에서 나대는 것이 영 마음에 거슬렸다.
점심 식사를 하러 막 나가려는 데, 일주일 전에 차를 사 갔던 바이어가 전화를 해왔다. 차가 고장 나서 도로에 퍼져 있다는 불평과 욕을 하더라면서 리나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달후도 속으로 욕을 했다. 씨팔! 이게 도대체 벌써 몇 번째야? 보름 전부터 지금까지 열 대를 팔았는데 그 중에서 벌써 다섯 대가 고장이 났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지난번에 토미한테 데인 후로는 브로커한테 팔지 않고 직접 바이어를 상대하여 팔고 있었다. 송 회장에게는 대당 12만 페소에, 인채에게는 18만 페소에 팔고 있다고 거짓말을 해 놓고 실제로는 9만 페소의 헐값에 팔아 치웠다. 그러나 지불조건은 역시 좋지 않아서 50%의 선금에 잔금은 보름 뒤 지불날짜의 어음(Post-dated Check)을 받았다. 보증기간은 보름이었다. 이래저래 입맛을 잃어버린 그가 부산으로 국제전화를 걸었다.
“회장님, 지금 통화 괜찮습니까?”
“김 사장? 여긴 점심시간인데……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겼나?”
“아…… 식사 중이십니까? 죄송합니다. 여기는 아직 11시 반이라서. 그러면 한 시간 뒤에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아니야, 이제 막 끝났으니 괜찮아. 무슨 일인데?”
“다름이 아니라…… 3월 초에 보내주신 승합차들 있잖습니까…… 오늘 또 한 대가 고장 났다고 바이어가 화를 내고 야단입니다. 지금 수빅으로 가는 고속도로 갓길에 퍼져 있으니 우리 비용으로 견인해 가라며 악을 쓰고…… 게다가…… 저희가 잔금으로 받았던 어음은 지불 중지하라고 은행에 벌써 통지했다고 합니다. 어떡하지요?”
“아니, 김 사장! 그것은 현지에서 책임지고 있는 자네가 해결해야 할 문제잖아!”
“그게 말이죠…… 회장님. 한국에서 상태가 엉망인 차량을 보내면 이쪽에서 문제가 심각해진다는……”
“이봐! 무슨 말을 그 따위로 하는 거야! 여기에서 폐차 직전에 있는 차량을 보낸다는 것은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냐 말이야! 그러기에 돈을 투자해서 정비소도 차려 준 것이고! 시장에 내놓기 전에 우리 정비소에서 웬만한 것은 손을 본 후에 팔았던 것이 아니었어?”
“당연히 손을 보기는 했지요. 그런데 차 상태가 워낙 엉망이어서 판 후 보름도 안 되어 어느 부분에서 어떤 고장이 날지 제가 무슨 수로 알겠습니까? 우리도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그는 미간에 짜증스러운 주름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이미 차 다섯 대는 잔금 회수가 어렵게 되어 버렸단 말입니다. 그러니 회장님께 송금해 드려야 할 일정이 차질을 빚게 될 수도 있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듣기 싫어! 자네에게 맡겨놓은 일이니 자네가 알아서 처리해! 그리고 송금약속을 어겨서는 안 된다는 것 명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