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실화소설⑬] 당신의 뱀같은 사악한 마음을 내 어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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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엔=문종구 <필리핀 바로알기> 저자] 7월 초, 전세계약을 하러 50명의 계약 예정자들이 세부의 샹그릴라 호텔에 모였다. 그들은 코필개발회사에서 제공하는 3박 4일 무료 숙박권을 이용했다. 태풍 닉촐도 이들의 방문에 훼방을 놓고 싶지 않은 듯 멀리 동쪽 바다에서 대만 쪽으로 올라가며 금세 소멸해 버렸다.

호텔 체크인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은 단체로 개발현장을 답사했다. 그곳에는 희승이 미리 단지를 빙 둘러 담을 놓았고, 두 대의 불도저가 부지런히 땅을 고르도록 지시해 놓았었다. 진입로 입구에는 단지 조감도를 그린 커다란 입간판을 세워놓았다.

둘째 날에는 세부 섬 일주 여행을 했다. 노을이 은은하게 퍼질 무렵에 호텔로 돌아온 일행들은 자신들을 위해 만찬파티까지 준비한 승호와 애니카가 고마워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리고 식사와 연회가 한창일 때, 몇 차례에 걸쳐 기부금을 두둑이 받은 세부 시장이 그곳에 나타나 한국인들의 투자를 적극적으로 환영한다는 내용의 축사를 함으로써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었다.

이튿날 공항으로 이동하기 전, 회사의 대표이사인 애니카와 각 계약자들이 전세계약서에 서명했다. 그리고 계약자들은 한국에 돌아가자마자 계약금 25%를 코필개발회사의 계좌로 송금했다. 중도금 25%는 단지의 토목공사가 끝난 후, 잔금 50%는 별장 공사가 끝난 후 입주하기 직전에 지불하는 조건이었다.

당신의 뱀 같이 사악한 마음을 내 어찌 알았겠습니까.?– 카트리 발라(1901-1940)

8월 31일. 아침부터 송 회장이 달후를 찾느라 전화통에 불이 났지만 그는 외근 중이라는 핑계를 대도록 하고 받지 않았다. 휴대폰도 꺼 버렸다.

인채는 약속한 대로 정확히 오전 10시에 마리셀과 함께 정비소에 도착했다. 그는 그들에게 인사를 하면서도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았다. 사무실에 들어와 회의용 테이블에 네 사람이 자리를 잡았다. 그와 리나가 나란히 안쪽에 앉고, 인채와 마리셀이 출입구 쪽에 나란히 앉았다. 테이블 중앙에는 잘게 잘라 놓은 망고와 파인애플이 넙적한 접시에 담겨 있었다.

네 사람은 심각한 얼굴이 되어 억지로라도 미소를 떠올리지 못했다. 달후는 묵묵히 입을 다물고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고, 리나는 눈을 테이블에 고정했다. 인채와 마리셀도 입을 열지 않았다. 한참 동안 그와 인채가 숨이 막힐 듯 눈싸움을 하는 동안 서로의 마음 속에는 오기가 서리면서 분위기는 아슬아슬하여졌다.

이윽고 인채가 먼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김 사장, 지난주에 약속했던 재정보고서부터 보여주게.”

달후는 담담하고 사무적인 어조로 말해야 상대의 기를 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인채의 눈을 피하지 않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직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재확인해야 할 항목들이 몇 군데 있어서요. 다음 달 중순까지 완벽하게 준비하여 보여 드리지요.”

그의 말과 태도에 대해 인채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놀란 기색이 없었다. 그러나 분노를 참느라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구먼. 나한테는 차를 450만원에 판다고 하고선 실제로는 250만원도 안 되는 헐값에 팔고 있다면서? 나를 속인 것인가?”

“저는 450만원에 판다고 말한 적 없습니다.”

달후의 까딱하지 않는 두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음…… SEC등기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가 이번에는 비웃음이 섞인 콧방귀를 뀌었다.

“박 사장님, 수입 차 10대가 이미 마닐라에 도착했고 통관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벌써 보름 전에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런데 사장님은 대금 지불 기일을 일방적으로 연기하셨습니다. 대금과 통관비용은 언제 지불하실 건가요?”

‘어라? 이 녀석이 이제는 나를 형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박 사장이라고 부르네?’

인채는 그의 어투 변화에 약간 긴장했다. 상대가 벌써 무엇인가 단단히 각오하고 있다는 암시였다.

“지난주에 분명히 말해 두었네. 자네가 계약을 이행한 이후에 고려할 것이라고.”

“수입대금과 통관비용은 박 사장님이 우리 회사에 투자하는 금액으로 지불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불약속을 어길 경우에는 계약위반이 됩니다.”

그는 자신의 말이 상대에게 설득력이 없고 말장난으로 들릴지 몰라도 자신으로서는 상황에 맞는 적절한 대응이라고 생각했다. 잘못을 인정하기 싫을 때에는 방어보다는 공격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설사 그것이 궤변이고 비열한 짓일지라도. 그는 감춰둔 비밀을 들킨 사람처럼 두려워하면서도 야릇한 스릴을 느꼈다.

그의 적반하장식의 태도는 인채를 아연케 했다. 자신의 인내심을 시험해보자는 것인지, 그의 버르장머리 없는 말과 태도에 화가 치민 인채가 벌떡 일어났다.

“뭐라고? 내가 계약을 위반하고 있다고? 이런 망발이 어디 있나? 자네가 지금까지 나를 속이면서 계약을 위반하고 있었잖아!”

인채의 언성과 화난 표정에 옆에서 어색하게 서로를 탐색하며 과일을 먹기만 하던 마리셀과 리나의 얼굴도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러나 달후는 오히려 더 능글맞은 미소를 띠며 여전히 빈정거렸다.

“제가 해야 할 계약서 조건들은 다음 달 중순까지 해 드리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박 사장님은 당장이라도 사장님의 의무를 이행하십시오. 만약 한국의 수출업자가 클레임을 걸거나 통관지연으로 비용이 추가되면 박 사장님이 책임져야 합니다!”

“계약을 자네 멋대로 해석한다고 자네 의도대로 내가 끌려갈 것이라고 생각하나?”

“박 사장님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사장님이 원하는 대로 할 경우 저도 계약에 따라 법적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나야 이곳 다 정리해 버리고 한국 돌아가면 되지만 박 사장님은 계속 이곳에서 사업을 하셔야 하잖아요.”

“그렇다면, 깔끔하게 정리하세. 내가 투자했던 돈 돌려주고 계약 취소하세.”

“계약 취소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세요. 그러나 투자한 돈은 돌려줄 수 없습니다. 돌려줄 돈도 없고요.”

인채가 무서운 눈길로 달후를 쏘아 보았다. 숨 막히는 정적이 계속되었다. 인채의 얼굴은 화를 참느라 붉게 달아올랐다. 이에 질세라 달후의 눈은 악의로 번득거렸으며, 야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잔인한 힘의 기운이 서려 있었다. 일 년 전부터 그의 가슴 속에서는 돈에 대한 탐욕과 악이 빠르게 자라고 있었는데, 그것이 때를 만나 외부로 분출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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