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실화소설 ‘더미’ 22] 2008년 금강산 관광객 피살사건과 리먼브라더스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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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엔=문종구 <필리핀 바로알기> 저자] 2008년 7월 11일, 금강산에서 관광 중이던 한국인 아주머니를 북한군이 사살했다는 뉴스가 대대적으로 보도되는 가운데 원규는 이 상무, 손 실장과 함께 마닐라로 갔다. 원규가 두 사람의 마닐라 출장일정에 맞추어 여름휴가 계획을 잡은 것이다. 애들이 아직 학기 중이어서 원규의 아내는 이번에 동행할 수 없었다.

세 사람이 자정이 다 되어 마닐라 국제공항에 도착했더니 인채와 승대가 같이 마중 나와 있었다. 두 사람은 그세 친해졌는지 호형호제하고 있었다. 공항 주차장에서 원규는 인채와 함께 인채의 카비테 별장으로 이동했고, 이 상무와 손 실장은 승대와 함께 시내에 있는 팬패시픽 호텔로 갔다.

인채의 별장은 카비테 지역의 오차드 골프장 안에 있었다. 마닐라에서 3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어서 대기오염이 심각한 시내보다는 공기가 훨씬 깨끗했고, 해발 80미터의 높이라서 그런지 시내보다 시원했다. 18홀 정규코스가 두 개나 있고 클럽하우스 바로 옆에 스포츠 센터가 붙어 있어서 매일 골프뿐만 아니라 수영, 볼링, 테니스, 농구, 배드민턴, 탁구 등 운동하며 휴가를 보내기에는 더 없이 편리하고 좋았다. 다만 심각한 교통체증 때문에 시내까지 나가서 유흥을 즐기기에는 아주 불편했다.

인채의 별장은, 1층에는 식당과 거실 그리고 주방 옆에 가정부 방이 하나 있었고, 정원 쪽에 운전수 방이 하나 딸려 있었다. 2층에는 똑같은 구조와 크기의 방 다섯 개가 있는데 각 방마다 화장실이 있어서 손님들과 함께 지내기에 편하고 아늑했다. 인채의 가족은 마닐라 콘도에서 생활하지만 매주 주말과 공휴일에는 카비테 별장에 와서 지냈다.

“여기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인채 너는 지상낙원에서 사는구나!”

“네가 가끔 와서 그렇게 느끼는 것이지, 실제로 여기에서 살다보면 나름대로 애로사항도 많아.”

“설마! 애로사항이라는 게 뭐 있을까? 이렇게 편하고 안락해 보이는데?”

“우선, 안전문제. 여기가 마닐라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빌리지 규모는 큰데 이곳을 지키는 경비원들 숫자는 너무 적어. 그래서 빌리지 바깥에 살고 있는 극빈자들이 가끔 몰래 담을 넘어와 강도짓을 하기도 해. 그렇다고 우리 집만 무장경비를 세워서 24시간 지키게 하기에는 비용 부담이 크고. 또 다른 문제는, 믿을 만한 가정부와 운전수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아. 빈부격차가 심하다 보니 손버릇 나쁜 사람들도 많거든.”

“아, 그래?”

“일전에 내가 부산 출장 갔을 때 너의 집에서 하룻밤 잤었잖아. 난 영도에 있는 그 집이 훨씬 더 낙원 같던데.”

“우리는 가정부가 없어서 가족 모두가 직접 청소하고 관리하느라 힘이 드는데 무슨 낙원이야, 이 사람아! 하하하.”

“아니야. 가정부 두고 사는 집보다 친구들 자주 찾아오는 집이 더 낙원이야. 마닐라에서는 친구를 쉽게 사귈 수 없고, 한국에서 나를 찾아오는 친구들은 너하고 몇 명밖에 더 되냐? 친구들하고 지내는 시간은 한 달 평균 닷새도 안 되는 것 같아. 그러니 친구들 가까이에 살면서 수시로 만날 수 있는 원규 네가 진짜 부러워.”

원규는 그제야 이해가 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인채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그의 얼굴에 외로움이 서려있는 듯했고, 원규를 반기는 그의 과하다 싶었던 태도가 오버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고 차장하고는 그새 친해졌어?”

“너의 대학 후배라고 해서 자주 연락하고 지내. 그런데 직장생활은 오래할 것 같지 않아 보이더라. 돈에 대한 욕심이 많아 보이고.”

“나도 진작부터 그렇게 느끼고 있었어. 하지만 젊은이들은 좀 더 큰일을 해 보겠다는 꿈과 의지가 있는 것이 좋은 것 아닌가?”

“너는 젊은 사람들을 항상 다 좋게 보니까 그렇지.”

“왜? 너는 고 차장이 부정적으로 보여?”

“부정적으로 보인다기보다는, 고 차장의 속마음을 잘 모르겠다는 얘기야. 여러 분야에 박학다식한 것 같은데, 그다지 깊이는 없어 보이기도 하고. 같이 일하는 필리핀 사람들에 대한 험담이 조금은 지나치다 싶기도 하고.”

인채는 십여 년 전에 김달후라는 한국 청년에게 사기와 무고를 당하며 큰 곤욕을 치룬 적이 있었다. 어쩐지 고승대의 성격이 김달후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였지만 차마 근거도 없고 정리되지 않은 느낌마저 얘기하는 것은 험담일 수 있겠다 싶어서 그만두었다.

이튿날은 토요일이어서 원규를 포함한 다섯 명이 오전 10시경에 오차드 골프장에서 다시 만났다. 그리고 우연히 라커룸에서 이문식 사장과 조우했다. 이문식은 시험을 치르고 들어가야 했던 광주의 명문고를 나와 A대학을 졸업했고, 원규와 인채는 고교평준화 이후에 진학했던 평범한 고등학교 출신이다. 이문식은 혼자 운동하러 나왔노라고 했다. 노년에 접어드는 나이로 인자한 인상을 풍겼고 말과 행동이 차분했다.

이문식도 그들 일행과 합류하기로 하여 여섯 사람이 되자 세 사람씩 두 팀으로 나누었다. 이문식 사장, 이세호 상무, 고승대 차장이 첫 번째 팀이 되어 먼저 나갔고, 그 뒤를 박인채 사장, 윤원규 사장, 손길영 실장이 따랐다.

태풍 갈매기가 필리핀 동쪽 먼 해상에서 루손 섬 북부 쪽으로 접근하고 있었지만 태풍 중심과의 거리가 아직은 멀어서인지 운동을 끝마칠 때까지 먹구름만 잔뜩 끼었을 뿐 비는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다.

운동을 마친 후 모두들 시내로 나갔다. 이 상무와 손 실장은 다닐로의 초대를 받아 중국 식당으로 갔고, 한국 음식을 먹고 싶었던 원규는 인채, 승대와 함께 이문식의 아내가 운영한다는 한국식당으로 갔다. 식당의 이름은 촌스럽게도 ‘광주식당’이었다. 다닐로가 초대하지 않아 외톨이가 될 뻔했던 승대를 원규가 챙겼다.

식사를 하면서 다닐로는 승대를 다른 한국인 직원과 교체해 달라고 정중히 요구했다. 불만족스러웠던 승대의 언행에 대해서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하지만 이 상무는 승대가 주재원으로 나와 있는 기간은 무난하게 채울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도리어 다닐로에게 부탁했다. 손 실장은 다닐로와 같은 생각이었지만 이 상무의 입장을 고려하느라 조용히 있었다. 사람 좋기로 소문 나 있는 이 상무의 승대에 대한 믿음과 호의가 두텁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광주식당에서는 네 명이 삼겹살 안주에 소주를 마시며 뒤풀이를 했다. 마닐라에 들어와 사업을 시작한 지 3년째라는 이문식은 한국의 중고 자동차를 수입하여 팔고 있었다. ‘OCS 필리핀’라는 상호의 정비소도 소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필요한 말만 간단히 했을 뿐 그다지 말수가 많지 않았다. 조용한 사람은 보통 사색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지만, 인채의 눈에 비치는 이문식의 사색은 지성적인 것과는 어쩐지 어울리지가 않았다.

승대는 회사에서 관심을 기울여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면서 모래 수출과 사철沙鐵사업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러자 이문식이 귀를 바짝 세우며 눈이 갑자기 맑아졌다. 뭔가 서로 끌리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인채는 시종 시큰둥했다. 원규는 지난밤 늦게 도착한데다 골프로 피곤해서 식욕을 잃었는지, 아니면 음식 맛이 없어서인지 먹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승대의 얘기가 길어지자 의자에 앉은 채 꾸벅꾸벅 졸았다.

광주식당에서는 저녁시간 내내 그들 외에는 손님이 없어서 썰렁했다. 하지만 그들은 밤늦게까지 화기애애한 얘기꽃을 피웠다. 태풍 갈매기의 날갯짓이 마닐라에까지 바람을 몰고 오더니 자정 무렵부터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2008년 9월부터 미국의 리먼브라더스 사태의 영향으로 한국의 주식시장이 붕괴되기 시작했고 원/달러 환율이 1500원대까지 급등했다. SN그룹도 그 여파로 휘청했고 SNC에서는 연일 대책회의로 분주했다. 중국에 대규모 공단을 건설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중국경기가 하락하여 공단부지의 분양에 문제가 생길 경우 SNC뿐만 아니라 SN그룹의 뿌리가 흔들릴 수 있을 정도로 거액을 쏟아 붇고 있던 참이었다.

2008년 11월, SN그룹의 강 회장은 해외지사와 해외법인의 경비를 축소할 수 있는 방안과 적자를 내고 있는 사무실은 폐쇄할 것을 각 계열사에 지시했다. 이에 따라 SNC에서는 승대를 불러들이고 대신 과장급을 내보내기로 결정했다. 승대는 그해 12월 말까지 부산으로 돌아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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