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실화소설 ‘더미’ 21] 마닐라 심장부 말라떼 지역으로 안마숍 옮기니
[아시아엔=문종구 <필리핀 바로알기> 저자] 그 무렵 승대는 원규와 자주 연락했다. 직접 찾아가지 못하니 이메일이나 국제전화로 안부를 묻고 필리핀 생활에 대해 보고했다. 필리핀에 대한 경험과 지식이 거의 없는 원규는 그의 말만 믿고 수준 낮은 나라에서 고생하는 후배가 안쓰러웠다.
“그렇게 힘이 들면 한국으로 돌아오지 그래?”
“아니에요. 보통 외국에 파견되면 기본적으로 2년은 채워야 본사로 돌아갈 수 있어요. 그때까지는 참아야지 별 수 없어요.”
“그렇다고 마음에 들지 않은 생활을 계속 한다는 것은 시간 낭비 아닌가?”
“그렇긴 해요. 본사에서는 자꾸 필리핀의 항만 인프라 프로젝트를 개발하라고 독촉인데 그 분야는 시장이 너무 좁고 진입장벽이 높아서 가망이 없어요. 제가 사업이 될 만한 아이템을 찾기는 했지만 본사에서는 관심이 없고요. 그것은 나중에 기회 되면 말씀 드릴게요.”
SNC 본사에는 원규와 평소에 인사하고 지내는 A대학 선배들이 몇 명 있었다. 그들 중에서 이세호 상무와 손길영 실장은 원규와 대학생활을 함께 했던 선배들이어서 다른 사람들보다는 좀 더 얘기를 나누기가 편했다. 이 상무는 승대의 고등학교와 대학교 선배였고, 손 실장은 승대의 직속상관이었다.
2008년 6월 어느 날 원규는 이 상무와 손 실장을 초대하여 점심을 함께 먹으며 슬며시 승대에 대해 물어보았다.
“손 선배님. 고 차장이 필리핀 현지 법인에서 일하고 있다고 하던데, 잘 지내고 있나요?”
“고 차장 성격이 조금은 독특해서 적응하는 데에 시간이 더 걸릴 것이네.”
손 실장의 말에 이 상무가 몇 마디를 거들었다.
“해외생활이 처음이고 그 나라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도 시간이 걸릴 거야. 우리가 너무 서두르거나 지나치게 큰 기대를 하면 고 차장이 현지에 적응하는 데 더 힘들 수 있지 않을까 싶네.”
“네, 상무님!”
“윤 사장은 요즘 사업이 어때? 해외에 진출하는 것이 요즘 사업하는 사람들의 대세던데, 윤 사장도 뭔가 준비하고 있겠지?”
“제가 그런 능력이 됩니까? 저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유지하기에도 힘에 부칩니다.”
“아참! 언젠가 자네가 말했지 않은가? 마닐라에 윤 사장 고향 친구가 있다고……”
“아, 네. 있습니다.”
“그 사람을 고 차장에게 소개해줘서 도움을 받으면 좋지 싶네만.”
“그렇지 않아도 고 차장이 마닐라로 간 후에 제 친구의 연락처를 알려줬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만났다는 얘기는 못 들었습니다.”
“상무님, 고 차장이 의외로 낯을 가립니다. 소심한 면도 있고요.”
“손 실장 말이 맞아. 고 차장이 낯을 좀 가리더군. 그런 성격은 사귐을 깊게 하는 장점도 있다네. 안 그런가, 윤 사장?”
“아, 네. 그렇기도 하지요, 하하하! 제 친구한테 연락해서 고 차장을 찾아가 만나보라고 얘기하겠습니다.”
점심식사가 끝난 후 이 상무가 손 실장을 불렀다.
“손 실장, 며칠 전에 고 차장이 이메일로 보고했던 필리핀 항만분야 시장조사, 괜찮지 않았나?”
“네.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그 자료를 이상은 과장한테 보완하라고 지시했더니 이상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고 차장의 보고서는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누구라도 쉽게 얻을 수 있는 정보들뿐이고요, 사무실에 앉아서 짜깁기한 것 같다는……”
“그래?”
이 상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실망의 눈빛이 역력했다.
“그 보고서에 언급되어 있는 항만관련 정부기관과 민간 회사의 담당자들을 만났었다면 그들의 이름, 직책, 연락처를 별도로 보고하라고 어제 아침에 고 차장에게 지시했었는데 아직까지 아무런 회신이 없습니다.”
“무슨 말인지 잘 알았네. 그래도 자네 부하 직원이니 손 실장이 알아서 잘 키워봐.”
“네, 상무님!”
손 실장이 자리로 돌아가자 이 상무는 마닐라로 국제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그 시각에 원규도 마닐라로 국제전화를 걸었다.
앎이 어긋나 욕심과 뒤섞이면 사기가 된다.
윤원규는 전라도 광주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A대학을 다닐 때부터 줄곧 부산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의 고향 친구 중에는 일찍부터 필리핀에서 살고 있는 박인채가 있었다. 인채는 현지인 여자를 아내로 맞아 마닐라 남쪽 지역인 카비테에서 안마 숍을 차려 사업을 시작했다. 상호는 ‘블루오즈’라고 지었다. 어떤 업종이든 처음 시작할 때에는 모든 사업가들이 시행착오를 겪기 마련이다. 인채도 가게를 오픈한지 반년쯤 되자 몇 가지 문제점들을 발견했다.
카비테는 관광지가 아니어서 블루오즈는 현지인 고객들만 상대했다. 그런데 현지인들이 안마사들에게 주는 팁은 관광객들이 주는 팁에 비하면 형편없이 적었다. 그러니 블루오즈에서 어느 정도 경력을 쌓은 안마사들이 마닐라 시내에 있는, 팁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안마 숍으로 옮겨갔다. 블루오즈는 마닐라로 취업해 갈 안마사들의 교육과 훈련 장소가 될 뿐이었다.
그리고 안마를 자주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중산층 이상인데, 카비테 지역에는 중산층 이상의 현지인들이 그다지 많지 않았고 소규모 안마 숍들이 난립해 있었다.
몇 개월 뒤에 인채는 마닐라의 심장부인 말라떼 지역으로 안마 숍을 옮겼다. 그러자 기대했던 대로 매일 손님들로 꽉 찼다. 여행사 가이드들을 여러 명 사귀었더니 한국 관광객들이 단체로 몰려오기도 했다. 3년 동안 인채는 제법 목돈을 모았다. 하지만 그 무렵 사기꾼 김달후를 만나는 바람에 그 후 2년 동안 큰 곤욕을 치렀다.
그러다 2000년부터 사업이 번창하면서 가게를 늘렸다. 수입도 꾸준히 늘어 2007년에는 말라떼 블루오즈가 임대해 있던 3층짜리 건물을 매입하여 3개 층 전체를 안마 숍으로 운영했다.
2008년 6월, 태풍 프랭크의 영향으로 마닐라 일대에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는데 인채가 원규의 전화를 받았다.
“곧 여름 휴가철인데 마닐라 날씨는 요즘 어때?”
“여기는 지금 우기철에다가 태풍이 지나가는 중이라 비가 많이 내린다. 그래도 태풍이 예년만큼 자주 발생하지는 않아. 언제 여기 놀러 올 계획 있어?”
“응. 다음 달에 한 번 가려고. 참, 지난번에 내가 얘기했던 내 대학 후배 기억나?”
“고승대 차장? 나한테 아직 연락 안 왔어.”
“그 후배가 사귐성이 부족해서 그래. 네가 먼저 한번 연락해서 만나봐라. 사무실 주소하고 연락처는 내가 이메일로 보내줄게.”
“알았어. 그리고 네가 마닐라 오는 일정 확정되면 알려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