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실화소설 ‘더미’ 25] 바기오서 어학원 준비하던 그 사람이 돌아왔다?
[아시아엔=문종구 <필리핀 바로알기> 저자] “박 사장님, 어제 바기오에 다녀왔는데요…… 그곳에서 이상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바기오에서 어학원 사업을 준비하고 있던 이상원 사장이 인채의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말했다.
“무슨 얘기를 들으셨는데요?”
“그곳에서 꽤 잘 나가고 있는 L어학원이 있는데, 얼마 전에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찾아와서는 자기가 그 어학원의 주주니까 회계장부를 보여달라고 하더래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어떻게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주주라고 주장해요?”
“그 어학원의 더미 한 명에게 어떤 사람이 불쑥 찾아가서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던 지분 10% 중에서 1%만 팔라고 해서 10만 페소를 받고 팔았다고 하지 뭡니까.”
“그 회사 정관에 지분을 팔려면 주주우선매매권리 같은 것 없었나요?”
“있대요. 하지만 그 사람은 막무가내이고, 주주로서의 자신의 권리를 무시하면 소송하겠다고 공갈을 쳤을 뿐만 아니라, 회사의 경영인은 누구냐, 왜 외국인이 사장이냐고 따지기도 했답니다. 결국 그 사람 지분을 되사는 것으로 합의를 봤는데, 그 사람이 얼마를 요구했는지 아십니까?”
“10만 페소에 샀다면서요? 그러면 15만 페소에 되팔았나요?”
“아뇨. 처음에는 100만 페소를 요구했대요. 그러다 최종적으로 30만 페소에 합의해서 되샀다고 하네요. 더미들 관리 잘해야겠어요.”
이상원은 앞으로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면 더미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많은 눈치였다.
“주주들의 이름과 주소는 SEC에 문의하면 누구라도 열람할 수 있으니, 만약에 나쁜 의도를 가진 사람이 조직적으로 교민들 회사의 더미들에게 접근하여 회유한다면 피해자가 속출할 것입니다. 그런 나쁜 짓을 사업으로 생각하고 실행에 옮길 사람이 있을까 우려가 되고요.”
이상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인채가 문득 떠오른 것이 있어 말을 계속했다.
“이 사장님, 얼마 전에는 카비테에서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참고만 하세요. 식당을 차리려던 교민이 더미는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 쓰는 것이 낫다는 말을 어디선가 듣고는, 꽤 멀리 떨어진 다른 동네에 가서 지프니 운전수 네 사람의 TIN(Tax Identification Number; 국세청인증번호)을 돈 몇 푼 주고 알아 와서 그 사람들의 이름으로 등록했대요. 더미들의 서명은 그 교민이 대충 허위로 했고. 그러다 3년 뒤에 문제가 터졌어요. 국세청에서 그 지프니 운전수들에게 세금 신고를 누락했다는 통지를 보내는 바람에 그 식당에서 자기들의 이름으로 사업을 하고 있다는 것이 들통나버린 것입니다. 이름만 멋대로 도용한 것이 아니라 서명까지 위조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요.”
“필리핀 사람들이 가만있지 않았을 텐데요?”
“대부분의 착한 서민들은 그런 경우에도 사과한 후 세무관계 해결해주고 돈 몇 푼 집어주면 끝나는데, 그 교민은 제대로 걸렸어요. 네 사람이 변호사를 선임해서 더미방지 위반죄, 공문서 위조죄 등으로 고소하겠다고 협박을 해서, 결국 엄청난 액수의 합의금을 주었고 식당도 문을 닫았습니다.”
“만약 그런 경우에 합의가 안 되면 어떻게 됩니까?”
“필리핀 사람들은 외국인의 범죄행위에 대해 먼저 고소를 한 후에 검찰의 기소결정이 나면 곧바로 이민국에 추방요청을 합니다. 그러면 기소된 외국인은 재판이 끝날 때까지 이민국 감옥에 수감됩니다. 그 후에 추방되고요.”
인채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있던 이상원 사장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렇다면, 이런 서류를 만들면 어떻습니까? 제가 실제로 투자한 모든 금액을 밝히고, 더미들은 투자한 것이 없다, 그리고 일정 기간 동안 그들의 명의를 빌린다는 내용으로 서류를 작성하여 서명을 받아 놓으면 어떨까요?”
“이 사장님. 제 생각으로는 그것은 외국인이 더미 방지법을 의도적으로 위반했다는 증거가 될 것 같은데요. 그리고 더미 방지법 위반을 외국인이 사주했다는 증거도 되고요.”
“네…… 참, 혹시 지미 양이라는 한국 사람 아십니까?”
“지미 양? 지미 윤이라는 사기꾼은 알지만 지미 양은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 몇 살쯤 된 사람입니까?”
“환갑은 넘어 보이고요. 아내와 단 둘이 살면서 매일 골프만 치고 다니는 아주 점잖고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최근 바기오 중심가에 3층짜리 상가건물을 통째로 장기임대 하여 교민들에게 세를 놓고 있어요. 우리 어학원도 그 건물의 3층 전체를 임대하려고 합니다.”
“실제 건물 주인하고 계약한 지미 양의 회사가 어떤 회사인지 조사해 보십시오. 회사 이름만 알면 SEC(증권거래위원회)에서 그 회사의 주주명부를 열람할 수 있으니, 주주들의 면면을 확인해 보시고요. 혹시라도 그 사람에 대해 미심쩍은 부분이 발견되면 대사관에도 문의해보십시오.”
지미 양. 십 년 전에 한국에서 계획부도를 내고 필리핀으로 도주한 후 세부에서 승호를 앞세워 코필개발회사를 세우게 하여 많은 한국인들의 돈을 갈취했던 양희승이다. 그는 세부에서의 사기사건을 터뜨린 직후 마닐라로 터전을 옮겼다. 몇 년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필리핀을 관찰했다. 그리고 깨달음을 얻었다. 필리핀에서는 돈 있는 필리핀 사람들을 속이기가 쉽지 않다는 것. 하지만 돈 없는 서민들을 더미로 활용해서 돈 있는 한국인을 상대로 사기행각을 벌이기가 한국보다 수월하다는 것. 죄를 짓고도 숨어 다니기 쉽고, 잡히더라도 처벌이 쉽지 않다는 것.
깨달음의 힘으로 그는 5년 전에 마닐라에서 허름한 상가건물을 장기로 임대했다. 약간의 돈을 투자하여 리모델링을 한 후 1층은 식당과 식품점, 2, 3층은 사무실로 세를 놓았다. 주위 시세보다는 조금 저렴하되 3년 치 임대료를 일시불로 받는 조건을 달았다. 교민 사업가들은 실제 건물주인과의 임대계약이 20년인 것을 확인한 후 안심하고 양희승의 더미회사와 계약했다. 그리고 한 달 뒤 그는 자취를 감춰 버렸다.
두 달째 임대료가 밀리고 양희승하고는 연락이 닿지 않자 건물주인은 세 들어 있는 교민들에게 임대료 지불을 요구했다. 깜짝 놀란 교민들이 그제야 제대로 확인하였을 때에는 이미 늦었다. 양희승이 급조한 회사는 더미들조차 자신들이 그 회사의 주주로 등록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승호한테 데였던 희승은 더미를 활용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세입자 교민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건물주인과 새로운 계약서를 작성해야 했고 또다시 매달 임대료를 지불해야 했다.
순식간에 억대의 현금을 챙긴 양희승은 이번에는 바기오로 터전을 옮겼다. 그는 혹시 그의 이름이나 사기수법이 교민사회에 알려졌을까 우려하여 수년 동안 외부 활동을 전혀 하지 않고 아내와 단 둘이서 골프만 치며 소일했다. 이름도 지미 양이라고 소개했다. 마닐라에서 바기오로 도주하기 직전, 그의 일자 눈썹은 밀어 버리고 그 자리에 둥그스름한 눈썹을 문신으로 새겨 넣었다. 쌍꺼풀 수술도 했다. 평소의 머리 스타일인 왼쪽 가르마를 올백으로 바꿨다. 라식 수술을 하여 30년 가까이 쓰고 다니던 두터운 뿔테 안경도 벗어버렸다. 교민들 누구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고 그의 사기수법에 의한 피해사례를 얘기하는 이도 없었다.
지미 양은 2년 전부터 바기오 교민들이 많이 다니는 교회에 매주 얼굴을 내밀었다. 그의 손에는 항상 성경책이 들려 있었고 골프장에서건 교회에서건 식당에서건 그의 곁에는 언제나 순박해 보이는 그의 아내가 동행했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