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실화소설 ‘더미’ 34] 거짓말보다 솔직한 난폭함이 더 좋아보였다
[아시아엔=문종구 <필리핀 바로알기>, <자유로운 새> 저자] 승대는 원래 계획했던 것에서 약간의 변동이 있지만 멋지게 성공한 셈이어서 가슴 뻑적지근한 승리감을 맛보았다. 파블로가 지금은 까불고 있지만, 이문식이 그를 돕고 있고, 원규와 인채도 그의 수족관 속에 갇혀 있으니 더미는 하루빨리 파블로와 헬렌에게서 이문식의 애인으로 바꾸고, 그 다음 적당한 시기에 이문식의 애인도 자신의 애인으로 다시 더미를 바꾸고 나면 회사는 확실하게 독차지하게 된다.
며칠 후, 인채가 근심스러운 목소리로 원규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파블로가 이상해. 10% 지분 밖에 없는 더미가 지금 회사를 좌지우지하고 있어. 물론 그의 대녀代女 헬렌의 지분 25%까지 합치면 35%이긴 하지만…… 파블로가 이문식의 말을 듣지 않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이 모든 것이 이문식의 머리에서 나오는 것 같아.”
“나도 요즘 그렇게 의심하고 있었어. 며칠 전에 A대학 동문들한테 들은 얘기인데, 이문식은 십여 년 전에 한국에서 사기죄로 1년형을 선고받은 적이 있는 전과자라고 하더라. 사기 전과자라는 것이 동문들 사이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같은 사람들이 모르고 걸려든 거야.”
거짓말보다 솔직한 난폭함이 더 좋아 보였다.?<장 크리스토프> 로맹 롤랑(1866-1944)
그런데 승대의 수족관에서 빠져 나오는 행운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찾아왔다. 승대에게 협박을 당한 지 한 달여 후에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사건이 터졌던 것이다. M&A의 귀재로 언론에도 소개된 바 있던 SN그룹의 강 회장이 외국에까지 너무 방만하게 투자를 하였다가 급기야 SNC가 부도를 내고 법정관리를 신청한 것이다. 법정관리를 신청하던 날인 6월 24일, 모든 임원들은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SNC는 OSC와의 대리점 계약을 취소했다. 어쩐지 일이 잘 풀린다 싶더니, 아이큐 천재에게는 좋은 일이 오래도록 지속되기는 힘든가 보았다.
SNC 임원들이 칼끝에서 떨어져 나가 버렸으니 그가 칼자루를 휘둘러보아도 이제는 헛일이었다. 원규와 SNC 임원들을 가두기 위해 애써 짜놓은 수족관이 산산조각 나버렸다. 수족관을 빠져나온 원규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 그는 전전긍긍했다. 그의 천재적인 아이큐로서도 얼른 대책을 찾지 못했다. 온갖 혼란과 두려움이 그를 위협했다. 조만간 불행하고 위험한 일이 벌어진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 같았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원규에게 사과하러 가면 용서를 받을 수 있을까? 아니야, 천재가 죽을 수는 있을지언정 머리 나쁜 원규에게 사과하고 횡령한 돈을 반환할 수는 없지 않는가! 게다가 내가 SNC 임원들까지 협박할 때 사지를 부르르 떨면서 증오로 이글거리던 그 녀석의 눈빛을 생각해봐…… 아이고, 이 일을 어쩌면 좋지?
SNC의 부도 소식에 원규는 비로소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마치 묵직한 비계 덩어리처럼 명치를 꽉 메우고 있던 불안감이 확 풀려 나갔다. 코뚜레와 멍에가 일시에 벗겨진 듯 후련했다. 원규와 인채는 우선, 이 사건의 진상을 정확히 알아보기 위해 지분 인수 후 2년 반만에 처음으로 회사의 회계자료를 실사하기로 했다.
승대는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렸다. 투서협박카드가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데다가 파블로는 계속 그의 횡령금 반환을 요구하고, 경영복귀를 반대하고 있는데 한때 파블로의 오랜 친구라고 자부하고 있던 이문식은, 그 자신의 더미 파블로에 관한 한 계속 나 몰라라 하고 있었다. 파블로가 장악한 회사에서는 그의 생활비를 대 줄 수 없다 하여 경제적으로도 코너에 몰려 마음이 편하지 못하고 조마조마했다.
6월 24일, 승대는 집 밖을 나가지 않고 방구석에 음울하게 웅크리고 있었다. 마닐라를 관통하고 있는 태풍 메아리의 영향으로 그날 밤까지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특별 휴일로 선포된 마닐라는 곳곳이 허리 높이까지 침수되었고 꺾어진 종려나무 가로수들과 뿌리째 뽑힌 망고나무들이 도로를 점거하였다고 오후 뉴스가 전했다. 콘도 앞에 늘어서 있는 나무들은 벌거벗은 몸으로 차디찬 비바람을 맞고 있었다. 간헐적으로 번갯불이 위협적으로 번쩍였다.
그는 오후가 되자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밤늦게까지 벌벌 떨며 고열에 시달렸다. 칼로 자르는 듯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베란다 문틈을 비집고 들어온 차갑고 습한 강풍 때문이라고 애써 자위했다. 하지만 어쩌면 원규와 인채가 복수의 칼을 가는 소리로 듣고 불길하고 무서운 예감에 떨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튿날 몸을 추스른 승대는 부산에 있는 박만길 회장에게 국제전화를 걸었다. 횡령사건에 대해서는, 그가 회계를 잘 몰라서 실수한 부분이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윤 사장이 더미들을 앞세워 회사를 강탈하려고 해서 벌어진 일이라고 최대한 애잔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박 회장이 OSC의 지분 전체를 인수한 후 그를 직원으로 채용하여 경영을 맡겨주면 충성을 다해 박 회장을 모시겠다고 맹세했다. 그러자 박 회장이 흔쾌히 나서기로 했다.
박 회장은 그동안 필리핀 시장 진출을 위해 OSC에 은근히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평소에 원규의 사고방식과 언행이 못마땅했다. 그래서 OSC의 내부 갈등도 원규의 경영권 탈취 의도 때문에 빚어진 것이라는 승대의 설명을 더 믿었다. 단순한 사람들은 남들도 다 자기 같은 줄 안다.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것만 듣고 믿는다. 그리고 박 회장은 만일 OSC를 인수하는 것이 여의치 않더라도 동문회 회장으로서 동문들 사이의 갈등을 원만하게 해결했다는 업적을 만들고 싶은 속내도 있었다.
승대는 과연 원규가 박 회장의 제안이나 요구를 선선히 받아들일까 하는 조바심 섞인 의구심을 품었지만,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박 회장과 원규의 성격 차이 때문에 두 사람의 관계는 크게 벌어질 것으로 기대했다. 원규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승대의 편을 들어줄 것이니까.
그날 오후, 박 회장이 차나 한잔 하자고 원규를 불렀다.
원규가 약속 장소에 도착해보니 박 회장의 1년 후배들이자 원규의 선배들인 황시중 사장과 안이헌 사장이 함께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박 회장과 황 사장은 가톨릭 교인이고 안 사장은 불교 신자인데, 세 사람 모두 독실한 신앙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속물이면서 고상한 척하는 인간들이라는 얘기다.
네 사람은 안부인사와 시답잖은 얘기를 잠깐 나눈 후, 박 회장이 어개를 우쭐거리며 말했다. 그는 자기보다 재산이 적은 사람들 앞에서 돈 얘기를 꺼낼 때면 자기도 모르게 뽐내는 버릇이 있었다.
“승대가 돈이 없어서 자네의 지분을 인수할 수 없다고 하던데, 내가 승대와 자네 그리고 자네 친구의 지분을 모두 살까 하네. 인수가격은 지난번에 자네가 승대하고 합의했던 것과 같은 가격으로 했으면 하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선배님이 마닐라에 있는 OSC의 지분 전체를 인수하시겠다고요? 저는 반대하지 않습니다만, 그렇게 하신 후에 회사는 누가 꾸려나갈 것인데요? 회사 규모가 현재로서는 너무 작아서 선배님이 직접 마닐라까지 가서 경영하실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고승대를 직원으로 채용해서 맡기려고 하네.”
“네에?”
원규는 깜짝 놀라 잠시 할 말을 잃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말을 이었다.
“공금을 횡령하고 저와 동문들을 협박한 놈에게 경영을 맡긴다고요? 승대 그 놈이 저를 협박할 수 있는 카드가 사라지고 나니까 선배님께 접근한 모양인데, 승대가 똥 던진 우물을 승대하고 박 선배님이 함께 마시겠다는 것과 뭐가 다르지요? 제가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저와 SNC 임원들을 협박한 그 놈을 반드시 응징할 것입니다. 사기꾼에다 비열하기 짝이 없는 그 놈을 데리고 일하신다거나 감싸시는 경우 자칫 선배님에게도 불똥이 튈 수 있으니 조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