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실화소설 ‘더미’ 35] 프란체스코 교황 말씀에···

[아시아엔=문종구 <필리핀바로알기> <자유로운 새> 저자] 박 회장은 선배인 자기에게 조심하라고 경고하는 원규가 갑자기 싫어지고 심사가 사나워졌다. 곁에 앉아 있는 황 사장과 안 사장도 원규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았다. 박 회장이 불쾌한 낯빛을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자네 생각이 그렇다면 방금 내가 했던 제안은 취소하겠네. 그리고 자네가 승대에게 법적 책임을 묻겠다고 벼른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소송은 진흙탕 싸움이라고 하지 않는가. 이쯤에서 덮어두게.”

그러고선 박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규와는 할 얘기가 더 이상 없고 다른 바쁜 약속이 있다는 것이었다. 권위주의적인 사람들은 그의 권위가 훼손당했을 때에는 인내심을 발휘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대판 싸움질을 하거나 곧바로 자리를 떠 버리는 게 예사다. 황 사장이 그를 출입문까지 배웅했다.

자신을 초대한 박 회장이 먼저 가 버리자, 어색해서 그만 일어서려는 원규를 황 사장과 안 사장이 잠깐 할 얘기가 있다며 붙잡았다. 황 사장은 동문회 부회장이고 안 사장과 대학 동기다.

“누가 잘했든 잘못했든 동문들끼리 다툰다는 것이 소문나면 다른 대학 동문들 보기에 창피하잖아! 박 회장님과 내가 동문회를 이끌고 있는 동안에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돼!”

“동문회 내에서 잘못을 시정하는 자정 능력이 있어야 동문회의 명예가 높아집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오히려 남들이 비웃지요. 그런데 동문회에서 그런 노력이라도 해보셨나요? 그리고, 잘못한 놈을 응징하는 것이 다른 대학 동문들 보기에 창피하다고요? 한국의 범죄자들을 응징하는 것이 다른 나라 보기에 창피하다면 한국에 있는 모든 감옥과 법정을 없애라고 하세요. 죄인들 잡아들이지도 처벌하지도 말라고 하세요. 이웃 나라 보기에 창피하니까요.”

“어허! 그런 말이 아니라, 우리 동문들은 선후배들이 일사분란하게 단결과 화합이 잘되는 것으로 평판이 자자하잖아.”

“황 선배님, 저는 일사분란하다는 단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꼭 무슨 벽돌공장의 벽돌을 연상시키거든요. 벽돌로도 건물을 쌓을 수 있지만 자연석으로 쌓은 건물을 더 좋아합니다. 각자 크기가 다르고 색깔이 다르지만 조화롭게 쌓아 놓으면 벽돌로 쌓은 것보다 훨씬 튼튼하고 아름답습니다.”

황 사장 곁에 앉아 있던 안 사장이 날 선 눈빛으로 원규를 다그쳤다.

“윤 사장,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인간적으로 봐 줘 버리게. 자네 고집대로 하면 우리 동문사회가 시끄러워져.”

“안 됩니다! 인간적으로 봐 주라는 말씀은 악을 허용해주고 잘못을 그냥 덮으라는 것 아닙니까! 그것은 선을 향한 동정심이 아니라 악을 향한 동정심입니다. 한 달 전에도 박 회장님이 마닐라까지 일부러 저하고 함께 가서는, 잘못한 승대를 나무라기는커녕 피해자인 저에게 양보를 권하셨지요. 그때 제가 양보했습니다. 그래서 나아진 게 있나요? 승대에게 그것이 저의 약점이라는 것만 더 확실하게 알려주었을 뿐입니다. 저와 SNC 임원들은 더 악랄한 협박 속에 시달렸을 뿐입니다. 사람들이 다니는 길에 똥이 나뭇잎에 덮여 있습니다. 제가 모르고 밟았지요. 그런데 그것을 그냥 다시 덮어 놓으면 또 다른 재수 없는 사람들이 그 똥을 밟게 됩니다! 저는 그 똥을 들어내어 똥통으로 옮겨야겠습니다! 똥은 똥통에 있어야지 길 한복판에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원규가 황 사장과 안 사장을 번갈아 쳐다보며 승대를 응징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자, 황 사장은 심기가 몹시 불편해져서 에잇! 하며 고개를 돌렸고 안 사장이 또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카랑했고 부릅뜬 두 눈으로 원규를 노려보았다.

“똥을 치울 때 자네 몸에서 똥 냄새가 나는 것은 어떻게 할 텐가! 자네하고 승대가 서로 똥물을 튀기고 다닐 텐가!”

안 사장이 말끝에 코웃음을 치자 원규는 얼핏 냉소를 떠올렸다.

“승대는 똥 자체이고 저는 똥을 밟은 피해자입니다. 똑같이 취급하지 마십시오. 재수 없이 이런 상황이 되긴 했지만 똥을 치우는 수고로움과 어쩔 수없이 풍기는 똥냄새는 감내하겠습니다.”

“자네는 똥 싼 적 없어? 내가 듣기로는 자네도 술집에서 여자들 데리고 2차 나가고 그렇다던데!”

“선배님! 본질을 흐리지 마십시오. 지금 우리가 불륜 문제를 거론하는 것이라면 저는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남녀 간의 사적인 문제를 얘기하는 자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승대의 공금횡령과 동문들에 대한 공갈협박을 얘기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자 이번에는 황 사장이 손을 저어 원규의 말을 묵살하는 태도를 취하고 나서, 상관이 부하에게 명령하듯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

“이쯤에서 그만 용서하고 다 잊어 버려! 자네 선배로서 요구하는 것이야!”

“이쯤에서 용서하라니요? 먼저 승대에게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라고 해야 순서 아닙니까? 왜들 저에게 이러십니까?”

원규가 부당하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그들은 들을 기색이 없었다. 어떻게든 선배로서 후배의 기를 꺾고 무조건적인 양보를 받아내려는 듯 눈을 부라리며 뾰족하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윽박질렀다.

“용서와 자비는 만고의 진리야! 내 말대로 덮으라면 덮어!”

하지만 원규는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프란체스코 교황의 말이라며 서두를 뗀 후, “용서는 용서를 하는 사람의 미덕일 뿐입니다. 따라서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사람에게 용서란 있을 수 없습니다. 잘못을 회개하고 보상하려고 할 때 용서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무조건적인 용서와 자비가 만고의 진리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회개라는 단어와 참회라는 단어를 당신들 경전에서 지우세요. 지옥이라는 단어도 지우세요. 그러고 나면 제가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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