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실화소설 ‘더미’ 36] 반 고흐 “예의 따지는 사람보다 가난한 사람이 좋고 편해”

[아시아엔=문종구 <필리핀바로알기> <자유로운 새> 저자] 카페 안에는 부드러운 선율의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있었지만 그들이 앉아 있는 자리에는 예리한 칼날 같은 침묵이 흘렀다.

신앙의 가면을 쓰고 다니는 사람들은 그들의 교리들 중에 서로 상충되는, 즉 죄와 벌과 용서와 같은 부분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그때그때 달리 해석하여 적용한다. 그런 무리들 중에는 금고 속에 돈은 가득 채우지만 정작 자신의 머릿속에 채워야 할 지성은 채우지 못하고 텅텅 비어 거미줄만 쳐있는 사람들도 많다.

원규의 말에 질린 황 사장은 마땅한 대꾸를 못하고 멍청한 눈만 껌벅이며, 교황이 언제 그런 말도 했었던가? 왜 그 분이 그따위 엉터리 같은 말을……? 하고 생각했다.

황 사장은 무려 8년이라는 원규와의 나이 차이를 떠올리며 후배의 태도에 심히 불쾌해지고 있었다. 옆에 앉아 있는 안 사장이 동기생의 자존심을 세워주기 위해서라도 또다시 원규를 나무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선배의 자존심을 위해 후배를 나무라는 데에는 논리고 이치고 뭐고 필요 없다. 그저 권위로 누르면 된다. 게다가 그들은 원규보다 부자들이지 않는가!

“네가 그런 식으로 나오니까 선배들이 너를 두고 위아래가 없다, 건방지다며 싫어하는 게야!”

안 사장의 날카로운 언성에 오히려 원규는, 이 양반이 나이 든 후배 앞에서 건방을 떨고 있나, 하고 생각했다.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건방지게 압박한다는 것은 결국 그들 스스로의 한계 때문이다. 두 사람은 원규를 굴종시키고 싶어했지만 그들 마음대로 되지 않는 듯했다.

한국에는 위계질서를 따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위계란 나이, 선후배, 부의 계층, 지성의 권위에 따른 상하관계다. 그런데 천박한 사람일수록 지성의 권위는 무시하고 부의 계층으로 위계질서를 따진다. 그들은 상대가 자신보다 더 부유하고 세력이 강하면 (예를 들어 재벌친족, 인허가권을 쥔 고위 공무원, 정치인 등) 설사 나이가 더 어리더라도 상대를 깍듯이 존대하며 상대가 요구하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바닥에 긴다. 그들은 아무리 지성이 높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나이가 많고 선배라 하더라도 세력이나 재산이 없으면 하대하고 멸시한다. 그러니 이 단계에서 원규를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들은 더 설명해줘도 이해하기 어려울 뿐더러 어려운 일을 참아내는 인내력도 부족하다.

세력과 재산에 있어서 두 사람보다 변변찮은 원규가 위계질서를 비웃는 말대꾸를 함으로써 대등하고 평등하게 맞서려는 의지를 보였다. 원규도 그런 면에서는 만만찮은 상대인 듯했다. 그의 입술은 여전히 엷은 미소를 물고 있었고 자세는 꼿꼿했다. 그러나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으려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반 고흐가 이런 말을 했더군요. 내가 예의범절을 까다롭게 따지는 사람들과 잘 지내는 요령이 없다는 것은 솔직히 인정한다. 하지만 그 대신 가난하거나 양심적인 사람들과는 더 잘 지내고 있다. 앞의 사람들에게서 잃은 것을 뒤의 사람들에게서 얻고 있다. 나의 이런 성격과 태도를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문제일 것이다. 선배님. 물과 기름은 같은 액체라 해도 섞을 수 없습니다. 저와 승대가 같은 A대학동문이라 하여 억지로 섞으려 하지 마십시오.”

원규는 두 선배들이 자각하는 데 도움이 될까 하는 겸손한 마음에 지성인들의 말만 골라 몇 마디 덧붙였을 뿐인데 선배들은 자꾸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그들은 원규의 조그마한 눈매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를 보았다. 원규가 문을 닫고 나가자 그들은 인상을 잔뜩 긋고선 질시의 감정이 섞여있는 혐오를 문 쪽을 향해 내뱉었다.

“저 녀석이 하는 말은 언제나 귀에 거슬린단 말이야!”

“쥐뿔도 없는 새끼가 잘난 체하기는! 건방진 놈!”

남자의 질투심과 완고함은 일종의 고질병이다. 고질병은 아무리 용한 의사라 해도 쉽게 고치지 못한다.

A대학동문에 황시중이나 안이헌 같은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원규가 진심으로 좋아했던 선배들 중에 정종태 씨가 있었다. 그는 해상운송사업을 하는 CN그룹의 계열사에서 임원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겸손할 뿐만 아니라 고지식하고 정직한 성격이어서 모든 선후배들을 따뜻하게 존중하며 친밀하게 대했다.

어느 날, 정종태는 그의 친구 B씨가 추진하는 상가개발에 투자할 예정이라며 믿을 만하고 수익성이 높다고 하니 원규도 참여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다. B씨는 부동산 중개업자였다. 원규가 기억하기로 그것은 아직 자기 집을 마련하지 못한, 가난한 형제들이 많았던 그의 첫 번째 재테크 시도였다.

원규는 형님이 추천하시니 저도 투자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며 분양계약금 1,500만 원을 입금했다. 그런데 몇 달 뒤에 상가개발에 문제가 발생하여 B씨와 개발회사 사이에 소송이 벌어졌고 계약은 파기되었다. 나중에 정종태와 원규는 B씨로부터 계약금의 절반밖에 돌려받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무렵 CN그룹은 해체되어 법정관리를 받았고 정종태는 폐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얼마 후에 정종태가 원규에게 750만원을 송금했다. 그게 무슨 돈이냐고 원규가 물었더니, “지난번 내 친구 B씨가 너에게 절반밖에 못 돌려주었잖아. 나머지 절반은 내가 갚는 것이다.”

“아니, 형님! 그것은 제가 투자한 것이니 이익이든 손해든 제 몫입니다. 형님께 빌려드린 돈이 아닌데 왜 형님이 저한테 갚아요?”

“그래도 내가 추천해서 발생한 손해니까 도의적인 책임을 져야 해. 내가 부끄럽고 맘이 편하지 않아서 그러니 그냥 받아 둬.”

“형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형님 회사가 그 지경이 되었고 형님 건강도 안 좋으신데, 제발 그런 쓸데없는 생각 마십시오!”

그때 원규의 사업은 성장궤도에 있었고, 정종태보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원규는 다음 날 750만원을 정종태의 계좌로 이체했다.

당시 원규가 들은 소문에 의하면 정종태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은혜를 입었거나 신세를 졌던 사람들과 잘못을 했거나 서운하게 대했던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감사 인사를 했고 용서를 빌었다.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느껴서 주변 정리를 하는 모양이라며 그의 지인들이 안타까워했다. 1년 가까이 투병생활을 했으나 정종태는 끝내 암을 이겨내지 못하고 가난한 살림과 처자식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정종태의 장례식이 끝나고 며칠 뒤, 원규의 통장에 750만원이 입금되었다. 송금한 사람을 확인해보니 정종태의 부인이었다. 원규가 깜짝 놀라 전화를 했다.

“형수님, 잘못 입금하셨습니다. 돌려 드릴 테니 계좌번호 알려주세요.”

“아니에요. 애 아빠의 유언이었어요. 원규씨 돈을 대신 꼭 갚아달라고……”

이튿날 원규는 정종태의 집을 찾아가 미망인을 만났다. 가장이 다시는 못 올 곳으로 떠나버린 거실 안은 옹색하고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그녀의 얼굴은 남편의 오랜 병수발과 최근에 치룬 장례식으로 인해 보기가 민망할 정도로 초췌했다. 집에까지 찾아온 손님에 대한 예의를 갖추느라 화사한 미소를 지으려 애쓰는 그녀의 모습이 더욱 원규를 안타깝게 했다.

“형수님, 종태 형이 주신 돈 잘 받았습니다. 감사하다고 전해주십시오. 그리고 이것은 제가 아드님 학업을 위해 드리는 것이니 꼭 받아주십시오.”

초상을 도와줘서 오히려 고맙고 미안하다며 안 받으려 하는 그녀의 손에 억지로 봉투를 쥐어줬다. 무안해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에게서 원규는 정종태의 생전 모습을 발견했다. 봉투 안에는 1,000만원을 넣어두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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