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실화소설 ‘더미’ 38] 셀리그만 “판단력이 뛰어난 사람은 확실한 증거로 결정한다”

[아시아엔=문종구 <아시아엔> 필리핀 특파원, <필리핀바로알기> <자유로운 새> 저자] 승대의 폭탄선언이었다. 그가 한국으로 돌아간 후 그를 속이거나 딴 짓을 하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든 공범자들과 함께 자폭하겠다는 협박이었다. 그의 어조는 엄중했고 눈빛은 살기로 번뜩였다. 주인을 물려고 덤비는 미친개와 같은 얼굴이었다. 그 말을 들은 세 사람은 온몸이 오싹하면서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에게 쏠린 눈을 거두지도 못했고 입을 열려고 하는 이가 한 사람도 없었다.

판단력은 삶에 유용한 정보를 객관적이고 이성적으로 선별할 줄 아는 능력이다. 그래서 판단력이 뛰어난 사람은 확실한 증거를 기준으로 결정한다. 또한 증거에 오류가 있다고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했던 결정을 바꿀 능력도 있다. -마틴 셀리그만

다음 날 승대는 주식 처분 권한을 이문식에게 위임한 후 가족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돌아갔다. 이문식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회사의 지분 70%를 팔면서 억대의 현금을 챙겼는데, 한 푼 돌려주지 않고도 회사는 다시 자기 수중으로 돌아온 것이다. 승대의 마지막 협박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앞으로 대비책을 마련하면 된다. 그것이 바로 명문고를 졸업한 진짜 수재 이문식과 아이큐만 천재인 고승대의 차이였다.

승대는 부산으로 돌아간 후 이문식과 함께 계획했던 대로 주위 사람들과 A대학 동문들에게 거짓 소문을 놓기 시작했다. 원규가 무장경비를 동원하여 협박하고 회사를 강탈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빈털터리가 되어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울면서 하소연하면서 돌아다녔다. 그는 피해자의 모습으로 자신을 숨겼다. 아니 피해자로 위장했다.

“그동안 직장생활하면서 모아두었던 돈 다 쏟아부었고 적자였던 회사가 흑자로 전환되니까 갑자기 윤 사장이 나를 쫓아냈어요…… 나는 졸지에 개털이 되고 거지가 되어 마닐라 거리에 아내와 애들과 함께 나앉게 된 거에요…… 흑흑흑.”

그의 거짓말에 친척들과 지인들 그리고 일부 A대학 동문들이 혀를 내두르며 승대를 동정했다.

“아니, 그게 정말입니까? 어허! 윤 사장 그 사람이 어떻게 후배를 이용해먹고 내칠 수가 있어, 그래! 못된 인간 같으니라고! 정말 사람 속은 알 수가 없다니까! 그나저나 고 사장님, 참으로 안 되었습니다. 쯧쯧.”

꽃 주위에는 나비들이 모이고, 똥 주위에는 파리들이 모인다. 소문이 퍼지자 진위를 확인하지 않고 동조하는 얼간이들과 착한 가면을 쓴 양비론자들이 승대 곁에 모였다. 양비론자들이 실제로 하는 짓은 불행에 처한 피해가를 놀리고 장난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면서 그들은 스스로 공정하다며 묘한 쾌감을 느끼는 위선자들이다.

소문을 전해 듣고 원규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믿고 아꼈던 후배에게 배신당하고 협박당하는 것처럼 가슴 아픈 일이 있을까? 그런데 이번에는 그를 가해자로 둔갑시키고 있었다. 원규가 오히려 사기꾼, 협박범, 강탈자로 매도당하고 있었다. 원규는 승대를 업무상 횡령죄로 부산지방검찰에 고소함으로써 응징에 나섰다.

2011년 9월, 이문식의 각본대로 심종하가 승대의 지분 25%를 인수했다며 OSC 사무실에 나타났다. 종하는 이문식의 A대학 동기생이다. 그가 이문식의 제안을 받고 나서 망설이고 있을 때 몇몇 동기생들이 만류했었다.

“문식이 그 녀석은 안 그런 척하면서 못된 짓만 저지르고는, 자신은 미리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는 여간 간사한 놈이 아니야. 조심해!”

하지만 독실한 기독교인인 그는 신의 계시를 받았다며 돈을 들고 마닐라로 들어갔다.

한편 부산에 있던 승대는 경찰서에 출두해서 조사받으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그 동네에서 터줏대감 노릇을 하고 있는 처갓집에서 걱정하지 말라고 하니 애써 웃고 다녔다.

11월 말, 그는 처삼촌이 불러서 경찰서 인근에 있는 스크린 골프장으로 갔다. 그곳에 도착하니 처삼촌과 세 사람의 사내들이 벌써부터 공을 치고 있었다. 화면을 보니 5번 홀이었다.

“고 서방, 이리 와 앉게! 자, 잠깐 쉬면서 인사부터 합시다! 이쪽은 아까 얘기했던 내 조카사위 고승대 사장, 이쪽은 임영길 형사, 임성일 형사 그리고 김달후씨.”

처삼촌의 소개로 승대와 세 사람이 서로 통성명을 했다. 임씨 성을 가진 두 명의 형사들은 처가와 같은 집안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처삼촌은 임성일 형사만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고 나머지 두 사람은 임성일 형사가 초대했다고 했다. 임 형사가 건들거리면서 말했다.

“고 사장님의 사건이 10여 년 전에 필리핀에서 발생했던 김달후 사장님 건과 유사해서 제가 이 두 분을 오시라 했습니다. 말씀을 들어보면 참고가 될 것입니다.”

그러자 달후가 나섰다.

“안녕하십니까? 저도 필리핀에서 사업을 하다 그곳 사기꾼들한테 걸려 홀랑 털리고 들어왔는데, 오히려 한국에서 고소를 당했었거든요. 그때 여기 계신 두 분 형사님들께서 잘 해결해 주셨습니다.”

“아, 그래요! 필리핀에서 무슨 사업을 하셨는데요?”

“한국의 중고차량을 수입해서 팔았고, 정비소도 운영했었어요.”

“네에? 저하고 똑같은 사업을 하셨네요!”

승대의 눈이 번쩍 뜨이면서 호기심으로 탄성을 질렀다.

“저도 고 사장님의 사업이 저와 유사했고, 또 지금 당하신 사건도 저와 흡사하다는 말을 조금 전에 임 형사님과 처삼촌 되시는 분에게서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니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안 그렇습니까? 하하하!”

달후가 좌중을 둘러보며 웃자 처삼촌과 두 형사들도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날 밤, 승대는 달후와 형사들로부터 경찰과 검찰 조사에 임하는 방법들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달후를 통해 박인채 얘기를 듣고는 세상 참 좁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나이도 엇비슷한 달후와 승대는 예부터 서로 잘 알고 지내던 사람인 듯 생각되어졌다. 그들은 식당과 술집으로 옮겨가며 한껏 주적댔다.

그날 승대는 처삼촌에게 빌린 돈으로 골프비와 밥값, 술값을 지불했다.

일행과 헤어진 그는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여기저기 취업할 곳을 알아보고는 있지만 벌써 여섯 달째 수입이 없는 상태다. 매일 생활비를 보채는 아내 얼굴이 보기 싫어져서 귀가를 서두르지 않고 밤거리를 허정허정 걸었다. 메마른 초겨울의 바람은 예상보다 훨씬 차고 매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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