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실화소설 ‘더미’ 29] “눈먼 고수식 사업 90%는 가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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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엔=문종구 <필리핀 바로알기> 저자] 인채는 “필리핀 업자들은 모르고 한국 사람들만 아는 ‘눈먼 고수익 사업’이라는 것은 90% 이상 사기입니다”라고 말하려다 그냥 삼켜 버렸다. 눈치 빠른 사람은 그 말을 듣고서, 그럼 자기를 사기꾼으로 생각하느냐고 따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임선학은 자신감 넘치는 호탕한 웃음을 던지며 말했다.

“하하하! 그 점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사철에 대해서는 들으셨는지요?”

“물론입니다. 큰 강의 중/상류에 철광석이 매장되어 있는 산이 있다면 강 하류에 있는 모래에는 철성분이 섞여 있고 그것을 사철이라고 하지요. 강과 바다는 국가 소유입니다. 당연히 모래와 사철도 국가 소유고요. 강이나 해변 준설을 미끼로 필리핀 지방정부와 사철 채취 및 판매 계약을 하는 업자들이 더러 있는데, 주인이 없는 화물이어서 그런지 수출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물량이 모아지고 나면 갑자기 소유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나 단체들이 불쑥 나타나곤 합니다. 누가 언제 어떻게 달려들지, 그들이 어떤 요구를 할지 미리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처음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비용이 많이 들어 수익이 대폭 감소하거나, 손해가 발생할 수도 있고, 수출 자체가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프로젝트를 추진했던 사람들은 사기꾼으로 몰리게 됩니다.”

인채는 무심코 사기꾼이라는 민감한 단어를 내뱉고서 흠칫하며 임선학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사기 칠 의도가 전혀 없이 진정으로 그 사업의 성공을 믿고 추진하는 사람이거나, 고단수 사기꾼이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라고 인채는 생각했다.

“말씀 감사합니다. 저도 그런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하고 일하는 현지 파트너는 정말 믿을만한 정부 고위관리이고, 저보다 더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박 사장님께서도 맘이 바뀌면 언제든지 연락 주십시오. 저는 사장님의 인상이 좋으시고, 또 제가 존경하는 고승대 사장님과 동업 파트너라고 하시니 더욱 믿음이 가서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광산업에 관심이 없어요. 행운을 빕니다.”

또다시 몇 개월이 흘렀다. 원규와 인채는 자기들 소유의 회사경영에 몰두해서인지 아니면 승대를 너무 믿어서인지, 그가 회계 보고를 하지 못하는 핑계를 댈 때마다 그냥 넘어갔다. 승대는 속으로 비웃었다.

불쌍한 녀석들! 저 녀석들은 나를 너무 믿고 있어. 아니면, 나를 너무 쉽고 가볍게 생각하는 것인가? 어리석은 병신새끼들!

회사의 직원들은 날이 갈수록 승대를 어려워하고 피했지만 그는 왕에게 복종하는 신하들의 자연스러운 태도로 보았다. 왕들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권력을 갖는다는 것이 이런 기쁨인가? 승대는 자기 앞에서 쩔쩔매는 직원들 앞에서 왕처럼 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매일 매일 거만하고 행복하게 권위를 즐겼다. 질주해 오는 듯한 성공과 환의의 느낌을 걷잡지 못했다. 더미이자 OSC의 부사장인 파블로가 보낸 한 통의 이메일이 날아들기 전까지.

사람들은 자기가 잘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는 동시에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잘한다. 거짓말을 잘하거나 남에게 자기의 실제 이미지를 속이기 위한 허례허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사기도 잘 친다.

2011년 5월 초, 태풍 에이리가 필리핀 북부를 강타하면서 35명의 사망자를 내고 대만 쪽으로 이동했다.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지만, 자연재해가 발생할 때마다 희생자들은 거의 모두 극빈자들이어서 필리핀 국민들은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자기 땅이 없는 극빈자들은 사유지에 집을 지을 수 없기 때문에 강가나 다리 밑, 해안가 등 정부 땅에 허름한 초가집이나 판잣집을 지어서 산다.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필리핀 정부로서도 따로 이주 대책을 세워주지 못해 무작정 쫓아내지 못한다. 쫓아내봐야 갈 곳 없는 그들은 며칠 후 다시 그곳에 몰려든다. 태풍이나 홍수가 닥치면 그런 사람들만 휩쓸려가서 언론에 보도가 되고, 조금이라도 견딜만한 사유재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러한 극빈자들의 불행을 보고도 어찌할 수 없다며 체념해 버린다.

태풍이 멀어지자 며칠 동안 내리던 비가 그치고, 구름이 걷힌 사이로 얼굴을 내민 열대의 태양이 마닐라를 이글거리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5월 12일), 동업자들과 회사를 뒤흔든 한 통의 이메일 투서가 박인채와 이문식에게 들어갔다.

더미 파블로는 투서에서 지난 2년 동안 승대가 저지른 회사 직원들에 대한 인권유린과 모욕행위, 공금횡령 등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고 승대의 경영행위는 필리핀 법을 위반하는 것이니 그의 경영권을 박탈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깜짝 놀란 인채가 승대와 이문식을 급히 불렀다. 그가 투서를 보여주자 승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문식도 놀란 표정이었지만 잠자코 앉아 있었다. 주눅이 들만큼 바짝 긴장한 승대는 그제야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러나 후회는 극히 잠시뿐이었다. 위험할 땐 오히려 더욱 당당하게 나가는 것이 안전하다는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저질러진 잘못을 어떻게든 되돌리려고 애를 쓰기는커녕 오히려 분노했다.

“박 사장님 그리고 이 선배님! 아니 더미가 감히 주인 등에 칼을 들이댔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이래도 되는 겁니까?”

이문식은 사실 여부에는 관심이 없는 듯, 파블로가 왜 그런 이메일을 보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만 말했다. 승대가 잘못을 시인하지 않고 이문식이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자, 인채는 사안의 심각성을 원규에게 알렸다.

회사에서 승대의 비리 의혹에 대한 조사를 했더니 모두가 사실로 밝혀졌다. 승대는 변명꺼리를 쉽게 찾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신문과 방송에서 흔하게 보듯이 재벌 회장들은 직원들 인권유린도 하고 회사공금을 횡령도 하고 그러지 않던가! 미래의 재벌회장을 꿈꾸어 왔던 그는 재벌회장들이 어떻게 재산을 불려 왔는지 오래전에 이미 나름대로 분석을 해 두고 있었는데, 그의 분석 결과에 의하면 경영자의 비리는 관례여서 비난할 수는 있을지언정 책임지라고 요구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급히 부산에서 마닐라로 날아온 원규는 인채와 상의한 후 동업자 회의를 요구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원규는 사업을 처음 시작하는 승대가 경험이 부족해서 그런 잘못을 저지른 줄로 생각했다. 잘 얘기해서 타이르면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 것이라고 생각했다. 회의실에는 블라인드 커튼 사이로 한낮의 뜨거운 태양빛이 동업자들의 허락도 없이 들어와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원규는 승대에게 세 가지를 요구했다. 첫째. 잘못을 인정할 것. 둘째. 횡령액을 회사에 반납할 것. 셋째. 재발방지 약속을 할 것.

승대는 잘못을 인정하라고 다그치는 원규가 경영권을 빼앗으려는 속셈이라고 의심했다. 잘못을 인정했으니 경영에서 물러나라고 하면 할 말이 없게 된다. 만일 경영권을 다시 보장해 준다고 하더라도, 첫째와 셋째는 말로 하는 것이니 거짓 인정하고 거짓 약속을 해주면 되겠지만 두 번째의 돈 문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가 눈을 치켜떴다. 불안한 마음을 숨기기 위해 애를 쓰다 보니 어투가 거칠어졌고, 목소리가 떨렸으며, 말이 빨라졌고 톤이 높아졌다.

“경영을 나에게 위임하기로 약속하였잖소! 경영하는 사람에게 그 정도 자유재량권도 없다면 어떻게 회사를 경영한다는 말이오? 그리고 약속한 시점이 되면 배당해 줄 테니 내가 밥을 하든 죽을 쑤든 간섭하지 마시오!”

‘당신이 경영이 뭔지 알기나 해?’ 하고 맘속으로 빈정거렸다. 그랬더니 갑자기 이문식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의 목에 핏대가 솟았다.

“고 사장 말이 맞소! 계약서에 고 사장이 단독으로 경영한다고 되어 있으니, 고 사장이 직원들을 어떻게 관리하든지 회사 돈을 어떻게 쓰든지 그것은 고 사장의 재량권이요. 우리는 배당만 받으면 되는 것이니까, 고 사장은 잘못이 없소!”

원규와 인채는 승대와 이 사장의 반응에 적잖이 당황해서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 왜냐하면 승대의 거짓말도 거짓말이려니와 그를 편드는 이문식의 속셈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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