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실화소설 ‘더미’ 31] 그녀 눈동자엔 악마의 대담성과 마녀의 음흉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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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엔=문종구 <필리핀 바로알기> <자유로운 새> 저자] 승대의 비리가 폭로된 후 며칠 동안 동업자 네 사람은 매일 만났다. 원규와 인채는 승대가 잘못을 인정하고 다시는 그러한 일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약속을 얻어내려 하였다. 그러나 자기 아이큐와 이문식의 지원을 믿은 승대는 날이 갈수록 더욱 더 오만해져 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많은 거짓말만 지어냈다.

처음에 승대는,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원규와 인채에게 간파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집요하게 우겨댔다. 그런데 자꾸 그러다보니, 그의 뇌리에는 처음 거짓말이었던 것이 차차 사실인 듯 생각되게 되었고, 잠시 뒤에는 사실이어야 마땅한 이유가 되더니 좀 더 지나자 모든 거짓말들이 더 이상 거짓이 아니라 사실로 굳어졌다. 게다가 몇 차례의 격렬한 언쟁을 나누다보니 어느 새 두 사람에 대해 거의 개인적 차원의 반감이 그의 가슴에 가득 찼다.

한편, 원규와 인채는 승대가 10대 1의 비율로 거짓과 사실을 교묘하게 뒤섞는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치를 떨었다. 사람을 잘못 봤다는 깨달음에 그들은 당황했고, 고통스러워했다. 그들의 말싸움에서 승대 뒤에 한 걸음 물러 서 있는 이문식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며칠 후, 이제 더 이상 승대를 신뢰할 수 없으니 횡령액을 회사에 반납하더라도 그의 단독경영을 허용할 수 없다고 원규가 선언했다. 이문식의 더미인 파블로가 연일 승대의 경영권을 인정할 수 없다고 떠들고 있을 때였는데, 이상하게도 이문식의 더미는 이문식과 엇박자를 내고 있었다. 이문식과 파블로의 계략을 알지 못하는 원규와 인채는 의아했다. 더미와 실제 오너 사이에 문제가 생긴 것일까?

상식적으로 고승대의 행위가 명백한 불법이니까 아무리 더미라 하더라도 실제 오너인 이문식의 의견과 상관없이 상식적인 자기 의견을 내놓고 있는 것일까? 비리를 폭로한 책임의식 때문일까?

원규의 선언을 접한 날 저녁, 승대가 그의 손위 처남 임기택과 상의했다. 기택은 Y그룹의 두바이 주재원으로 일하고 있었고 원규의 대학 동기였다. 즉, 임기택은 승대의 처남이자 A대학 선배이기도 했다. 그런데 처남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매제, 잘 들어! 원규는 자기가 한번 옳다고 믿으면 어지간해서 마음을 바꾸지 않는 성격이다. 지금 너한테 요구하는 것이 정당하다면 나뿐만 아니라 우리 동기생들 모두가 나선다 해도 그 새끼의 마음을 돌릴 수 없어. 그러니까 네가 그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싸우는 수밖에 없어. 싸움에는 선제공격이 중요하다는 것은 너도 잘 알지? 내가 여동생한테 얘기를 들어보니 너는 재벌이 되고 싶은 욕망도 있고 야심도 강해. 하지만 그것을 밀어붙일 결단력이 부족해! 그리고 욕망과 야심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독기와 사악한 마음이 턱없이 부족하다 이 말이야!”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어제 밤에 원규가 나한테 메일을 보내왔다. 내용인즉슨, 네가 공금횡령을 하였는데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있으니 너를 꾸짖어 다시는 그런 짓 못하게 충고해달라는 게야. 그 메일을 너한테 보낼 테니 적당한 시기에 원규 그 새끼를 명예훼손죄로 고소해버려! 감히 우리 임씨 집안을 무시하고 충고하려 들어, 이 새끼가!”

“네, 고소장 준비하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승대가 곁에서 그들의 통화를 듣고 있던 아내를 쳐다봤다. 그녀의 눈빛도 자만에 차 있지만 우유부단한 남편을 호되게 질타하고 있었다. 달콤한 젖줄의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맥베스의 아내처럼, 그녀의 눈동자에는 악마의 대담성과 마녀의 음흉함이 뒤엉켜 있었다.

그녀는 여태까지 주위의 친구들보다는 일찍 사장이 된 남편 덕에, 사모님이라고 불리며 뻐기고 다녔다. OSC의 법인카드를 멋대로 쓰고 다녀 친구들의 부러움과 질시를 한 몸에 받았다.

아내의 얼굴 한복판에서 표독이 떠올랐지만 그의 눈에는 아름다움으로 보였다. 처남과 아내의 질타에 힘을 얻은 그는 원규에게 맞서기로 결심했다. 그의 아이큐는 원규의 약점을 이용하여 협박하는 비열한 카드를 쓰기로 작정했다.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면 소송도 불사하는 원규의 무식하고 저돌적인 성격에 대비하여 승대 명의로 된 재산은 모두 아내 명의로 돌려놓았으니 뒤탈도 걱정 없었다. 위기에 대한 해결책을 준비해 놓고 있었던 자신의 천재성에 어느덧 스스로 경의가 표해졌다. 양심을 잃는 것보다 재산을 잃는 것을 더 두려워하고 있었던 승대는 탐욕과 악의에 가득 찬 막장 인생의 날을 바짝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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