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실화소설 ‘더미’ 32] “내 문제 안 덮으면 밀약 합의문 폭로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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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엔=문종구 <필리핀 바로알기> <자유로운 새> 저자] 다음 날, 승대가 원규와 단 둘이 마주 앉았다. 원규를 노려보는 그의 눈빛은 칼날같이 예리했고, 잔혹한 맹수가 먹잇감을 한입에 씹어 먹으려는 듯했다. 그가 마침내 가슴 속 깊숙이 숨겨두었던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이 무기에 겁을 집어 먹게 되는 순간 원규는 그의 낚시 바늘에 꿰이게 되는 것이다.

“내 문제를 덮어주지 않으면 SN그룹 윤리위원회에 당신과 일부 임원과의 밀약에 관한 합의문을 폭로하겠소. 그러면 당신 회사와 SNP, OSC와 SNC와의 거래는 중단될 것이오.”

“헉!……뭐, 뭐라고? 밀약이라니?”

그가 예상 했던 대로 원규는 그 순간 기겁했다. 얼마나 놀라고 흥분했는지 말까지 더듬었다.

“우리가 서명했던 비밀합의문 말이요.”

“그것은 우리 동업자들끼리 내부적으로 만든 것이지 어째서 그것이 SN그룹 임원과의 밀약이야?”

“그런 건 내가 알 바 아니고, 그 합의문 안에 SN그룹 임원에게 커미션 주기로 한 게 있잖느냐 말이오.”

“그것은 우리 동업자들끼리 그렇게 하자고 합의했던 것이잖아! 언제 그쪽 임원들이 우리한테 커미션 달라고 한 적 있어? 그동안 우리가 누구에게 커미션 준 적이 있어? 네가 그 짓하면 너를 아끼는 이세호 상무가 제일 먼저 다치는데! 왜 네가 잘못한 일을 가지고 무고한 사람들의 인생을 망치려고 그래!”

하지만 그의 눈초리는 더욱 대담해졌고, 흥- 하는 코웃음소리까지 내면서 노골적으로 원규를 비웃었다. 얼굴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는 원규를 향해 빈정거리는 어투로 말했다.

“나는 누구 인생이 엿 되는 말든, 그 사람이 잘못이 있든 없든 상관 안 해요! 당신이 계속 나를 몰아붙이면 나를 횡령죄로 고소할 수 있을지 몰라도 당신 사업도 좆 되고, SN그룹 내에서 여러 사람 옷 벗어야 할 것인데? 다 함께 죽는 것보다 이 문제를 덮어 원상복귀 시켜주면 좋지 않나요? 나 하나 잡겠다고 몇 사람의 장래와 당신의 사업 전체를 걸기에는 내 몸값이 좀 비싸지 않소?”

전혀 예상치 못한 그의 협박에 원규는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머리에서 화염이 솟구쳐 올랐다. 원규의 피는 끓어올랐고 눈빛은 증오로 가득 찼다.

SN그룹에는 윤리위원회라는 것이 있어서 회사 임직원들의 비리에 대한 투서가 들어오면 관련 임직원들은 조사를 받는 동안 보직에서 해임되는 것이 이제까지의 관례였다. 그렇기 때문에 승대가 투서를 하게 되면 투서 내용의 사실여부와 상관없이 이 상무는 무조건 보직에서 해임되면서 조사를 받게 될 것이다. 어쩌면 손 실장과 김석희 대표이사에게도 불똥이 튈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 누군가 혹은 그들 모두가 해고당할 수도 있다.

나중에 원규의 얘기를 들은 인채의 얼굴도 한순간에 해쓱해졌다. 도둑놈이 오히려 몽둥이를 들고 날뛰는 식의 태도가 10년 전의 사기꾼 김달후와 꼭 닮았기 때문이다.

부산으로 돌아온 원규는 세상이 온통 어둡게 느껴지면서 회사에서나 집에서나 우울한 신음소리를 내곤 했다. 철석같이 믿었던 후배에게 감쪽같이 속은 데다 적반하장식의 협박까지 당하고 나니 그에게 상냥하게 다가오는 모든 주위사람들이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의 가족과 친구들은 평소에는 유쾌하고 자신만만하던 그가 마닐라를 다녀온 후부터 부쩍 말수가 줄어들고 멍하니 앉아 깊은 생각에 젖어있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되자 영문을 몰라 걱정했다.

승대는 먹구름이 잔뜩 낀 얼굴을 하고서 흥분하여 말까지 더듬거리던 원규를 생각하면 가소롭고 불쌍하기까지 했다. 그 불쌍한 얼굴이 그 녀석의 나약함과 두려움을 남김없이 나타내었다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 후 며칠간 원규로부터 연락이 뚝 끊겼다. 횡령 문제를 해결하라는 독촉도 없었다. 투서협박이 먹혀들었다고 생각하자 흐뭇하고 느긋해졌다. 아이큐 낮은 놈이 이제야 현실을 제대로 깨달은 모양이었다. 천재가 달리 천재이겠는가! 천재를 상대로 하여 싸우는 대가가 무엇인지 뼈저리게 느꼈을 터였다. 그는 똑똑한 자신이 너무나 자랑스러워 혼자 킬킬거리고 웃었다.

이거, 일이 너무 쉽게 풀려서 실감이 안 나는데…… 앞으로는 더 노골적으로 회사 돈을 내 돈처럼 쓰고 다녀도 될 것이다. 이토록 수월한 것을…… 으흐흐흐.

그동안 경리에게 돈을 가져오라고 할 때마다 꺼림칙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원규의 약점을 쥐고 있는 한, 회사는 승대의 개인 회사인 것이고 회사 안에서 왕처럼 행동하는 데 있어서 그 누구의 간섭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우선 자신의 등에 칼을 꽂은 파블로와 헬렌을 회사에서 내쫓고 서둘러 다른 더미를 찾아야 했다. 인채가 대질조사를 할 때 그에게 섭섭한 진술을 했던 직원들도 경중을 따져가며 불이익을 줘야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수시로 사장실에 불러 그녀의 허벅지를 노골적으로 더듬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아무 불평불만이 없는 여직원 리사가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더미 지분을 리사에게 옮기고 그녀와 은밀하게 즐길 원룸을 회사 비용으로 빨리 하나 마련해야겠다, 고 마음먹었다.

탐욕의 심장에 덕지덕지 붙어 있던 그의 본성들이 썩은 시체의 창자에서 기어다니는 구더기처럼 스멀스멀거렸다. 그 순간 그는 지옥의 불구덩이에 떨어지는 영혼을 기다리는 악마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메일로 그의 비리를 폭로했던 파블로가 느닷없이 그의 문제를 논의하자며 정식으로 이사회 소집을 요구했다. 갑자기 그의 아이큐가 혼란을 일으켰다. 파블로의 이메일이 단순한 해프닝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는 원규나 인채가 아니라 더미 파블로였다. 파블로가 더미가 아닌 정식 주주로서의 권한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파블로는 투서할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그의 경영이 불법이라며 반대하고 있었다.

승대는 이문식과 함께 매일 파블로를 만났지만 프리메이슨 조직의 간부인 파블로는 설득되기를 거부했다. 파블로 역시 누군가의 약점을 잡으면 어떻게 해야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는 인간처럼 보였다. 그동안 파블로를 우습게 보았다고 그는 후회했다. 하지만 파블로를 뒤에서 은밀하게 조종하는 사람이 이문식이라는 것을 그는 눈치 채지 못했다. 그의 비리를 폭로하도록 파블로를 조종하고 사주했던 사람이 바로 그의 곁에서 그를 돕고 있는 척 하고 있다는 것을 아이큐만 천재인 그는 알지 못했다.

2011년 5월 30일. 첫 이사회가 열렸다. OSC 사무실에는 이사회 멤버 다섯 사람이 모두 모였다. 승대와 마리셀은 정식 주주였고, 파블로, 마리오, 헬렌은 더미였지만 모두 등기상 주주였고 이사회 멤버였다.

이사회가 열리기 전날, 이문식이 파블로와 헬렌을 불러 이사회에서 의결할 안건에 대해 지시를 내렸다.

“내일 이사회가 열리면 미스터 고를 성토한 후 그의 경영권을 박탈하자는 안건을 올리시오. 헬렌이 파블로의 제안에 찬성하면 마리셀과 마리오도 찬성할 것이오.”

“알겠소.”

“첫 이사회가 우리 계획대로 끝나면 미스터 고는 더 길길이 날뛸 것이오. 나는 계속해서 그를 편들어주는 것처럼 할 테니까 당신들은 그 녀석과 나를 싸잡아 비난하는 태도를 취하시오. 나는 미스터 윤과 미스터 박이 당신을 뒤에서 조종한다고 말하겠소. 회사의 경영권을 탈취하기 위해 모든 음모를 뒤에서 꾸미고 있다고 미스터 고가 믿도록 만들겠소.”

그러자 파블로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 두 사람이 나를 뒤에서 조종한다고 말한다고요? 나는 그 사람들을 전혀 모르는데 설마 미스터 고가 믿을까요?”

“그것은 나한테 맡기시오. 미스터 고는 사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여자들보다 더 감정기복이 심한 얼치기 바보요. 감정조절과 상황파악을 잘 못하기 때문에 내 말을 의심하지 않고 믿을 것이오. 다음 번 이사회에서 헬렌을 사장으로 선임하고 부사장직은 당신이 계속 유지하면, 회사 지분 70%를 팔아넘기기 이전으로 되돌려 우리가 다시 경영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는 것이오.”

“알겠소. 우리는 당신이 시키는 대로 하겠소. 한국인 중에도 미스터 고처럼 미련한 사람이 있다니 놀랍소. 하하하!”

“미스터 윤과 미스터 박도 내 계획에 말려들 것이니 그들도 똑같이 미련한 자들이오. 아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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