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실화소설 ‘더미’ 30] “이쯤 되면 막 가자는 거죠?

2012-05-14_22

[아시아엔=문종구 <필리핀 바로알기> 저자] 일본의 어느 작가가 말했다. 은행가는 매일 같이 남의 돈을 다루는 중에, 남의 돈이 제 돈으로 보이게 된다고 한다. 공무원은 국민의 심부름꾼이다. 용무를 처리하기 위해 어떤 권한을 위탁한 대리인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위임된 권력을 등에 업고 매일 사무 처리를 하고 있노라면, 이것은 내가 소유하고 있는 권력이며, 실제 주인인 국민은 이에 대해 아무런 참견도 할 이유가 없는 것이라고 차츰 착각하게 된다.

원규는 경멸과 경악에 가득한 눈으로 승대와 이문식을 쏘아 보았다.

“뭐라고? 자유재량권이라고? 너한테 위임해 준 경영권이 직원들 인권유린과 공금횡령도 네 멋대로 해도 된다는 권리란 말이냐? 밥을 하던 죽을 쑤든 간섭하지 말라고? 밥을 하기로 약속했으면 밥을 해야지! 죽을 쑤고 있는 것을 보고도 가만히 있으라고? 어떻게 그런 몰상식한 말을 지껄일 수가 있어!”

이문식도 거들겠다, 이쯤 되었으니 승대는 막 가자는 태도를 보이기로 했다. 그동안 맘에도 없이 원규를 존경하는 척, 좋아하는 척했던 가면을 벗을 때가 온 것이다. 그가 눈알을 부라리며 원규에게 대들었다.

“지껄이다니? 나한테 지금 지껄인다고 했소?”

원규는 똥 싼 놈이 화를 내는 격으로 두 눈을 치켜뜨고 반항하는 승대의 발만스러운 태도에 아연했다. 귀싸대기를 후려갈기고 상판대기를 걷어차 버리고 싶은 마음이 치솟았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얼굴이 활활 달아올랐다.

“지금 네가 아무렇게나 함부로 말하고 있으니 지껄이는 것이 아니고 뭐냐! 계약서에는 분명히 신의성실의 원칙하에 투명하게 경영해야 한다고 되어 있잖아! 계약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야!”

원규의 얼굴이 분노로 인해 붉으락푸르락 하고 있는데도 승대 곁에서 이문식이 능글능글한 눈빛을 보내면서 말했다.

“계약서에는 고 사장에게 경영을 위임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경영에 간섭하고 있는 당신들이 계약을 위반한 것이지요.”

“뭐라고요? 우리가 계약을 위반했다고요?”

원규와 인채가 분연한 표정으로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승대와 이문식은 자신들이 이미 입 밖에 낸 거짓 주장을 정당화하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원규와 인채의 머릿속에 들어앉으려고 해 보았으나 아무래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의 입에 붙어 부풀고 있는 거짓말은 네 사람 사이에 어쩔 수 없는 거대한 틈을 만들고 말았다.

기왕에 선걸음이라고 생각한 승대는 내심 불안해지면서 창자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고통에 대한 참을성이 부족하고 겁이 많지만 천재성 아이큐를 품고 있는 그의 대뇌 세포들이 어느덧 스스로를 세뇌시키는 결의를 굳히고 있었다.

그 돈은 내 뱃속에 들어가 소화되어 버렸으니 이미 내 생명의 일부가 되었다. 그런데 돈을 게워 내라는 것은 내 생명을 내어 놓으라는 것 아닌가! 흥, 어림없지! 이왕 이렇게 된 것, 다행히 이문식 선배는 내 편이니까 끝까지 버텨 보자! 그러다가 정 안 되면 처남들이 살고 있는 싱가포르나 두바이로 도망가 버리자!’

그의 눈 속에서는 몇 번이나 이런 다짐이 교활한 미소와 함께 교차했다. 마음속에 끓어오르는 충동에 차츰 이끌려갔다. 그러자 그의 아이큐가 이러한 다급한 상황에서도 이미 뱉은 거짓말을 앞뒤 상황에 맞게끔 더 많은 거짓말을 수월하게 편집해 내었다. 평소에 거짓말이나 변명을 잘하거나 사기를 쳐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승대의 이런 정신상태에 대해 공감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자, 자. 일단 자리에 앉으시죠.”

승대의 목소리가 자못 공손해지자 원규와 인채는 사과를 기대하며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당신들도 잘 알다시피, 그리고 조금 전에 이 사장님도 말씀하셨듯이, 횡령이라고 보고된 항목들은 우리들이 투자계약서에 서명할 무렵에 내가 그렇게 써도 된다고 합의했던 것들입니다.”

라고 말하자, 원규는 그의 새로운 거짓말에 펄쩍 뛰며 또다시 불같이 화를 내었다.

“내가 언제 회사 돈을 아무 근거 없이 네 마음대로 써도 된다고 합의했어? 그리고 우리 계약서에는 중요한 모든 사항은 동업자들의 만장일치로 결정하기로 되어 있는데, 만일 우리가 그따위 말도 안 되는 합의를 해준 적이 있다면 증거로 제시해!”

그러자 승대는 아까보다 더 껄렁하고 시건방진 태도를 보이며 우겨댔다.

“문서로 된 증거는 없지만 분명히 그렇게 구두로 합의했었소! 당신은 기억력이 형편없어서 금세 잊어버리는지 몰라도 나는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소!”

그러자 이문식이 또 나서며 승대를 거들었다.

“고 사장 말이 맞소! 나도 그렇게 기억하고 있소!”

2년 전, 투자계약서를 작성할 때 경영자의 임금과 비용에 대해 결정하지 못하고 추후 협의하기로 했었던 계약서의 허술한 틈을 지금 승대와 이문식이 비집고 들어와 거짓 주장을 하는 것이었다. 승대와 이문식의 거짓말은 원규의 열화에 기름을 부어버린 격이 되었고, 인채는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면서 씩씩거리며 밖으로 나가 버렸다. 원규도 인채를 따라 나갔다. 두 사람이 회의실을 나가자 승대가 이문식에게 고개를 깊이 숙여 감사를 표했고 이문식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창 밖에 별안간 천둥번개가 치더니 잠시 후 스콜성 소나기가 퍼부어 내렸다.

파블로가 승대의 비리를 폭로하기 하루 전에 이문식은 파블로와 모종의 음모를 꾸몄다. 그가 승대와 함께 투자했던 임선학의 사철광산 프로젝트는 그 지역 도지사와 시장에게 사기당한 것으로 판명된 데다 한국에 돌아간 임선학도 사기죄로 고소당해 출국금지 상태이기 때문에 투자금 회수가 힘들어졌다. 기름사업도 비용만 허비했지 아무런 성과가 나오지 않았다. OSC의 지분 70%를 양도하면서 받았던 억대의 돈이 벌써 바닥을 드러냈다. 그러니 회사의 경영권을 다시 거둬들인 후 다른 투자자들을 꼬드겨 한 번 더 우려먹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한 번 써봐서 성공한 방법은 훗날 또다시 써먹어 볼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더 노련하게 더욱 진화한 방법으로.

“파블로. 그동안 모아두었던 미스터 고의 회계비리 자료들을 내일 폭로하고 그의 경영권을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시오. 나하고 미스터 박의 이메일로만 보내시오.”

“알겠소. 그 다음에는……?”

“한국인 동업자들끼리 회의를 할 것인데, 그때 미스터 고가 겁을 집어먹으면 내가 그 녀석을 보호하는 척 나설 것이오. 그러면 그 멍청한 놈은 나를 믿고 또다시 기고만장해 질게요. 미스터 고와 미스터 박의 싸움을 부추기는 것이오. 그러는 동안 당신은 계속 미스터 고를 비난하시오. 횡령액을 회사로 돌려달라고 압박하시오. 그리고 계속 미스터 고의 경영은 불법이라고 주장하시오. 그러고 나서 일주일 후에 이사회를 소집하시오.”

“이사회를요? 아직까지 한 번도 이사회를 연 적이 없는데……”

“그렇소. 앞으로는 이사회를 통해 당신과 헬렌이 경영권을 장악하는 것이오.”

“이사회 개최 전에 당신이 미리 안건과 의결사항을 말해줘야 합니다.”

“물론이오! 매달 이사회를 여시오. 당신과 헬렌의 급여는 세 번째나 네 번째 이사회에서 두 배로 인상할 것이오. 너무 급하게 처리하면 남들이 우리의 속셈을 눈치 챌 수 있으니까.”

“오케이. 나는 당신이 시키는 대로만 하겠소.”

“고맙소. 자 여기 얼마 되지 않지만 보너스라고 생각하고 받아 두시오.”

이문식이 봉투를 건네자 파블로가 히죽 웃음을 삼키며 받아 주머니 속에 쑤셔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