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실화소설 ‘더미’ 28] 시련은 오판하고 무시해서 자초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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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엔=문종구 <필리핀 바로알기> 저자]?시련은 결코 하늘이 주는 것이 아니다. 시련은 우리 스스로가 오판하고 무시했기에 자초하는 것이다.?류성룡(1542-1607)

지미 양은 5년 만에 또다시 억대의 돈을 챙긴 후, 이번에는 다바오로 터전을 옮겼다. 신사로 위장한 똥개가 이곳저곳에서 똥을 싸지르고 다니는데, 똥을 밟은 사람들이 널리 알리지 않아서, 아직 밟지 않은 사람들은 그 신사의 정체를 모른다.

이상원을 비롯한 피해 교민들이 대사관에 신고했지만 외국에서의 수사권이 없다며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한인회에서도 사기행각을 벌인 사람과 피해자 당사자들의 개인 문제로 치부했다. 지미 양의 행태에 대해 공개적으로 알려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하자는 의견에 대해서도 일부에서 인권침해 소지가 될 수 있다는 의견을 내어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공동체의 질서유지와 공공복리를 침해하는 경우에는 기본권(인권)이 제한될 수 있지만 그것은 법률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사기꾼들을 응징하거나 공동체에서 축출하려는 시도는 끊임없이 일어나지만 실패를 거듭하는 이유는, 사기꾼들의 치밀하고 영악한 두뇌보다는 피해자들과 방관자들의 소극적이고 나약한 의식구조와 진실과 정의를 외면하는 변호사들과 판사들 때문인 경우가 더 많다.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세부 상공을 지나가면서 양희승은 문득 이승호를 떠올렸다. 여태 살아 있는지, 살아 있다면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선수들끼리는 서로 멀찍이 떨어져서 사는 것이 서로에게 유리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그는 금세 승호의 기억을 지웠다.

다바오공항에 도착한 후, 한달 전에 계약했던 콘도로 이동하면서 양희승은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앞으로 이곳에서는 나를 숀이라고 불러요.”

“숀 양? 멋진 이름이네요. 그렇다면 머리 염색하지 말고 수염도 길러요. 숀 코넬리 닮은 지 한번 보게요. 호호호!”

거실에서 가방을 풀어 옷가지를 정리하고 있는데 밖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숀 양은 베란다 유리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마닐라나 바기오보다 훨씬 깨끗한 공기가 수분을 머금고 거실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숀 양과 아내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짐정리를 마저 했다. 앞으로 이곳에서 두 사람은 골프장이나 해변에서 점잖고 아늑한 휴식을 취할 계획이다. 새로운 먹잇감이 눈에 띌 때까지. 부드럽게 내리는 빗소리가 그들에게는 즐거운 음악처럼 들렸다.

2010년 12월 말경, OSC 사무실에서 인채와 승대가 언쟁을 벌였다.

“고 사장! SNC에서 보낸 부품이 현지 정비소에 제때에 전달되지 않고, 또 정품이 비품으로 바뀌어 배달되고 있는 모양인데, 어찌된 일인가?”

“아니, 누가 그따위 소리를 하고 다녀요? 그런 일 없어요!”

“마까띠에 있는 K정비소하고 파식에 있는 L정비소에서 SNC에 정식으로 불만을 제기했다는 것 아닌가! 조금 전에 SNC 최 과장하고 SN-ETRA의 이 과장이 나한테 전화를 걸어와 사실 확인을 하는데, 내가 실제적으로 경영을 안 하고 있으니 뭐라 대답을 할 수 있어야지. 빨리 확인해서 시정조치 해!”

“형님! 제가 어떻게 그 많은 부품들을 일일이 다 확인해서 배달합니까? 그 정도 능력이면 직원들 다 자르고 저 혼자 하지요.”

“내가 분명히 말해 두지만, SN조직의 업무에 대해서는 네가 책임지기로 합의했었어. 합의를 깨면 어떻게 된다는 것 몰라? 정품과 비품이 뒤섞이지 않게 관리하고 각 정비소에서 주문한 날짜에 맞추어 전달될 수 있도록 네가 최종 점검해! 어떤 실수이든 SNC로부터 지적을 받으면 네 책임이야!”

승대는 코웃음을 치더니 계속해서 퉁퉁 부은 입으로 말대답을 했다.

“제가 어떻게 모든 부품을 점검해요? 저는 경영하는 사람이라고요! 세부적인 일을 하는 직원이 아니라고요!”

“고승대! 누가 모든 일을 너 혼자서 다 하라고 했어? 직원들이 실수하지 않도록 훈련시키고 감독하는 일을 네가 해야 하는 것 아니야? 그게 경영이지 도대체 네가 생각하는 경영이라는 게 뭐야?”

“저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무척 섭섭하죠.”

“네 경영관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겠지만 나는 네가 그 정도는 해 줄 것으로 기대했으니 섭섭한 건 오히려 나야! 우리의 계약조건과 합의문을 위반하거나 네가 최선을 다하지 않아 문제가 발생하면 즉시 문제제기하고 책임추궁 할 것이니 명심해!”

“……네.”

인채가 분을 이기지 못해 혼자 씩씩거리다 자리를 뜨자 승대는 ‘에라, 엿 먹어라! 개자식아!’ 하며 속으로 그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인채는 승대와의 말다툼이 끝나자마자 원규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동안 사람을 잘못 보아온 것이 아니냐는 자조적이고 허탈한 심정도 털어놓았다. 원규는 인채의 말을 들으면서 동업을 결정하기 직전에 들었던 승대에 대한 부정적인 충고들이 기억 속에서 갑자기 떠올랐다. 인채와 통화가 끝난 후 그는 머뭇거리지 않고 승대에게 전화를 했다. 쌀쌀하고 냉정한 어조였다.

“고 사장! 방금 박 사장의 전화를 받았어. SN조직의 업무를 방치하고 있다는 게 사실이야?”

“……”

“혹시, 너…… 계약하기 전에 SNC에서 너를 거부했던 것 때문에 악감정을 품고 고의로 엿 먹이려 하는 것이냐?”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꼭 그렇지는 않다고? 그럼 일부는 그런 맘이 있다는 얘기네? 나도 분명히 말해두지만, 사내대장부로서 솔직하게 말하고 행동해! 만일 SNC 측 대리점 일을 하고 싶지 않으면 동업자 회의를 소집해서 당장 정리해! 그게 아니라면 우리가 합의한 대로 일을 똑바로 해서 그 업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박 사장이 SNC 담당자들한테 야단맞지 않도록 해!”

“……네.”

전화를 끊은 승대가 얼굴에 핏대를 올리며 중얼거렸다.

“웃기고 자빠졌네, 개새끼들!”

그즈음 승대는 이문식 사장과 부쩍 자주 만나며 어울려 다녔다. 이문식은 어선에 공급하는 기름판매에 관심이 많았고 승대는 모래에서 채취하는 철가루, 일명 사철에 관심이 많았다. 그 두 가지 사업은 원규와 인채 몰래 대박을 터트려 자기들끼리만 나눠먹기로 이미 합의해 둔 상태였다. 천재의 아이큐로 계산해보니, 그 두 가지 중에서 하나만 성공하더라도 2-3년 안에 수십억 원을 벌어들일 수 있다. 둘 다 성공하면 백억 원 이상을 거머쥘 수 있다. 그렇게 되면 OSC는 저 구석으로 걷어차 버리고 새로운 사업에 매진할 예정이었다.

바람이 잔뜩 들어간 승대는 OSC의 업무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이문식은 곁에서 자꾸 그의 탐욕에 펌프질 해대어 OSC의 업무는 직원들이 하는지 마는지 관심이 없었고, 일부 직원을 차출하여 모래와 사철, 기름 사업에 올인하다시피 했다. 그 와중에 회사공금도 그쪽에 유용했다.

1년 전 어느 날, 승대는 고등학교와 A대학교 후배인 임선학 사장을 만났다. 그는 한국의 S캐피털에서 펀드를 운용하다 최근 독립하였는데, S캐피탈에서 근무할 때 사귀었던 일부 고객들과 함께 필리핀의 루손 섬 북쪽 카가얀 지역의 사철 사업에 투자하기로 하고 필리핀에 들어왔다. 투자를 받은 수십 억 원 중에서 20억 원 이상의 거액을 이미 필리핀에 들여왔다고 임선학이 그에게 귀띔했다.

승대는 임선학을 인채에게 소개했다. 그의 의도는 임선학이 인채를 회유하여 광산에 투자하도록 하거나, 그게 여의치 않더라도 인채가 알고 있는 정보를 공짜로 얻어내자는 것이었다. 그들의 속셈을 알지 못한 인채는 친구 원규의 대학 후배이기도 하여 밥과 술을 사주며 손님처럼 극진하게 대접했다.

“임 사장님, 사업계획은 잘 들었습니다만, 나는 광산업에 관심이 없어요. 필리핀에는 인도네시아와 마찬가지로 광산 주위에 사기꾼들이 우글거리니 조심해야 합니다. 현직 도지사, 국회의원, 시장, 군수 모두 그런 사기꾼들과 한 패이거나 사기꾼들을 이용하여 뒷돈만 챙기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니까요. 지금 외국에 수출되고 있는 광물들은 모두 필리핀 대기업들이 진행하고 있습니다. 판로에 자신 있다면 그런 큰 회사들을 직접 찾아가 상담해보시지요.”

“저도 검토해보았는데, 큰 회사들은 이미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어서 우리가 원하는 만큼의 고수익을 얻을 수 없는 구조더군요. 작은 광산업자들, 특히 아직 수출한 경험이 없는 업자들과 거래해야 그들은 알지 못하고 우리만 아는 고수익이 가능해요. 그런 눈먼 고수익을 찾는 것이 우리 투자의 주 목적입니다.”

“필리핀은 자본주의 역사가 우리보다 훨씬 오랜 나라입니다. 서민들이야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어리석지만, 사업을 하고 있는 중산층과 상류층은 우리보다 더 두뇌회전이 빠르고 교활하니 조심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 나라 사람들에게 당합니다. 소규모 업자들이라 하더라도 중산층 이상이라고 보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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