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실화소설 ‘더미’ 37] “당신 약점 다 알고 있으니 꼼짝마”

[아시아엔=문종구 <필리핀바로알기> <자유로운 새> 저자] 박만길 회장에게 부탁했던 일이 무위에 그치자 승대는 원규의 보복이 두렵고 걱정이 되어 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이문식을 찾아갔다. 그때가 7월 초였다. 이문식은 승대를 염려하는 척하면서 다시금 한국으로 돌아가기를 권했다. 회사는 자기에게 맡기면 된다고 했다. 어차피 법적으로 외국인은 회사를 경영할 수 없기 때문에 파블로가 반대하면 승대가 회사에서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사회 의결에 의해 그동안 승대가 제멋대로 가져갔던 비용이 횡령으로 선언되었을 뿐만 아니라 벌써 두 달째 회사로부터 돈을 가져다 쓸 수 없게 되었지 않은가.

“투자계약서에 따르면, 제가 경영을 내려놓고 한국으로 돌아간다 해도 동업자들과 만장일치 합의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동업자 회의는 무슨! 지금 이 상황은 이미 동업이 깨진 것이나 다름없어.”

“네……”

“조만간 내가 파블로를 만나서 설득하고 앞으로의 계획을 상의해볼 테니 그 후에 다시 만나자. 그리고 며칠 전에 윤원규하고 박인채가 회계실사를 하자고 해서 일단 그렇게 하기로 말로는 약속했지만 그깟 약속이야 지킬 필요가 없고, 절대로 실사를 허용해서는 안 돼. 회사 장부들 중에 너하고 나한테 불리한 것들은 다 없앤 후에 새로 만들어야 하니까 시간을 벌어야 하거든.”

며칠 후 고승대와 이문식, 그리고 그들의 더미들인 파블로와 헬렌이 회동했다. 이문식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앞으로 이렇게 진행하면 어떨까 싶어. 너는 지분의 25%를 내가 소개해주는 심종하 사장에게 양도하고 한국으로 돌아가. 다만 필리핀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한국으로 도피하는 것 아니냐고 주위에서 의심할 수 있으니 네가 적당한 이유를 생각해 봐.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회사를 경영하더라도 윤원규나 박인채를 철저하게 배제하고 간섭받지 않아야 하니까 그 자들을 어떻게 회사 근처에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할 것인지도 머리를 써 봐.”

“그 부분은 이미 계획을 짜 두었습니다. 윤원규가 킬러를 고용하여 저를 필리핀에서 쫓아냈다고 소문을 내겠습니다. 그리고 회사가 흑자전환을 하게 되니까 원규가 더미를 사주하여 경영권을 탈취했다는 소문도 내겠습니다. 헛소문이지만 그것을 누가 필리핀까지 와서 확인하려 들겠습니까? 혹시 누군가 확인하려든다 해도 재빠르게 멀리 퍼뜨리고 나면 소문을 믿는 사람이 진실을 확인하려는 사람보다 많게 마련이니까요.”

“좋은 생각이야! 그러면 이곳에서는 사장인 헬렌이 박인채와 그의 아내 마리셀을 횡령죄로 필리핀 검찰에 고소할 것이야. 그것도 네가 동문들과 윤원규의 거래처에 소문을 내. 필리핀에서의 횡령죄는 보석이 되지 않고 감옥에 들어가 있는 상태에서 재판을 받아야 하니까 우리한테 와서 협상하자고 사정할 것이고, 우리는 충분한 돈을 받아 챙긴 후 고소를 취하해주면 될 것이야…… 으흐흐흐.”

이문식은 음흉하게 웃었지만 그의 계획을 들은 승대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박인채와 마리셀이 횡령한 적이 있습니까?”

“필리핀에서 한두 달 살았어? 이 사람이 순진하기는! 사건이야 허위로 만들면 되는 것 아닌가. 검찰이 기소하는 작업은 파블로가 프리메이슨 조직을 동원하기로 했어. 어제 전화상으로 너에게 설명했듯이, 파블로는 회사의 경영권만 보장해주면 우리 일에 협조하기로 했으니까. 물론 너하고 내가 합의했듯이 그것은 더미를 내 애인으로 바꿀 때까지 한시적인 것이고. 파블로는 프리메이슨의 간부니까 일은 제대로 처리할거야. 다만 네가 그 조직원들과 검사에게 들어갈 비용을 부담해야 돼.”

비용이 든다는 이문식의 말에 승대가 움츠러드는 목소리로 파블로를 쳐다보았다.

“아, 네…… 프리메이슨의 조직과 검사에게…… 비용이 얼마나 들까요?”

파블로가 이문식과 승대를 번갈아보며 대답했다.

“최소한 50만 페소는 필요합니다.”

이문식은 고개를 끄덕이며,

“50만 페소? 한국 돈으로 1,300만원밖에 안 되네? 네가 1억5천만원 횡령했다는 것을 무마하고 한국에서도 너를 고소하지 못하도록 압박하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 비용은 아주 저렴한 것이야.”

“하지만 만일 윤원규와 박인채가 반발하면서 맞고소 하면 어떻게 하지요?”

승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자 이문식이 손을 내저으며 일축했다.

“횡령죄는 헬렌이 고소인이야. 만일 그 자들이 맞고소 한다 해도 헬렌을 상대로 밖에 못해. 그리고 헬렌을 건드리면 헬렌의 대부인 파블로가 보복할 것이고. 안 그렇소, 파블로?”

“나나 헬렌을 건드리면 미스터 박이든 미스터 윤이든 제거해 버릴 것이오!”

그제야 승대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그럼 50만 페소를 준비하겠소! 대신 확실하게 일을 처리해 주시오! 회사를 당신들이 경영하면서 이익이 발생하면 나의 지분에 대한 배당도 정확하게 챙겨주시오. 내 지분은 일부만 팔고 나머지는 계속 헬렌에게 신탁해 놓을 것이니까 말이오.”

승대와 파블로가 손을 맞잡고 굳은 악수를 했다. 그들 두 사람은 지난 두 달 동안 적이었지만 이제 동지가 된 것이다. 파블로는 수재 이문식의 각본에 따라 움직이는 허수아비였고, 아이큐 천재 고승대는 이문식의 계략은 모른 채 자신의 탐욕만 쫓는 바보였다.

그들 곁에 앉아 있던 헬렌은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로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이문식과 승대의 더미이자 OSC의 대표이사인 그녀는 현재 그들이 꾸미고 있는 음모가 차질을 빚으면 모든 민/형사상 책임을 혼자 뒤집어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줏대도 사고력도 없는 대부분의 필리핀 더미들이 으레 그러하듯 실제 오너가 결정하는 대로, 시키는 대로 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부사장인 대부 파블로가 그녀 곁에서 지켜줄 것을 깊이 믿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는 눈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침까지 내린 비가 그치더니 어느새 강한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사우디 건설현장에서 일하고 있을, 검게 그을린 남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곳은 여기보다 더 뜨거울까?

그때였다. 회의를 마무리하고 모두들 떠날 채비를 하는데 승대가 ‘흠, 흠’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여러분들에게 마지막으로 딱 한 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만약 앞으로 진행되는 일이 나에게 불리하다고 판단되면 나는 언제든지 최후의 수단으로 필리핀 정부에 우리가 저지른 모든 범죄 자료들을 제공할 것이고 모든 더미들을 폭로할 것이오. 명심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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