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실화소설 ‘더미’ 26] 2009년 3월 장자연 자살사건으로 시끄러웠다
어린이를 불행하게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언제든지, 무엇이라도 손에 넣을 수 있게 내버려두는 것이다.
– 장 자크 루소(1712-1778)
[아시아엔=문종구 <필리핀 바로알기> 저자] 2009년 3월은 배우 장자연 씨의 자살사건 때문에 시끄러웠다. 그녀가 쓴 유서에는 돈과 권력을 쥔 남자들이 여자 연예인들을 노리개로 삼는다는 소문이 사실이라고 폭로했다. 국민들은 그 남자들에게 분노했지만 승대는 그 남자들이 부러웠다. 하루빨리 부자가 되어 그들처럼 어여쁜 연예인들과 즐기고 싶어 조바심이 났다.
사표가 늦게 수리되는 바람에 예정보다는 약간 늦은 3월 중순경에 승대가 마닐라로 돌아왔다. 석 달 전에 떠날 때는 SNC의 월급쟁이었지만 이제는 OSC의 경영자로 돌아왔다. 사장이 된 것이다! 아이큐 낮은 사람들의 간섭을 받으면서 경영한다는 것은 굴욕이었고 경영권을 잡고 있어야 그의 아이큐가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여 단시일 내에 갑부대열에 오를 수 있을 것이기에 단독경영은 그가 가장 역점을 둔 꿈이었다. 드디어 그의 꿈과 욕망이 실현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가 한껏 꿈꿨던 것보다 더 빨리, 더 짜릿하게 실현되자, 욕망은 오히려 더 큰 욕망을 부채질했다. 성공에 대한 조급한 욕망 때문에 맥박이 빨라지고 흥분 상태가 되었으며, 여기에 자신감까지 더해졌다.
OSC의 사무실에 출근하기 시작하면서 그는 인채의 가게와 별장에 발을 뚝 끊었다. 원규에게 전화를 하거나 이메일을 보내어 이러저러한 상의를 한다거나 안부를 묻는 일도 그만두었다. 어쩌다 원규가 연락을 해 와도 회사 업무 때문에 바쁘다며 금세 전화를 끊어 버렸다. 하지만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원규는, 처음 시작하는 사업인 만큼 딴 겨를이 없이 바쁠 것이라고 생각하며 한 번도 그의 태도 변화에 서운해 하거나 의심을 품지 않았다.
OSC 인수 초기에는 승대가 사장 업무를 서투르게 하고 있지나 않나 염려한 인채가 가끔 사무실로 찾아가곤 했다. 그때마다 업무에 바쁜 직원들이 그의 방문을 어색해하고 불편해 한다고 승대가 얘기했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던 인채는 승대가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에만 사무실에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원규가 부탁했던 대로, 한 번 믿었으니 끝까지 믿어주자고 마음먹었다.
OSC에서 승대는 왕처럼 우쭐거리고 싶은 본성을 드러냈다. 매정한 눈빛으로 회사의 분위기를 압도했고, 호통을 쳐서라도 모든 직원들이 굽실거리게 하는 일에 즐거움을 느꼈다. 우선, 그는 필리핀 직원들을 채용할 때 아이큐 검사를 필수항목으로 넣었다. 평소에 필리핀 사람들의 평균 아이큐가 90 이하일 것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그가 실시한 아이큐 검사 결과가 (그의 아이큐 검사지가 어느 정도 신뢰성이 있는 것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정말이지 평균 85 정도로 나오자 그의 천재적 직감이 구체적인 근거를 가지게 되었다. 모든 직원들의 아이큐 테스트 결과를 공개했다.
그러고 나서 직원들과 회의를 할 때마다 자신의 아이큐가 156임을 수시로 주지시켰다. 아이큐가 승대보다 낮은 사람들은 그의 의견이나 결정에 군말 없이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했다. 아니 거의 노골적이었다. 그가 아이큐 156을 얼마나 자주 강조했던지 어느 여직원은 업무용 노트의 한 페이지 전체를 할애하여 커다랗게 156이라고 적어 놓기도 했다. 뒤에 있는 여러 페이지에 걸쳐 흔적이 남을 정도로 힘을 주어 꾹 눌러 쓴 글씨체였다. 경멸과 조소가 확실했지만 승대 혼자 정반대로 느꼈다. 그는 모든 직원들이 자신을 존경한다고 믿었다. 부와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은 원래 지배당하는 자들한테 존경을 받고 사는 것을 아주 당연하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회사에 일부러 업무시작 시간보다 약간 늦게 출근했다. 모든 직원들은 그의 모습이 사무실에 나타나자마자 벌떡 일어나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하고 큰 소리로 인사를 해야 그날 하루가 평화로웠다. 간혹 차를 수리 중이거나 컴퓨터 앞에서 업무에 열중하느라 그에게 인사하는 것을 놓치게 된 직원들이 생기곤 했는데, 그러한 철딱서니 없고 눈치 없는 직원들에게만 요령껏 불이익을 주곤 했더니 한 달쯤 지난 후에는 마치 군대와 같은 상명하복식의 단순무식한 분위기가 회사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는 또 업무지시를 큰 틀에서만 했다. 그렇게 해야 세세한 부분에서 맘에 들지 않는 부분을 들춰낼 수 있고 사소한 실수를 유발시킬 수 있어서이다. 실제로 거의 매일 직원들의 실수나 미흡한 점들을 찾아내어 여러 직원들 앞에서 화를 내며 모욕을 주곤 했다. 회의 중에 직원들이 자기 이야기를 듣지 않는 것 같으면 똑바로 들으라며 주먹으로 책상을 쾅쾅 내리치기도 하고, 입을 다물고 있으면 왜 질문이 없느냐고 화를 벌컥 냈다. 툭하면 ‘이 바보 같은 놈!’이라는 호통이 떨어졌고, 직원들의 자존심을 짓밟는 욕을 해대기 일쑤였다. 특히 더미들에게 더 심했다.
서류상으로는 그들이 승대보다 높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혹시라도 다른 직원들이 착각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자기보다 아이큐나 직책이 낮은 사람들에게 굴욕감을 주어야 속이 시원했던 그는, 단적으로 묘사하자면, 명령하고 호통 치는데 길들여진 얼간이 장교 또는 폭군 같았다.
영어를 잘하는 여직원은 일찍 퇴근시켜 그의 집에서 애들 과외를 공짜로 시켰다. 그렇다고 해서 자괴심 같은 것을 느낀 적은 없었다. 집에서 가끔 발생하는 전기나 수도 또는 하수배수관 수리 같은 귀찮은 일들도 회사의 직원들을 보내서 돈 들이지 않고 해결했다. 회사 안에서 돈이든 직원들이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마음대로 다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무한책임 단독 경영자니까. 사장이니까.
직원들이 속으로 욕하고 흉을 보았지만 천재가 둔재들의 사소한 속마음까지 헤아린다면 큰일을 벌이지 못하는 법이다. 그의 인권유린 행위나 공사를 구분하지 않는 경영스타일에 대해 직원들 중에 그 누구도 공개적으로 불평 한 마디 제대로 입 밖에 내놓지 못했다.
시일이 지날수록 그의 생활은 차츰 필리핀 상류층을 닮아가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그의 용렬한 성격도 차츰 사무실 밖에까지 드러나기 시작했고 재물에 대한 탐욕, 즉 정비업보다 더 수익이 큰 다른 사업을 찾기 시작했다. 회사의 돈을 착복하거나 회사의 직원들을 자신만의 개인사업에 이용하는 것은 동업자들의 몫을 빼앗는 것이나 다름없지만,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을 꺼리거나 무서워한다면 재벌 회장이 될 자격이 없는 못난이라고 믿었다. 간단히 말해서, 승대는 권력자와 갑부들의 자녀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덜 심한 형태의 자폐아 증세가 조금씩 심해지고 있었다.
순식간에 1년의 세월이 흘렀다. 세계의 경제가 침체기로 빠져들면서 한국도 일부 대기업들만 간신히 이익을 내고 나머지 대부분의 기업들은 적자를 면치 못했다. 적자에 허덕이던 회사들 중에는 기술력이 탄탄하지만 생산된 제품의 판로에 애를 먹다가 자본력을 갖춘 다른 회사에 팔리는 경우가 허다하게 발생하고 있었다.
2010년 초, SN그룹에서는 차량엔진부품을 제조하는 ‘기흥T&C’를 인수한 후 부품의 해외 판매를 SNC에 일임했다. SNC에서는 필리핀의 시장 확대를 위해 대리점을 확충하기로 결정했다. 그 전까지의 모든 필리핀 국내 판매는 SN-ETRA를 통해서만 했었는데, 두 개의 대리점을 추가하여 시장을 넓히고 대리점들끼리의 판매경쟁을 유도한다는 전략이었다.
누군가로부터 사전 정보를 입수한 승대가 원규에게 전화를 했다.
“윤 선배님,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그동안 잘 계셨습니까?”
“어? 고 사장? 그래, 오랜만이야. 요즘에도 그렇게 바빠? 통 연락이 없으니 궁금하던 차였네.”
“네, 관리가 엉망이었던 회사를 정상궤도에 올려놓으려니 시간과 정력이 많이 드네요. 하하하!
“그래, 바쁘다면서 무슨 일로 전화했는가?”
“다름이 아니라, SNC에서 곧 마닐라 대리점을 두 군데 더 선정한답니다. 우리 OSC가 SNC하고 계약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SNC는 자네 친정이잖아. 그 일은 나보다 자네가 나서야지.”
“물론 그렇긴 한데요, 일부 임원들이 저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어서요.”
“자네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다고? 무슨……?”
“아, 개인적인 것이에요. 아무튼 시간이 별로 없으니 선배님께서 힘 좀 써 주십시오.”
SN그룹의 또 다른 계열사인 SNP는 15년 이상 원규 회사의 주요 거래처였다. 하지만 A대학 동문들이 SNC에도 여러 사람 일하고 있기 때문에 원규는 SNP의 인맥을 통하지 않고서도 수월하게 SNC의 임원들을 만날 수 있었다. 동업회사의 영업을 하기 위한 일이기에 원규는 발 벗고 나서기로 했다.
그런데 손 실장을 만나서 얘기해 보니 승대의 정보가 맞기는 했지만 그 담당자가 다름 아닌 손 실장이었다. 원규는 의아했다. 어라? 승대는 왜 자기의 옛 직속상관이었던 손 실장에게 직접 부탁하지 않고 나한테 다리를 놓아달라고 하는 것이지?
원규는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승대가 개인적인 오해라고 하기에 차마 먼저 물어볼 수는 없었다.
“저, 손 선배님. 방금 말씀하셨던 그 필리핀 대리점을 제가 동업하여 참여하고 있는 OSC에 주시면 안 될까요?”
“그렇지 않아도 윤 사장이 나를 만나자고 했을 때 그 얘기 할 줄 알았네. 하지만 우리 회사는 OSC하고는 거래할 수 없어.”
손 실장이 떠름한 표정으로 원규에게 속내를 털어놨다.
“네? 저희 OSC에 어떤 결격 사유라도……?”
“이런 말을 하기는 뭐하지만, 고승대 때문이네. 우리 회사의 임직원들이 다들 승대하고 일하는 것을 꺼려하거든. 승대가 OSC의 경영자로 있는 한 우리하고 거래하기 힘드네.”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손 실장의 말에 원규는 깜짝 놀랐다.
“네에? 승대가 SNC에 무슨 큰 잘못이라도 저질렀습니까?”
“내 입으로 그런 얘기를 하기는 좀 그렇고…… 아무튼 미안하게 되었네. 만약 윤 사장이 직접 OSC를 경영하거나 승대가 아닌 다른 동업자가 경영한다면 모를까, 그 건은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네.”
“무슨 영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선배님!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