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실화소설 ‘더미’⑩] 리나는 침대에 쪼그리고 앉아 훌쩍였다
[아시아엔=문종구 <필리핀 바로알기> 저자] 그녀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달후와 인채를 번갈아 쳐다보고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하지만 조금 전부터 그의 음색이 밝지 않고 인채의 표정도 굳어 있음을 눈치 채고 있었다. 불길한 느낌이 그녀의 가슴에 서늘하게 밀려들었다.
잠시 동안 입을 꼭 다물고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인채가 일어나면서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김 사장!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네! 다음 주 월요일에 다시 올 테니 그때까지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는 그대로 이행하시게! 앞으로의 일은 그 후에 상의하세.”
인채가 사무실을 나가려 하자 그가 인채의 소매를 잡았다. 그의 행동은 친절하고 공손했지만 억지스럽고 가식이라는 게 다 드러나 보였다.
“형님, 설마 이런 가벼운 실수를 가지고 저한테 화를 내시는 것은 아니지요? 그리고 참, 수입대금 송금은 언제 하실 건가요?”
인채는 그의 손에 잡힌 소매를 가볍게 빼면서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방금 내가 했던 말 허투로 듣지 말게. 일단 자네가 계약을 제대로 이행하는지부터 확인한 후에, 그리고 앞으로도 나하고의 계약과 약속을 성실하게 지킬 것인지 확신이 선 다음에 송금을 고려할 것이네.”
사무실을 나서며 인채는 며칠 전에 읽다 만 <채근담> 한 구절이 떠올랐다. ‘사람을 사귐에는 언제나 신중해야 한다. 벗이 많다고 해서 전부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 중에는 알랑거리며 접근해 오는 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자들은 끝내 신뢰를 배신과 사기술로 갚는 것이다.’
과연 저 김달후가 나의 신뢰를 배신과 사기술로 갚을 사람일까? 인채는 막연한 의심과 불안을 느꼈다.
그동안 필리핀에서 살면서 인채는 말벗이 없어서 쓸쓸했었다. 정직하고 믿을 만한 사람들과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러다 갑자기 가까워진 교민들에게 크지 않은 액수이지만 빌려주고는 돌려받지 못한 경우를 몇 번 당했었다. 그 사람들은 지금도 어느 모임에 가면 얼굴을 마주친다. 속이고 배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기가 너무나 쓸쓸하다는 것을 느낀 그는 새로운 사람들 사귀기가 꺼려졌다.
설마 이번만큼은 아니겠지? 인채의 지친 마음은 다시금 의심과 불안 사이를 넘나들었다.
‘엿 먹어라! 개새끼야!’
사무실을 나서는 인채의 뒤통수에 대고 속으로 욕을 퍼부은 달후는, 눈썹을 찌푸리며 지금까지의 재정상태를 정리해 보았다. 그가 관리하고 있는 통장에는 17만 페소의 잔고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만약 박인채와 결별하게 되면 당장 다음 달부터 회사 운영경비와 체류 비용조차도 달랑거리게 된다.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달후는 일찍 퇴근하여 백화점에 있는 극장으로 가서 아무 영화나 보았다. 한글 자막이 없어서 무슨 내용인지 도통 알 수 없었고, 그의 머릿속에는 영화보다는 그를 힘들게 하고 있는 인채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어슴푸레한 저녁 공기가 떠돌아다닐 쯤에야 극장을 나와 적당한 술집을 고르러 나섰다.
그는 JD정비소의 등록이 끝난 후부터 리나와 함께 밖에 다니는 것을 꺼려하기 시작했다. 영화를 보러 갈 때에도, 외식을 하러 나갈 때에도 혼자 다녔는데, 그녀의 존재는 그의 사업을 보호하는 더미주주, 그리고 낮에는 사무실 부하 직원, 밤에는 공짜로 그의 성욕을 해소할 수 있는 여체일 뿐이었다.
그의 천대에 리나는 침대에 우울하게 움츠려 앉아 밤을 새는 날이 늘어갔다. 훗날 그녀는 지인들에게 말했다.
“몰랐어요.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고, 결혼하겠다고 했던 말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그땐 정말 몰랐어요. 그런 사람을 사랑했던 내가 어리석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