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실화소설 ‘더미’⑥] 달후한테 필요한 건 ‘더미’와 ‘돈’이었다

[아시아엔=문종구 <필리핀 바로알기> 저자] 회사의 상황이 어려워지자 달후의 태도가 바뀌기 시작했고 눈치가 빠른 리나의 태도 역시 바뀌기 시작했다. 그는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찾으러 간다는 핑계로 자주 혼자서 시내를 쏘다녔다. 그녀는 부모님께 인사하러 가자고 자주 보챘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노골적으로 싫어했다. 그들의 동거생활은 아귀가 안 맞는 문짝처럼 삐걱거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특히 그녀는, 하루라도 빨리 애를 갖고 싶어 했다. 사업이 더 힘들어지면 그가 한국으로 도망쳐 버릴까 봐 걱정이 되었고, 애가 있으면 그와 오래도록 함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아직 애를 가질 시기가 아니라고 말하며 임신이 가능한 날에는 체외사정을 하면서 버티었다. 그의 의중을 좀 더 확실하게 알게 된 리나가 절정의 순간이 왔음을 느낄 때마다 그의 엉덩이를 꽉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는 기어코 몸을 훽 돌려 버렸다. 달후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이나 가정이 아니라 더미와 돈이었다.

가끔씩 임신되지 않는 날이라고 리나가 속이기도 했지만 그 기간을 달후도 계산하고 있었다. 몇 개월 동안 두 사람 사이는 신경전과 성전性戰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여자의 생리주기가 규칙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는 모르고 있었다.

3월 초순에 달후는 우연이었는지 아니면 인생이 그를 시험하고 싶었던 건지 어떤 교민을 만났다. 말라떼 지역에서 ‘블루오즈’라는 안마숍을 운영하고 있는 박인채였다. 그의 차가 공교롭게도 JD정비소 앞을 지나가다가 에어컨이 고장 나서 들어왔다. 간판에 한글이 섞여 있으니 반가운 마음도 있었을 것이었다. 직원들이 박인채의 차를 정비하고 있는 동안 시원한 사무실 안에서 인채와 달후는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었다. 인채가 떠날 때쯤에 달후의 머릿속에는 근사한 플랜이 그려지고 있었다.

인채의 나이는 40대 초반이었고 보통 키에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둥근 얼굴과 순진한 눈을 가지고 있었다. 간편하고 수수한 옷차림을 하고 다녔지만 생활에는 여유가 있어 보였다. 필리핀 여자 마리셀과 결혼하여 어린 애가 하나 있었고 둘째 아이는 임신 중이라고 했다.

달후는 거의 매일 인채의 가게에 놀러 갔다. 인채의 고향이 전남 광주라 하여 그는 물어볼 필요도 없이 인채가 김대중 지지자일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래서 그는 인채 앞에서는 속마음을 감추고 햇볕정책을 열렬히 지지했다. 김 대통령 집권 중에 통일이 될 것이라고 장담했고, 김대중을 헐뜯는 고향사람들을 욕했다. 그는 자신의 부족한 지식과 경험을 걸쭉한 입담으로 때웠고, 인채의 은근한 자기 자랑에는 최대한 칭찬을 하고 아부했다.

그러자 얼마 후부터 인채는 그가 찾아오면 왠지 즐겁고 유쾌해졌다. 한국의 중고차를 수입하여 고가에 팔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비도 하는 그에게 호의를 가졌다. 자기보다 십년이나 젊은 나이인데 마닐라에 들어온 지 반년도 채 안 된 짧은 기간에 번듯하게 자리를 잡았다고 하니 그의 능력이 놀라웠다. 두 사람은 어느새 친하게 되어 그가 인채를 형님이라고 불렀다. 매번 만날 때마다 인채의 낯빛을 살피던 그는 인채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고 마음을 얻으려는 그의 시도가 벌써 결실을 맺을 때가 되었다고 느꼈다.

인채를 만난 지 한 달 정도 지났을 때였다. 블루오즈에서 안마를 받고 나서 인채의 사무실 소파에 앉아 몸을 뒤로 쭉 펴면서 말했다. “형님, 좋은 투자꺼리가 있는 데 한 번 들어 보시겠어요?”

그의 태도는 사뭇 은근했다. 그러자 신문을 읽고 있던 인채가 눈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인채의 눈빛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그래? 뭔데?”

“제가 처음에 수입했던 차 스무 대를 두 달 만에 다 팔아 버렸잖아요. 앞으로 매달 열 대씩 들어올 예정인데, 형님도 아시다시피 제가 가지고 있는 자금은 죄다 정비소 인수하는 데 투자해 버려서 지금은 운영자금이 부족하거든요. 바이어 확실하지요, 공급 확실하지요, 하지만 자금이 부족하다보니 한국에서 차를 외상으로 보내주는 사람이 수익금의 70%를 가져가고 실제로 제일 중요한 판매를 책임지는 제가 30%를 받는 불리한 거래를 하고 있어요.”

그가 일부러 말을 멈추고 잠시 뜸을 들였다. 인채는 다음 말이 궁금하여 귀를 쫑긋 세웠다.

“만일 제가 수입대금을 즉시 지불할 수 있다면 마닐라에서 발생하는 이익금은 모두 제 것이 되는 것인데…… 그게 아쉬워요. 만일, 형님이 저에게 투자하신다면 그 수익금을 반반씩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만…… 형님에게 여유자금이 있다면 한 번 생각해보세요.”

“그래? 투자금이 얼마나 필요한데? 그리고 수익은 어느 정도이고?”

그는 이 질문을 기대하고 있었기에 미리 짜 놓은 대답이 술술 나왔다.

“한국 돈으로 환산해서 설명해 드릴게요. 차 구입비와 통관비용 모두를 합해도 한 대당 150만원밖에 안 들어요. 매달 열 대면 1,500만원이죠. 일년에 120대면 1억8천만원입니다. 그런데 판매가격은, 형님도 아시다시피 이곳 중고차 가격이 세잖아요. 우리 정비소에서 새 차처럼 만들어 놓으면 한 대당 500만원은 받을 수 있어요. 그래도 우리는 차를 빨리 팔아 돈을 빨리 회전시켜야 하기 때문에 450만원에 내놓으면 금방 팔려요. 그러면 대당 300만원 이익이 떨어지는 셈이죠. 매달 열 대면 3천만원, 일 년에 120대가 되니 3억6천만원의 이익이 납니다. 그것을 저하고 반반씩 나누는 거죠.”

“내가 1년 동안 1억8천만원을 투자하면 1년 안에 1억8천만원 수익을 얻는다 이 말인가?”

“바로 그겁니다, 형님! 물론 형님이 돈을 투자하는데 이익을 반반씩 나누자는 것이 어찌 보면 형님에게 불리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저는 정비소 유지해야죠, 직원들 급여 줘야죠, 판매하는 비용도 들어요…… 그런 것들을 제외하고 나면 1년 동안 120대를 팔아도 제게 떨어지는 순이익은 5천만원밖에 안 남을 겁니다. 그래도 저는 아직 젊으니까 좀 더 경험을 쌓고 훗날의 기회를 보면서 조금씩 사업을 늘려갈 것이니까 괜찮습니다.”

“그런가? 한 번 생각해보고 연락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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