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실화소설 ‘더미’②] 기장군청 말단 ‘달후’는 졸부 송회장 수하가 되고
[아시아엔=문종구 <필리핀 바로알기> 저자] 십여 일이 지난 4월 28일, 월요일이지만 달후가 처리하는 업무는 한가했다. 기장 군청에서 일한지도 벌써 1년이 다 되었지만 그는 벌써 공무원 생활에 싫증이 났다. 누구는 몇 억, 몇 백억, 몇 천억을 해 먹었다고 떠드는데 자신은 고작 월급 백만 원 정도를 받고 있으니 이런 직업으로는 평생 부자가 될 수 없을 것 같아 조바심이 일었다. 그의 아버지는 기장군에서 멸치잡이 어선을 타는 가난한 어부였다. 재산이든 인맥이든 초라하기 이를 데 없어서 남들처럼 부모 덕을 기대할 만한 것도 없었다.
무료한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는데, 저쪽에서 언뜻 눈에 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짙은 선글라스에 꽁지머리를 한 사내의 옆모습이 얼마 전 삼촌네 모텔에 투숙했던 손님인 듯했다. 그는 호기심이 일어 슬며시 사내 곁으로 다가갔다. 사내는 토지개발과에서 상담을 하기 위해 대기 중이었다. 그가 일부러 사내 앞에서 얼쩡거리자 결국 사내도 그를 알아보고 말을 걸어왔다.
“저…… 안면이 있어 보이는데, 우리가 어디서 만나지 않았던가요?”
“네? 글쎄요…… 아! 혹시 보름 전에 M모텔에서……”
사내의 눈빛이 반가움에 빛나며 그의 차림새를 훑었다.
“그럼 그렇지! 내가 사람은 잘 기억한다니까! 여기에서 근무하시오?”
“저는 호적계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저쪽에 가서 차나 한 잔 하실래요?”
그가 일하는 자리 근처로 사내를 이끌고 와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았다.
“공무원이었소? 그런데 M모텔은?”
“아, 그 모텔은 우리 삼촌이 운영해요. 그날 삼촌이 급한 볼일이 있다며 저한테 잠깐 봐달라고 해서……”
“그랬구나. 이것 참 묘한 인연이구려. 하하하!”
사내는 자기소개를 했다. 이름은 송재필. 기장군에서 태어났지만 어려서 부산시로 이주했고 지금은 시내에서 술집 세 개를 소유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명함에는 술집 이름은 나와 있지 않았고 서면의 P빌딩에 사무실이 있는 JP개발회사의 회장직함으로 되어 있었다.
송 회장의 부모는 이미 돌아가셨지만 상속받은 임야가 조금 있어서 그 땅을 개발할 계획이라고 했다. 1995년에 기장군이 부산시로 편입되면서 기장군에 땅 투기 바람이 불어 닥치자 송 회장도 좋은 투기 정보를 얻어볼까 한 것이었다.
며칠 뒤, 일찍 퇴근한 달후는 송 회장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열 평 남짓한 조그마한 공간에 송 회장의 커다란 책상만 번들거렸고, 사무실 입구에 있는 조그마한 책상에는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듯해 보이는 촌티 나는 여직원이 일없이 멍청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건설회사의 냄새는 사무실 어디에서도 풍겨 나오지 않고 매캐한 담배 냄새만 진동했다.
그를 반갑게 맞이한 송 회장이 자기가 소유하고 있다는 술집을 보여주었다. 그 당시 한창 인기를 끌고 있던 단란주점이었고 서면에 한 곳, 남포동에 한 곳, 광안리에 한 곳이 있었는데 모두 제법 규모가 컸다.
“우와! 회장님! 초저녁인데도 가게가 손님들로 꽉 찼네요!”
“하하하! 돈벌이에는 술장사가 최고야! 여기 앉아 술이나 한 잔 해!”
“네, 회장님! 그런데 저 여자들은 전부 다 회장님께서 고용한 종업원들입니까? 굉장히 많은데……”
“아냐. 나는 계집들을 고용하지 않아. 골치 아프니까.”
“그럼……?”
“다 손님들이야.”
“네에?”
그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자 손님들은 하나같이 젊었고 다들 춤과 노래가 수준급이었다. 술집 여자들의 뺨을 후려갈길 정도로 잘 놀았다. 여자들에 비해 남자들은 여느 술집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손님들의 모습 그대로였다. 하얀 와이셔츠 위에 검정색 조끼를 입은 남자 종업원들이 부지런히 테이블 사이를 누비고 다니면서 술과 안주를 날랐다.
그날 이후 빨리 부자가 되고 싶은 욕망이 간 속에 가득 차있던 달후는, M모텔에서의 아르바이트를 집어치우고 퇴근 후 밤마다 송 회장을 찾아갔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부자 곁에 있어야 한다는 것과,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설사 그것이 탐욕을 채우기 위한 것일지라도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그는 군 제대하고 나서야 터득했다. 그래서 매일 반복되는 똑같은 스토리의 송 회장 허풍을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들어주거나 자잘한 심부름도 해 주면서 그의 차를 몰았다. 낮에는 공무원, 밤에는 송 회장의 똘마니로서 열심히 일했다.
어느 날, 송 회장의 사무실에서 근처 다방에 커피를 주문했더니 어여쁘고 젊은 아가씨가 보자기에 싼 커피포트를 들고 왔다. 그때 갑자기 달후의 동공이 큼지막하게 부풀었다. 그녀는 파란 물방울 무늬 원피스 차림에 빨간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어깨까지 드리운 까만 생머리를 좌우로 흔들면서 송 회장을 향해 매혹적인 미소를 날리며 걸어오는 저 아가씨는, 얼마 전 M모텔에 왔었던 송 회장의 동행인이었다.
그 후 보름 동안 은밀하게 조사를 해보니 송 회장의 사업 비결이 그의 째진 눈에 들어왔다. 송 회장의 단란주점 근방에 있는 다방에서 일하는 대다수의 여자 종업원들은 송 회장에게 빚을 지고 있었다. 송 회장이 돈을 빌려주면서 내건 조건은, 그녀들이 일하는 다방에 오는 손님들을 송 회장의 술집으로 끌고 오라는 것. 그러면 송 회장은 손님들이 쓴 술값의 일정 부분을 그녀들에게서 받을 원금과 이자에서 삭감해주었다. 그러자 송 회장에게 빚을 진 다방 여종업원들이 밤마다 남자들을 송 회장의 술집으로 소떼처럼 몰고 왔다. 송 회장은 그러한 방법 이외에도 서면 일대의 노름방들과 건달들에 끈을 대고 있었다. 급전이 필요한 사람들의 차를 잡고 높은 이자의 노름자금을 빌려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벌어들이는 하룻밤 수입만 해도 그가 한달 동안 군청에서 일해서 버는 돈보다 훨씬 많아 보였다. 그는 더욱 더 송 회장에게 굽실거리며 밤마다 그의 뒤를 바짝 따라다녔다. 그러다가 아예 집을 나와 송 회장의 해운대 자택 근처에 월세 방을 얻었다. 그러한 달후가 송 회장은 싫지 않았다. 비록 말단이지만 현직 공무원을 부하로 거느리고 다니는 것도 송 회장을 우쭐하게 만들었다.
그때부터 달후는 기장에 있는 가족들과 등을 지기 시작했다. 가난은 전염병과 같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더 이상 전염되지 않도록 서로 피해서 살아야 한다고 그는 믿었다. 그리고 가난한 식구들이 그가 성공으로 가는 길에 짐이 될 뿐이라는 생각에 그는 부모형제와 연락을 끊고 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