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실화소설 ‘더미’④] 김영삼 정부 IMF 구제금융 여파가 필리핀에도

[아시아엔=문종구 <필리핀 바로알기> 저자] 술집을 그만 둔 리나는 적극적으로 달후를 도왔다. 동거를 하기 위한 깔끔한 원룸 콘도를 퀘존 애비뉴 근처에서 임대했다.

그를 성의껏 도와주었던 승호에게는 짐을 옮기던 날 거나하게 한 잔 샀다. 그는 승호에게 사업을 같이 하기로 약속한 적이 없었다는 듯이 “그동안 도와줘서 고맙다”라는 인사만 했다. 송 회장도 달후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승호까지 참여시킬 필요는 없다고 했다. 그저 헤어질 것이라면 승호의 수고에 대해 금전적으로 보상을 해 주고 정리하는 편이 나았지만, 그런 자본주의 처세술을 알기에는 그의 경험이 일천했다.

한편, 술이나 얻어 마시려고 달후를 도와 준 것이 아니라 사업을 함께 하고 싶었던 승호는 몹시 섭섭했다. 멸시를 당했다는 생각이 들자 울분이 치밀었다. 그동안의 경험과 시간을 아낌없이 투자해 준 대가가 겨우 밥 몇 끼에 술 몇 잔? 게다가 약속과 친구를 헌신짝처럼 버려? 승호는 속으로 저주를 퍼부었지만 겉으로는 안 그런 척했다. 그 앞에서 초라하고 비굴한 모습을 보이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혹시 나중에라도 이 녀석의 일이 꼬여서 도움을 요청해 오면 그때엔 반드시 한 몫 단단히 챙기고 말리라고 벼렸다.

주식회사를 설립하는 데 필요한 세 명의 필리핀 이사들은 리나와 그녀 가족의 이름을 빌리기로 했다. 이들 세 명의 등기이사들은 실제로 투자하지 않고 명의를 빌려주었으니 더미라고 부르고, 필리핀 법은 이렇게 더미를 써서 회사를 설립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위반한 자는 명의를 빌린 사람과 빌려준 사람 모두 5년 이상 15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한다. 하지만 필리핀에서는 90% 이상의 외국인 투자자들이 이런 식으로 회사를 설립하여 경영하고 있다.

회사 이름은 송재필과 김달후의 이니셜을 따서 ‘JD인터내셔널 주식회사’로 하여 등록을 마쳤다. 그러자 송 회장이 JD인터내셔널 계좌로 9천만 원을 송금했다.

달후는 이미 점찍어 두었던 정비소에 찾아가 다시 흥정을 했다. 그런데 이전에 승호가 흥정했던 것보다도 리나가 더 싸게 합의를 이끌어 냈다. 그 후에 그녀는 정비사들 채용과 관리에 있어서도 그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똑똑하고 독립심이 강한 여자임을 보여주었다. 달후는 송 회장에게 보낼 허위 영문 계약서를 리나에게 만들게 하여 실제로 지불했던 계약금액과의 차액 2천만 원을 한국에 있는 자신의 계좌로 송금했다.

10월 말, JD인터내셔널에서 송 회장 회사로 첫 수입 오더를 내었고, 송 회장이 미리 모아 두었던, 폐차장으로 갈 예정이던 중고차들을 필리핀으로 수출했다. 한국과 필리핀에서의 수출입 통관 업무는 포워딩업체에 맡겼다.

한 달 후, 정비소에 도착한 한국산 중고차들은 현지인 정비사들이 기초적인 부분만 손을 보았다. 시동이 잘 걸리고 에어컨만 잘 작동하면 차체 외부에 집중적으로 매달렸다. 조금이라도 긁히거나 움푹 들어간 자국은 깔끔하게 고치고 도색한 후 하루 종일 광택을 내었다. 차 안의 시트도 말끔하게 수리하고 세탁했다. 리나는 열심히 현지 신문과 정보지에 싸구려 한줄 광고를 실은 후 전화통 옆에서 하루 종일 대기했다.

그 시기에 한국의 경제는 난리가 나 있었다. 신문과 방송에 자주 광고를 해오던 굵직굵직한 회사들이 줄줄이 부도를 맞고 쓰러지더니 11월 21일에는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치욕을 당했다. 선진국에 진입했다고 자축한지 몇 년 되지도 않아서.

회사를 설립하고 정비소를 인수한 지 두 달 후, 달후는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고장 난 차들이 좀체 들어오지 않아서 정비직원들이 항상 놀고 있었고, 수입하여 외관을 깔끔하게 다듬어 놓은 차들도 영 팔리지 않았다.

어느 날, 달후는 리나를 데리고 JD정비소를 나섰다. 그녀와 함께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다른 정비소들의 상황을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서였다. 필리핀 동쪽 해상으로 스치고 지나가는 태풍의 간접 영향으로 마닐라에 비가 내리던 눅눅한 아침이었다.

신차판매 대리점에서 운영하는 정비소들과 대형 정비소들은 모두 수리하려는 차들로 꽉 차 있었다. 그런데 고작 차 한두 대가 들어갈 정도로 소규모인 정비소들이 왜 그렇게 많은 것인지, 마닐라 전체를 다 아우르면 그런 영세한 정비소들이 수백 개는 될 듯싶었다. 그리고 그러한 정비소들마다 수리 중인 차가 한 대 이상은 있었다. 매일 정비를 필요로 하는 고물 차량 수백 대가 그런 정비소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리나와 함께 몇 군데 소규모 정비소에 들어가 기본적인 수리 몇 가지에 대한 견적을 물어 보았더니, JD정비소의 절반 가격이었다! 소규모 정비소들은 거의 다 가게주인이 직접 수리를 하거나 주인과 함께 식구들이 달라붙어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인건비 면에서 JD정비소는 경쟁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한국에서라면 진작 폐차를 했어야만 하는 고물 중고차들의 차주는 돈에는 여유가 많지 않지만 시간은 여유로운 서민들이었다. 그래서 정비하는 데 드는 시간은 고려하지 않고 고치기만 하면 얼마라는 식으로 아주 저렴한 수리비용을 흥정하고 있었다.

들르는 정비소마다 중고차 가격을 슬쩍 물어보았다. 상태가 그런대로 괜찮다는 전제하에서 15년 연식의 승용차가 일본제인 경우에는 20만 페소에도 거래가 되지만, 한국제인 경우 그 가격은 턱없는 기대라고 했다.

“한국차는 사람들이 꺼려해요. 잘 알려지지 않은데다가, 일본차는 전국 어디에서나 고장 났을 때 부품 조달이 수월하지만 한국차는 마닐라를 벗어나면 부품조달이 어려워요. 그러니 인기가 없을 수밖에요.”

“그래도, 일본차들 하고 비교해서 어느 정도면 팔 수 있을까요?”

“글쎄요. 5년에서 10년 사이의 연식은 일제차에 비해 20%나 30% 정도 싸면 팔리려나? 하지만 10년이 넘어가면 절반 가격으로도 사려는 사람을 찾기 어려울 것이오.”

달후는 시장조사를 너무 허술하게 하여 사업에 뛰어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중고차 판매 수익은 애초에 예상했던 것보다 절반도 안 될 것 같고, 정비업은 적자일 터이니 전체적으로 적자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 모든 것이 승호 탓이라고 달후는 생각했다. 승호가 자기를 꼬드겨 사기를 치려다 성공하지 못하자 달후가 죄다 뒤집어쓴 것이라고 생각했다. 탐욕에 몰두해있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책임전가 의식구조였다.

JD정비소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손에 땀이 나도록 초조하고 불안했다. 리나도 그의 심중을 눈치 챘지만 얼굴에 드러내지 않고 차창 밖만 내다보았다. 어둑해진 거리는 축축한 비바람을 맞고 있었다.

필리핀에서 일 년 중 가장 더운 계절은 3월 초부터 5월 말까지이다. 아직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지 않은 2월 하순이지만, 후덥지근한 기후가 불안으로 인해 달구어진 달후의 피로와 짜증을 더욱 부채질했다.

그가 리나를 불러 브로커 토미와 계약을 하도록 지시했다. 단, 스무 대 모두 한꺼번에 사 가는 조건을 달았다. 리나가 연락을 취하자 토미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뒷걸음질을 쳤다. 한국 중고 차량들에 대해 상태가 나쁘다는 소문이 자자해서 예전의 가격으로는 팔기 힘들다고 하면서 전화를 먼저 끊어 버렸다. 그것은 본격적인 흥정을 하자는 제스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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