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실화소설 ‘더미’⑪] “알랑거리며 다가오는 사람은 배신과 사기뿐”-채근담

[아시아엔=문종구 <필리핀 바로알기> 저자] 잠시 후, 인채는 직원이 받아 온 SEC 서류에서 마리셀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투자계약서에는 마리셀이 30%의 지분을 소유한 주주로 등기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는 넉 달이 지나도록 그 계약조건을 이행하지 않고 있었다. 인채는 마리셀에게 대강의 문제점을 설명한 후 그녀의 친구로 하여금 바이어인 것처럼 행세하며 리나에게 접근하도록 했다.

이틀 후, 마리셀의 친구가 JD정비소에서 실제로 판매하는 중고차 가격을 알려왔다. 달후에게 속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한 인채는 통장에 남아있던 금액 중에서 최저 잔액인 만 페소만 남겨두고 나머지를 블루오즈 계좌로 이체했다.

8월 25일, 달후가 한국에 송금할 수표에 서명을 요청해 왔다. 그 수표를 들고 인채가 달후를 만나러 정비소를 찾아갔을 때에는 오후 4시경이었다.

“김 사장, 한동안 얼굴 보기 힘드네?”

불쑥 사무실로 들어서는 인채를 보자 그가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이쿠, 형님! 어서 오십시요. 연락을 하고 오시지 그랬어요…… 미리 맛있는 과일이라도 좀 준비할 걸…… 하하하!”

“뭐 우리가 미리 약속을 해야만 만날 수 있는 그런 사이는 아니라고 보네만…… 급히 상의할 게 있어서 왔네.”

인채가 소파에 앉자 그도 자리를 옮겨 건너편 소파에 마주보며 앉았다. 리나가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내 왔다.

“우리 가게에 급한 일이 생겨서 어제 통장에 있던 잔액을 옮겼네. 그래서 오늘 한국에 송금할 돈이 없네.”

달후는 순간 당황했다.

“네? 그러면 안 되는데…… 송금날짜를 어기면 안 된다고요.”

“그리고 또 다른 문제는, 우리 투자계약서에는 분기별로 재정보고를 나한테 하기로 되어 있잖은가. 그런데 벌써 다섯 달이 다 되어 가도록 아직까지 한 번도 보고 받은 적 없었네.”

그 말을 듣자 달후가 어색한 미소를 띠웠다. 그는 인채의 눈길을 피하며 말했다.

“그거야 형님도 보시다시피 저희가 몹시 바쁘지 않습니까! 리나 혼자서 경리 보랴, 영업하랴, 정비소 관리하랴…… 이달 말경에는 보고해 드리려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며칠 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알겠네. 이달 말이면 다음 주 월요일이니 내가 오전 10시경에 여기로 다시 오겠네. 재정보고서 검토하고 나서 점심을 함께하세.”

“그렇게 하겠습니다, 형님!”

“마지막으로, 리나 명의로 되어 있는 지분 중에서 30%를 내 아내 명의로 등기하기로 한 것은 어떻게 되었나?”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듯 그가 허리를 펴고 몸을 뒤로 쭉 젖혔다. 그건 듣고 싶지 않은 불쾌한 질문이었다. 얼굴에서도 미소가 사라지고 딱딱하게 굳어져 갔다. 갑자기 머리를 돌려 리나에게 꽥 소리를 질렀다.

“리나! SEC에 박 사장님 사모님 이름으로 등기하라고 시킨 것 아직까지 안 된 거야?”

리나가 깜짝 놀라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낯빛으로 대꾸했다.

“뭐라고요? 등기라니요? 언제 그런 얘기 하셨어요?”

그가 벌떡 일어나더니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리나 곁으로 다가갔다. 겉으로만 침착할 뿐 속으로는 동요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얼굴은 벌게져 있었다.

“이것 봐. 지난번 4월 달에 박 사장님 사모님하고 네 지분의 30%를 양도하는 계약서에 서명했었잖아. 그리고 그때 내가 분명히 말했지. 박 사장님 사모님 명의로 30% 지분 SEC에 등기하라고. 깜빡 잊어 먹은 거지?”

그녀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달후와 인채를 번갈아 쳐다보고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하지만 조금 전부터 그의 음색이 밝지 않고 인채의 표정도 굳어 있음을 눈치 채고 있었다. 불길한 느낌이 그녀의 가슴에 서늘하게 밀려들었다.

잠시 동안 입을 꼭 다물고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인채가 일어나면서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김 사장!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네! 다음 주 월요일에 다시 올 테니 그때까지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는 그대로 이행하시게! 앞으로의 일은 그 후에 상의하세.”

인채가 사무실을 나가려 하자 그가 인채의 소매를 잡았다. 그의 행동은 친절하고 공손했지만 억지스럽고 가식이라는 게 다 드러나 보였다.

“형님, 설마 이런 가벼운 실수를 가지고 저한테 화를 내시는 것은 아니지요? 그리고 참, 수입대금 송금은 언제 하실 건가요?”

인채는 그의 손에 잡힌 소매를 가볍게 빼면서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방금 내가 했던 말 허투로 듣지 말게. 일단 자네가 계약을 제대로 이행하는지부터 확인한 후에, 그리고 앞으로도 나하고의 계약과 약속을 성실하게 지킬 것인지 확신이 선 다음에 송금을 고려할 것이네.”

사무실을 나서며 인채는 며칠 전에 읽다 만 <채근담>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사람을 사귐에는 언제나 신중해야 한다. 벗이 많다고 해서 전부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 중에는 알랑거리며 접근해 오는 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자들은 끝내 신뢰를 배신과 사기술로 갚는 것이다.’

과연 저 김달후가 나의 신뢰를 배신과 사기술로 갚을 사람일까? 인채는 막연한 의심과 불안을 느꼈다.

그동안 필리핀에서 살면서 인채는 말벗이 없어서 쓸쓸했었다. 정직하고 믿을 만한 사람들과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러다 갑자기 가까워진 교민들에게 크지 않은 액수이지만 빌려주고는 돌려받지 못한 경우를 몇 번 당했었다. 그 사람들은 지금도 어느 모임에 가면 얼굴을 마주친다. 속이고 배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기가 너무나 쓸쓸하다는 것을 느낀 그는 새로운 사람들 사귀기가 꺼려졌다.

설마 이번만큼은 아니겠지? 인채의 지친 마음은 다시금 의심과 불안 사이를 넘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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