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실화소설 ‘더미’⑮] 외국인은 필리핀 검찰과 경찰의 ‘밥’
[아시아엔=문종구 <필리핀 바로알기> 저자] 그 무렵 리나의 복부는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아주 미세하게 불러오기 시작했다.
10월 하순경, 인채와 마리셀은 케존시 검찰에 출두하여 횡령죄(Qualified Theft)로 조사를 받으라는 통지문을 받았다. 고소인은 JD인터내셔널의 리나였다. 그들은 너무나도 황당한 상황에 아연실색했다. 돈을 투자하고도, 투자한 돈을 회수하지도 못했는데 도리어 횡령죄라니! 그들은 급히 변호사를 물색하여 대응했다.
리나가 두 사람을 횡령죄로 고소한 근거는, JD인터내셔널 통장에 있던 공금을 이사회 의결 없이 임의로 블루오즈 계좌로 이체했다는 것이었다. 인채는 투자와 거래에 대한 근거가 되는 투자계약서를 증거로 제출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계약서에는 더미 방지법을 위반한 조항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인채의 변호사는 문제의 통장이 블루오즈에서 차용한 돈을 관리하기 위한 목적의 계좌였고 애초에 블루오즈에서 돈을 빌릴 때에도 이사회 의결 없이 주주들 간에 구두로 합의하였기 때문에 빌린 돈을 갚기 위해 이체한 행위는 횡령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마리셀과 리나 사이의 지분 양도 계약서, 리나가 은행에 제출했던 계좌 개설 신청서와 블루오즈와 JD인터내셔널 사이의 모든 거래를 입증하는 은행자료를 첨부했다.
인채 측의 무혐의 주장을 추가로 뒷받침하기 위해 블루오즈에서는 JD인터내셔널에 차용금상환소송을 냈다. 차용금 600만 페소 중에서 중도에 변제한 349만 페소를 공제한 잔액 251만 페소를 갚으라는 소송이었다.
리나 측에서는 이사회 의결 없이 블루오즈로부터 차용한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 이사회 의결 없이 차용금을 변제한 사실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자가당착에 빠지게 되어 차용한 사실 자체를 부정하였다. 그러자 인채 측에서는 차용한 사실이 없다면 박인채와 마리셀이 횡령했다는 돈의 출처는 어디냐고 따졌다. 차용한 적이 없다면 차용한 돈을 도난당했다는 말은 자기모순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큰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것은 검찰의 기소 여부였다. 피해자가 억울하든 말든, 죄가 있든 말든, 검찰에 접수된 사건은 무조건 조사를 하는데 특히 외국인이 관련되어 있으면 돈벌이의 좋은 기회로 삼는 것이 필리핀의 검찰이나 경찰이다. 게다가 필리핀에서 10만 페소 이상의 횡령죄는 보석이 허용되지 않는 중범죄다.
그러므로 만일 검사가 기소하여 재판을 진행하겠다고 결정하면 인채와 마리셀은 즉시 구속되고, 구속된 상태에서 길고 힘겨운 재판을 받아야만 한다. 필리핀에서는 고소인의 마음먹기에 따라서 재판을 1년 또는 그 이상 끌어 버릴 수 있다. 필리핀의 감옥은 너무나 많은 재소자들에 비해 면적이 턱없이 좁기 때문에 재소자들이 한꺼번에 동시에 잘 수도 없어서 매일같이 교대로 칼잠을 자야 하고, 성폭력이 자행되고 있다고 소문나 있었다.
인채는 마리셀과 함께 처가로 찾아가 장인어른과 이 문제를 상의했다. 그는 디젤엔진 수리 전문가인데 오랫동안 천식과 당뇨병을 앓고 있어서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는데다가 치료비로 많은 재산을 써버려 삶이 신산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마리셀은 아버지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이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마리셀이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나자 그는 인채와 마리셀을 보며, “곤잘레스에게 부탁해보자. 그 사람은 경찰 간부니까 뭔가 방법이 있을 것이야.” 하고 말하자 마리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 곤잘레스 고모부는 지금 재판 받고 있지 않나요? 지난달에 고모가 저를 찾아와서는 고모부가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소송비용에 필요하다며 돈을 빌려갔어요.”
“그랬었구나. 나도 얼마간 돈을 빌려주었는데…… 곤잘레스는 INC(Iglesia Ni Christo; 필리핀 자생 기독교 단체)에서 지원하고 있으니까 아무 문제없을 거야. 내가 한 번 알아보마. 잠시 기다려라.”
인채의 장인이 곤잘레스의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장인의 여동생이다. 그런데 통화 중에 그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고 심각해지고 있었다.
“음, 그럼 너와 애들은 어떻게 생활하느냐? ……알겠다. 이제 그만 울어…… 힘들면 얘기하고, 몸조심해라.”
여동생과의 통화를 끝낸 장인이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마리셀을 쳐다보았다.
“곤잘레스가 지난주에 5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수감되었다고 한다. 네 고모가 경황이 없어서 아직 아무에게도 알리지 못하고 있었다며…… 민간인을 다섯 명이나 죽였다는데 피해자 가족들 중에 INC 신도가 있었나 봐. 이것 참!”
“어마나, 어떡해!”
마리셀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고, 장인은 후- 하고 한숨을 내쉬고는 힘이 쭉 빠져버린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사람을 한 번 알아보고 연락하마.”
불과 몇 분 만에 그의 얼굴에는 병색이 짙게 물들어 갔고 마른기침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달후는 인채와 마리셀을 횡령죄로 고소해 놓으면 그들의 기가 꺾여 자신을 한국에서 고소할 엄두도 못 낼 뿐만 아니라 이 기회에 그들로부터 좀 더 많은 돈을 갈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미 자신의 알량한 지식과 능력만으로는 부자가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필리핀에서는 머리를 잘만 굴리면 교민들에게 사기와 협박을 적절히 구사하여 쉽게 거금을 긁어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은 인채에게 달라붙은 기생충이 되기로 했다. 조금 더 압박하면 인채가 살려 달라며, 고소를 취하해 달라며 몇 천만원을 가져올 것이다. 그는 인채의 돈을 이미 우려먹었고, 이제는 인채에게 없는 죄를 뒤집어 씌워 괴롭히면서 돈을 추가로 갈취할 수 있을 것이다. 사기 쳐서 돈 벌고, 사기당한 피해자를 또 협박하여 돈 뜯는 비법이었다.
아, 이렇게 쉽게 돈을 벌 수 있는데, 왜 복잡한 무역업이나 정비업으로 골치를 썩여야 했단 말인가? 그렇지만 무언가 그럴듯한 사업체가 있어야 먹잇감을 유인할 수 있다. 그래서 첫 먹이인 인채가 그의 의도를 교민 사회에 소문내고 다녀서는 안 되겠기에 인채의 혼을 빼고 입을 틀어막아야만 했다.
방법이 더럽고 악질적이더라도 그가 먼저 살아야 했다. 그가 먼저 부자가 되어야만 했다. 이 비법이 널리 소문나지만 않는다면 앞으로도 인채처럼 순진한 교민들을 상대로 두고두고 써먹을 수 있을 것이다. 탐욕이 자제력을 잃고 그의 피 속에서 전율했다. 심장이 뛰고 눈이 충혈 되고 악심이 온몸에 번져 나갔다.
원래 부자들이 다 그러하지 않던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을 짓밟아 남보다 먼저 부자가 된다. 그 다음에는 짓밟힌 자들에게 미소를 지으며 다가가 알량한 적선을 던져주면서 자선가가 되는 것이다. 미덕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횡령죄로 고소당한 것 때문에 인채와 마리셀은 매일 극도의 불안과 불면증에 시달렸다. 어느 날 밤 인채가 구치소 안에서 죄수들에게 폭행을 당하는 악몽에 시달리다 깜짝 놀라 깨어 눈을 떠 보니 마리셀도 악몽을 꾸다 일어났는지 파리한 얼굴로 침대에 우두커니 앉아 망연자실해 있었다. 아내의 애처로운 모습에 그의 가슴은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듯 했고, 가위 눌렸던 심장은 순식간에 김달후에 대한 분노의 불길로 활활 타올랐다.